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4. 여왕님? 예? 뭐라구요?
머릿속이 울린다.
마치 누군가에게 뺨을 5700대 맞은 기분이다.
아늑하게 멀어지려는 의식을 붙잡는다.
예상 밖의 상황이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면 해쳐갈 수 있다.
우리 조상님께서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
호랑이 개무서워….
선화의 차갑게 일렁이는 눈동자.
차가우면서 뜨거운, 결코 어설픈 변명 따윈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눈빛이다.
침을 꼴깍 삼키며 너스레를 떤다.
“하하, 이게 누군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일단 오늘 무리해서 옷 산 것도 그렇고, 나한테 귀금속 선물에, 타고 온 고가의 차까지. 오늘 수상쩍은 일 투성이잖아?”
“그것만으로…?”
“거기에 시계. 처음에는 무리해서 허세 부리느라 대여한 건줄 알았지만… 매일 차고 다니잖아.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없는 형편에 누가 명품시계를 사?”
그 말을 듣자 아차 싶었다.
젠장, 시계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냥 짝퉁 차고 다닐걸.
“이, 일을 찾았다고 했잖아…. 그… 그래! 스타트업 시작하면서 크게 투자 받을 일이 있었어. 그리고 수중에 돈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그 이상한 탈 쓴 놈이랑 연관 지을 순 없잖아…?”
당황한 나머지 삼류악역처럼 주절주절 떠들어 버린다.
임기응변의 막기 급급한 반론에, 찬란한 백금발이 흔들린다.
허점투성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게 가장 말이 안 돼. 로또에 당첨되거나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이 아니지 않는 이상 너가 어떻게 순식간에 큰돈을 만져?”
“뭐야,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거야?!”
“그래.”
“…….”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과연 통찰력이 뛰어나다.
단언을 한 선화는, 내 옆태를 보고 머리를 꼰다.
“하지만… 다른 쪽에는 능력이 있지….”
“응?”
“나도 자세히 모르지만 이 사람…… 기사를 읽어봤더니 방송에서 그런 위험한 쪽으로 일하고 있어. 듣기로는…… 시청자들에게 평가가 몹시 좋고 그런 일을 굉장히 잘한다고 해. 심지어 그곳도 크다고 하고….”
대놓고 하긴 남사스러운 말이라 주어는 은밀히 생략한다.
뉘앙스만으로도 알아듣기 쉬웠다.
선화는 어떻게든 겸연쩍은 감정을 감추고 마저 잇는다.
“그러니까… 너가 이 사람이라면 이 모든 퍼즐이 딱 맞아. 분명 너라면 그런 쪽으론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 거니까. 거기다 빵 떠서 유명해졌으니 돈도 어느 정도 벌릴 수 있겠지. 방송이 잘 되다보니 이런 비싼 차와 손목에 고가의 시계가 탐났거나, 필요해졌을 수 있어.”
잠깐 기사에 찍힌 사진을 들이민다.
“거기다 봐봐, 적당한 큰 키와 운동한 몸까지. 신체적 특징이 맞아. 여기에 구린 센스의 옷을 입고 다니니까, 딱 너밖에 없잖아?”
조목조목 짚을 때마다 숨통을 조여 온다.
쌓아온 논리들이 딱딱 들어맞는다.
도망치거나 물러설 발판들을 모조리 없애버린다.
혀끝으로 코너에 몰아넣어 버린다.
선화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랬다.
오랜 방송활동으로 얻은 경험치와 여왕님의 냉정한 시각.
지적인 면모를 갖춘 여왕님이시다.
“내 말이 틀렸어?”
마무리 일격.
어떻게든 빠져나갈 머리를 굴리지만, 완전히 깡통이 됐다.
뾰족한 수가 안 떠오른다.
단번에 말들이 잡히고 체크메이트가 됐다.
……그냥 무작정 잡아떼 봐?
굳이 따지면 증거는 없다.
선화가 말한 건 다 심증일 뿐이지, 가면 속 얼굴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르는 거다.
여기서 우연이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거다.
“아니… 맞아.”
하지만 그만둔다.
더는 거짓말을 못하겠다.
어설프게 어영부영 무마하다가 더 망할 기분이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다가 자멸하는 그런 패턴이 떠올랐다.
더구나 선화를 속이기가 싫다.
처음 사귀는 여자친구인데, 거짓부렁으로 얽힌 관계를 만들기 싫다. ……애당초 지금 겪어보니 내 여친에겐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꿀꺽.
수긍하고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심판을 기다린다.
일단 여왕님은 한숨을 푹 쉬셨다.
“……그래?”
내 입으로 자백을 받아내자 조금 후련했는지 미간에 주름이 펴진다.
차분한 포커페이스는 그대로다.
“역시 그랬구나.”
“미안! 방송 시작한지도 얼마 안 됐고, 이런 이야기는 말하기가 좀 그래서….”
“그래… 열심히 일하네.”
낮게 읊조린다.
곧 몰아붙일 폭풍에 대한 경고 같았다.
“…….”
“…….”
“…….”
“……?”
그러나 오랜 침묵.
마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선화는 입을 다물었다.
“엥? 이, 이것뿐이야?”
반응이 맹숭맹숭하자 오히려 내가 반문한다.
기껏 가드자세를 취했는데 쓸모가 없었다.
“당장 헤어져!”나, “니가 정신이 나갔구나?”하는 일반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참고로 최악은 맞고 죽는 엔딩이었다.
“왜? 내가 화내야겠어?”
“아니… 그러니까…… 사실 조금은 그럴 줄 알았거든.
“왜 화를 내야 하는데? 그건 일일 뿐이잖아?”
“어?”
그 말을 듣자마자 벙쪘다.
허나 선화는 무심하게 나열했다.
“방송은 그저 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 그리고 니가 그런 쪽으로 잘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런 방송을 한다는 것도 납득이 안 가진 않지.”
“이해해준다고? 그… 방송을 본 거야?”
“미쳤어?! 눈 버리게 그런 걸 왜 봐!”
아, 기사만 본 모양이다.
실수로 지뢰를 밟았다.
확실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직업이긴 하다.
선화가 자신의 미모를 판다고 한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유흥거리를 제공하는 직업군이다.
이제 보니 엔터테이먼트라는 방패가 있었다.
어쨌든 내 입장을 이해해준다니, 머리만큼이나 마음씨가 넓은 여자친구를 만났을지 모른다.
뿌득뿌득…
……아닌가?
선화가 뒤늦게 불이 붙는다.
이를 갈고, 눈꺼풀을 최대한 떠 사백안이 된 눈으로 노려본다.
소리를 한 번 지르더니 시동이 걸렸는지 언성을 높인다.
“돈은!”
“으으응? 돈?”
“얼마나 버는데!”
“어, 어… 그게……”
한 번 방송할 때마다 평균적인 수입을 알려준다.
“윽… 그러면 나보다 더 많이 버는 거잖아?”
“와, 왔다갔다 하는 편이라 정확히는 몰라! ………그런데 역시 화났어?”
“화가 왜 나! 방송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했잖아, 멍청아!”
여전히 어금니를 꽉 물고 씩씩댄다.
팔짱끼고, 턱을 반대편으로 돌린다.
말과 행동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여왕님의 내면이 충돌하고 있는 모양이다.
몹시 동요를 하는 것 같지만, 억지로 눌러서 억제하는 것 같다.
선화는 핏줄이 올라온 손으로 자기 팔뚝을 꽉꽉 누르다가, 이 질문만큼은 해야겠는지 팔짱끼고 추궁했다.
“…하면서 어땠어?”
“응…?”
“여자들이랑 놀아서 기분 좋았어?”
“아니아니아니! 그건 선화 말대로 일일 뿐인 걸! 그냥 유흥거리 제공하는 입장에서 접근한 거야. 응!”
“정말이야?”
“당연하지! 상대하면서 아무런 흑심을 품지 않았어.”
“……거짓말하는 거라면 가만 안 둬.”
“거짓말 아니야. 내 유일한 여자친구는 선화뿐인 걸.”
“…….”
치켜뜬 눈초리에서 빠져나가는 힘.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얼른 토라진 여친에게 다가간다.
차안에서 다정하게 키스를 나눈다.
어깨를 잡고 얼어붙은 마음을 해동시켰다.
“우움… 하아… 쪼옥♥ 쪽♥”
곧 팔짱이 풀리고, 선화는 내 뺨을 감쌌다.
진득한 입맞춤으로 화해의 무드로 돌아섰다.
‘우와 살았어….’
조바심 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혀를 섞는다.
선화에게 들켰지만… 잘 넘어간 것 같다.
헤어지자는 통보도, 방송을 그만두라는 소리도 듣지 않았다.
나중에 로또라도 사봐야겠다.
***
충격 받았지만 아닌 척했다.
당연히 내 남자친구가 그런 방송을 한다는 사실은 신경 쓰인다.
방송에서 다른 여자들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한다고 상상하니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지만 이선화는 과거 짧은 연애사는 언제나 남자가 끌려오는 쪽이었다.
많은 이들이 여왕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고, 속박하려 했으며, 집착하다가 끝났다.
결코 이선화가 남자에게 마음을 주거나 매달리지 않았다.
그러니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친구에게 집착하기 싫었다.
만난 횟수도 손에 꼽는데 의부증 있는 여자처럼 관리하고 싶진 않았다.
언제나 쿨하고 시크한, 자부심 넘치는 여왕님의 프라이드를 지키고 싶었다.
‘열 받아…! 열 받아…!’
추구하는 이미지와 별개로, 차로 이동하는 중에 여전히 화가 나 있다.
몰래 손톱을 뜯으면서 불안감을 해소한다.
만약 이선화가 다른 남자랑 사귀고 있고 이런 비밀을 알았다고 가정한다면, 즉각 이별을 통보했을 거다.
카톡과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경찰에 접근 못하게 신고했을 거다.
하지만 채선우는 처음으로 이선화 마음에 꼭 든 연애상대다.
시작이 이상했지만 같이 있을 때마다 감정이 파도친다.
사귈 때마다 바보같이 두근거리고, 만남이 기대된다.
소녀처럼 설레게 만들어준다.
헤어지기 싫다.
동시에 방송이니 봐주는 말도 완전 거짓말이 아니다.
이선화도 방송 언더시절이 있었음으로 뜨기가 얼마나 어렵고, 운이 따라야하는지 안다.
자본주의에서 물이 들어오면 노를 저어야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고난한 일인지 알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계속 열 받지…?’
그럼에도 역시 내 남자친구가 한다는 건 싫다.
다른 여자랑 접촉하다니 불쾌하다.
역시 질투심이 폭발할 것 같으니 방송 따윈 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빨간불 신호에 계속 걸리네….”
마침 운전을 하는 선우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괜히 신경질을 내면서 대꾸한다.
“…뭐가 급하다고 그래. 그냥 천천히 가.”
“그게, 시간 아깝잖아. 빨리 선화랑 있고 싶어서 참을 수 있어야지.”
“……흥.”
뻔한 수작에 콧방귀를 뀌자, 슬쩍 운전대에서 나온 손 하나를 내 손등에 포갠다.
크고 따뜻한 남자의 손이 위를 가린다.
슥슥♥
손등을 문질러주고, 손깍지를 꽉 껴준다.
토라진 나를 녹여주고, 강하게 당기듯이 땀을 조금 흘리면서 손을 잡는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공감해주는 것 같다.
“……♥”
비겁하다.
처음에는 발정난 개처럼 덮치기만 했는데, 점점 듣기 좋은 말이랑 무드를 낼 줄을 안다.
그런 방송을 하면서 여자 후리는 방법을 터득했나 의심되지만, 입 발린 말이 기분 좋은 건 사실이다.
나도 거기에 따라서 손깍지에 힘을 쥔다.
“흥…♥”
좋아하는 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미소는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