< 87화 > 87.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일들
크리스마스.
누구의 탄신일을 가장해 커플들이 염장을 지르는 날.
그 외에 콘돔회사는 춤추는 날, 호텔 직원들이 바빠 죽는 날이 되겠다.
어느덧 연말이 다가왔고, 연말 대목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사실 해킹툴을 받기 전만 해도 크게 와닿지 않을 날이었겠지만 상황이 많이 변했다.
처음으로 유명호텔에 예약해봤고, 데이트 코스를 선점해뒀다.
소소한 선물까지 준비하느라 지갑이 많이 털렸지만 그 분께서 좋아할 거라는 상상을 하니 딱히 아깝진 않았다.
“오래 걸리네.”
슬슬 어두워질 무렵, 주차한 스포츠카 등받이에 비뚤어지게 눕는다.
이 틈에 퀴즈 시간.
나는 오늘 누구를 기다리는 중일까?
힌트를 주자면 연수는 오늘 프로그램 녹화가 있다.
선화는 인터넷방송, 유나도 마찬가지.
한정아 매니저는 연말 전에 처리해야할 일이 밀려서 오늘도 바쁘게 뛰어다니고, 사랑이는 아직 편의점 알바를 다닌다고 한다.
그럼 정답은?
60초 후에 공개…는 아니다.
정답공개를 위해 나는 휴대폰을 꺼내 즐겨찾기해둔 방송을 튼다.
『그럼 여러분,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벌써?
─가지 마 ㅠㅠㅠㅠㅠㅠ
─더 있어줘잉~
『오전부터 지겹도록 봤잖아요. 할 말 다해서 더 있는다고 뭐 생길 건 없으니 좀 쉴게요』
─히잉 ㅠㅠㅠㅠㅠ
─선바 ㅠ
─크리스마스 또 혼자 보내겠네...
─언니 내일도 와주는 거죠?
『음… 그건 시간 보구요. 자, 진짜 갑니다』
─너무 급방종이잖아 ㅠㅠㅠㅠㅠ
─설마 오늘 누구 만나나요?
그대로 방송 종료.
번갯불에 콩 튀기듯, 채팅창 깡그리 무시하고 급하게 방종하는 선화.
정답은 방송 마무리하는 여왕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같은 특별한 시간은 여친님과 보내기로 예전부터 약속했다.
사실 위에 언급이 제외된 미나에게선 먼저 연락이 왔었다.
이브를 같이 보내지 않겠냐며, 크리스마스에 맞춰 산 붉은 속옷을 찍어 보여주며 야릇한 제안을 했다.
이젠 남친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아양을 떠는, 그야말로 주인님에게 이쁨 받고 싶어 시도 때도 없이 꼬리 흔드는 암캐가 됐다
기특했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그 전부터 선약이 잡혀있었다.
돌려서 피하는 형식으로 다음 기회로 미뤘더니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어쨌든 오늘은 여친님과 함께하는 데이트.
방종했겠다, 이제 바로 내려오겠지 싶었는데 20분이 더 지나서야 내려온다.
방송에서 봤을 때처럼 힘 빡빡 준 메이크업과 화려한 옷으로 도도하게 다가와, 조수석을 연다.
오늘 여왕님 패션은 착 달라붙는 검은 바지에 종아리에 닿을 정도로 긴 코트, 굽 있는 멋진 부츠다.
차안에 따스한 히터바람을 맞이하며 몸을 굽혀 들어온다.
“야, 너무 늦지 않냐.”
“응? 수시로 데이트 지각하는 니가 할 말이야?”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방종하고 바로 내려오는 줄 알았지. 다른 일 생겼나 싶어서.”
“챙길 물건이 좀 있어서 그랬어.”
그리고 보니 손에 쇼핑백이 하나 들려있었다.
시트 아래, 다리 옆에 감춰둔 걸 보아 선화가 이벤트를 준비해온 것 같다.
궁금하지만 나중에 알아서 보여주겠지 싶어 굳이 캐묻진 않는다.
그보단 다른 쪽이 신경 쓰인다.
“그런데 오늘 정말 같이 나가도 되겠어?”
걱정스레 물어보자 가늘어지는 여친의 눈초리.
“지금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랑 같이 나가도 되겠냐고 묻는 거야…? 안 나가겠다고 하면 당장 탈 쓰고 나가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난잡한 방송이나 하게?”
“오늘따라 왜 그렇게 날카로워…… 누누이 말하지만 선화가 걱정돼서 그렇지. 이런 때 방송 쉬면 논란이 생길 수 있잖아?”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선화는 BJ.
특히 뷰티방송을 주력으로 세우기에 얼굴을 파는 직업이다.
조금은 다를 수 있으나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과 흡사하다.
그렇기에 연애 스캔들은 민감한 주제다.
무엇보다 오늘 같은 날, 쉬었다가 꼬투리를 잡혀 논란이 생기는 BJ들이 많다.
논란 = 시청자 감소 = 수익박살로 직결된다.
그럼에도 문제 없다는 듯이 코웃음.
“그래서 오늘 방송 이른 시간에 당겨서 한 거잖아.”
“그래서 더 미심쩍던데? 방종할 때도 채팅에 누구 만나냐는 추측 글이 몇 번 나왔고.”
“어차피 증거도 없잖아.”
“그렇긴 한데, 나갔다가 들키면 괘심죄로 일파만파 일이 더 커질 걸?”
“……그런 건 나도 몰라.”
“모른다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여왕님.
눈도 안 마주치도록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린다.
나는 삼 주 전부터 지극히 이성적인 제안을 했다.
위험한 크리스마스이브보다 좀 당기거나, 그 뒤에 같이 놀자고.
평소에는 방송 외의 시간에 만나니 문제가 없지만, 오늘은 위험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선화는 반드시 오늘 만나야한다며 떼를 썼다.
조금만 참으면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의 시선을 피하고, 실컷 놀 수 있는데 크리스마스이브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 됐어! 오늘은 그냥 놀고 싶단 말이야!”
이 같이 여왕님답지 않게 떼쟁이처럼 나온다.
“그래도 잘 생각해봐. 혹시라도 가는 도중에 변심해도 탓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설득.
어렵사리 예약을 왕창 잡아놨지만 선화가 마음을 바꾼다면 언제든 취소할 의향이 있다.
아무래도 위험한 날이니까.
나의 완고한 태도에 여왕님은 주먹을 부들부들 떤다.
다시 홱 다시 돌아보는 눈 아래에는 붉은 홍조가 새겨져있다.
속 터진다는 듯이 빽 소리를 지른다.
“야 이 빡대가리야 생각을 좀 해! 함께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부터 일만 하고 싶겠냐?! 기, 기껏 사귀는데 오늘까지 일하며 보내고 싫고, 너랑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이잖아 병신아!”
차 안에서 폭발하고 마는 여왕님.
…듣고 보니 그 말이 일리가 있다.
논란이 있든 말든, 감정적인 이끌림.
위험한 다리라도 리스크를 감안하고 뛰어드는 게 사랑하는 커플 사이가 아닐까 싶다.
거기다 일 년에 한 번 뿐인 날이니까.
아무래도 내가 현실적인 문제만 따져보지 않았나 싶다.
씩씩대는 입매와 함께 선화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아니면 뭐야, 벌써부터 나 만나기 질렸어?”
“아니아니아니! 절대 아니지. 우리 여친님 만나는 기대감에 오늘 잔뜩 준비했는걸.”
“흥, 시시하면 죽을 줄 알아.”
“어휴~ 절대 지루할 틈 없이 알아서 모십죠. 그리고 귀찮은 방송 얘기도 그만 할 테니 너무 화내지 마.”
“화낸 거 아니거든? …흥.”
저자세로 싹싹 빌자 이제야 알아먹었냐는 듯, 연속 콧방귀를 내쉬는 선화.
팔짱을 끼고 있는 선화에게 몸을 기울인다.
화해의 제스처를 위해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해준다.
“흐음…♥”
서비스로 뜨뜻한 숨결을 뱉으며 빳빳해진 가볍게 목덜미를 훑어주자 조금은 누그러지는 선화.
마침 귀에 빛나는 익숙한 귀걸이가 하나 보여서 칭찬까지 더한다.
“귀걸이 역시 잘 어울린다.”
내가 전에 사준 귀걸이.
황금빛 얼음결정 형상이 툭하면 얼어버리는 여왕님의 마음과 같다.
“……흥♥”
그럴 때마다 내가 금방 풀어주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여왕님의 그라데이션한 표정변화.
뚱하게 볼을 부풀리면서도 만족스럽게 올라가는 입술.
내 여친이지만 귀여워 미치겠다.
“그럼 캐롤송 들으면서 신나게 가볼까!”
핸들에 스위치를 눌러 음악을 튼다.
액셀을 밟아 RPM을 올리면서 호기롭게 출발한다.
언제나 그렇듯 소리만 크고 안전운전이다.
***
데이트 코스는 이러하다.
가볍게 드라이브로 시작해 예약해둔 방탈출 카페 즐기기, 근처 카페에서 가볍게 차를 마신 다음, 2차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라서 사진 찍기.
그리고 마무리는 호텔에서 가볍게 식사 후 하룻밤♥
되도록 실내코스를 잡았다.
들킬 염려를 최소한 줄여서기도 하고, 선화가 워낙 인적 드문 장소를 선호한다.
입으로는 언제나 함께 밖을 거니길 원하지만, 막상 밖을 나가면 실내를 선호한다.
이윤즉슨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급격하게 피곤해지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란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게 마치 고양이 심보 같다.
아무튼 이 점을 고려해서 코스를 짰기에 쭉쭉 진행했다.
스포츠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 잔뜩 낸 길거리를 드라이브했고, 산타가 납치한 범인이었다는 컨셉 방탈출 카페에서 과도한 승부욕을 내는 선화와 함께했다.
이후, 차는 머물 호텔에 임시 주차해두고, 코스가 남았으니 카페에서 분위기 더 내기 위해 인파가 적은 길거리로 이동한다.
손을 꽉 붙잡고 밤거리를 거닌다.
화려한 백금발 머리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친과 함께.
선화가 선글라스를 썼음에도 주변에서 꼭 힐끗댄다.
힐끗 봐도 예쁜데 맨얼굴은 얼마나 예쁠까 싶어서 두 번, 세 번 꼭 쳐다보는 남자들.
꼬옥♥
그럴 때마다 선화와 더 살갑게 붙는다.
“야 너무 붙지 마.”
“왜? 다들 붙어 다니잖아.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보자고.”
“걷기 불편한데….”
선화는 못 이기는 척, 틱틱대며 허리 감싸기까지 허락해준다.
내가 여왕님의 얇은 허리를 감자마자 주변 행인들의 부러운 눈초리는 3단계 상승한다.
이게 남들 골리는 맛이구나 싶다.
그렇게 붙어서 얼마 걷자 나오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광장.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멈춰 바글바글 몰렸다.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무대 스테이지가 하나 설치됐는데, 크리스마스 특별한 축제나 어떤 방송을 하는지 마이크까지 키고 시끌시끌하다.
“오, 뭐 하나보다. 잠깐 보고 가자.”
“잠깐. 나는 사람 많은 곳 별론데….”
“어차피 시간 남잖아. 뭐하는지 잠깐만 구경하다가 카페에서 몸 덥히자.”
“…그러던가.”
인파를 싫어했지만 옆에 내가 꼭 붙어있어서인지 순순히 따라온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덕에 텐션이 올라가 있다.
부채꼴 형으로 얕게 5층이 있는 인파 속에 붙는다.
유동성 인구가 많았고 운이 좋아 금세 자리가 나온다.
다행히 까치발을 들고 있던 선화까지 보일 공간이 나온다.
『자, 그러면 도전할 커플 참가자들을 모아볼까요?!』
쩌렁쩌렁 광장에 울리는 마이크로 증폭된 소리.
중간에 들어와서 무얼한다는 건지 모르지만 특집 방송이나 소규모 축제 이벤트 같다.
아무래도 방송국 카메라로 녹화까지 따는 모양인데, 뉴스나 연예계 방송에 짤막하게 내보낼 취재차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남자MC 한 명에 유명한 패널들이 여럿 있는 현장.
요즘 TV를 안 봐서 잘은 모르지만, 꽤 눈에 익은 네임드들이 많다.
특히 밑에서 활약하는, 쫄바지에 롱패딩을 입고 참가자들을 모집하는 활발한 여자 패널은 무척 낯이 익다.
마치 함께 침대에서 끈적하게 뒹굴었을 정도로 익숙하다.
“어?”
『어?』
무선 마이크 들고 스테이지 아래로 나온 여자 패널.
다른 말로 풀어쓰면 야생의 연수가 나타났다.
섹파이자, 학원 강사님이자, 유명 셀럽이자, 돈 많은 누나, 하연수 말이다.
거기서 누나가 왜 나와???
아무리 봐도 연수다.
트레이드마크인 넓은 골반은 롱패딩에 가렸지만, 소두에 묶음머리, 얕은 화장기에도 예쁜 얼굴.
더 설명 필요 없이 연수다.
그리고 보니 연수는 프로그램 녹화가 있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이 야외에서 하는 줄 몰랐고, 이런 이벤트성인 줄도 몰랐다.
『……』
반대로 연수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진행마저 까먹고 그 많은 인파 중에 콕 집어서 나를 보고 있다.
이윽고 그 시선은 곁에 있는 선화에게도 돌아간다.
내 옆에 꼭 붙어있는 선화에게.
이 짧은 찰나를 다시 설명하자면, 처음 1초는 나를 봤다.
이윽고 2초가 경과하자 선화에게 시선을 옮겼다.
3초가 되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씨익 울렸다.
눈치 빠른 연수는 단 3초 만에 상황파악을 완료한다.
『이거~ 재밌는 참가자들을 만난 것 같네요!』
마이크에 멘트를 붙이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가득 머금는다.
이것이 테러를 저지르기 전 조커의 광기인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순수한 즐거움에서 우러나왔는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등줄기에서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