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73. 여왕님? 예? 뭐라구요?
인정한다.
나는 옷을 못 입는다.
패션세포가 전원 괴사해 죽었다.
─저런 옷을 입을 바엔 넥타이로 거시기만 가리고 돌아다니겠다.
─형님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시는 머리통이 안쓰럽습니다
─금사자님 오늘도 그 옷을 입으셨군요. 어서 자살을!
방송 채팅창에 고든렘지식 비난이 많아졌다.
여태껏 짓궂은 농담이나 질투인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그만두라는 정색한 궁서체가 속속히 나오기 시작한다.
성난 민심이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와 옷을 찢고 도망칠 수준이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니 옷을 사고 칭찬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마음씨 고운 사랑이에게 전에 옷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오빠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에요.”라고 무마해버렸다.
끝까지 마주치지 않는 머나먼 눈길이 몹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옷 좀 못 입으면 어떠하랴.
바닥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제 올라갈 가능성만 남은 거다.
그래도 이제 와서 패션에 대해서 공부할 시간 따윈 없으니, 코디는 이 분야 최고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톤이 맞지 않아.”
날카로운 목소리로 딱 잘라서 지적한다.
“어어? 충분한 것 같은데?”
“전혀 글렀어. 니트랑 코트 카키색이 중복되잖아. 칙칙해보여서 별로야. 탈의실에서 벗고 나와. 밝은 톤으로 바꿔야겠어.”
“알겠어…. 그런데 너무 힘 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신발은 운동화 말고 로퍼로 신어. 앞으로 그런 너저분한 신발 신으면 모조리 태워버릴 거야.”
“……로퍼?”
“됐어. 내가 가져올 테니까 내의 벗고 기다려.”
강렬한 콧김을 내쉬며 다시 옷가게 안을 헤집고 다닌다.
옷을 입을 당사자인 나보다 어깨에 더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또 한 번 백화점을 찾았다.
선화와 함께.
역시 이쪽 계열은 뷰티방송전문인 여친님이 잘 안다고 생각했다.
카톡 메시지로 한 번 찔러봤더니 바로 나오라면서 나를 끌고 백화점 6층, 남성 아웃도어로 돌격했다.
그렇게 지금, 두 시간째 옷을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미 구매를 결정한 옷이 많은데, 아예 옷장을 싹 바꾸려는지 벌써 세트로 7벌이나 장바구니에 담았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내 옷을 골라주는 선화.
부탁한 의뢰인은 나지만, 신난 건 여왕님 같다.
자기 옷보다 더 꼼꼼하게 따져보고 고른다.
열의를 가져주는 건 고마운데… 벗었다 입었다 반복하느라 살갗이 헐 것 같다.
옷입히기용 바비인형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찬물을 붓기 괴롭지만 제동을 걸 수밖에 없다.
“저기 선화야….”
“응?”
“이제 충분한 것 같은데? 그만 골라줘도 될 것 같아.”
“…….”
그러자 절단되듯 뚝 끊겨버리는 콧노래.
남친이… 말대꾸?
감히 의견을 달자 여왕님이 싸늘하게 노려보신다.
“아니아니,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 아니라 한 번에 너무 많이 산 것 같아서….”
최대한 완만하게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진심으로 옷은 충분했다.
오늘은 차를 가져왔지만 장바구니에 옷이 넘쳐나서 손이 부족할 거다.
또 내 몸이 쇼핑백으로 도배돼 고슴도치로 변할 위기다.
선화도 골라둔 의류들을 보더니, 좀 많다고 판단되는지 성난 눈매를 풀었다.
자제하듯이 한숨을 쉰다.
“좋아, 그럼 하나만 더.”
“더 사게…?”
“하나만 더.”
“어어, 알겠어! 그럼 하나만 더 둘러보자!”
“금방 가져갈 테니까, 탈의실 앞에서 기다려.”
“네….”
그 말대로 탈의실 앞에 손을 모으고 조숙하게 기다린다.
“자, 입고 나와.”
마지막이라면서 선화가 가져온 옷은 정장이었다.
정확하게는 캐주얼정장으로, 전체적으로 가벼운 소재다.
넥타이 없이 셔츠는 검정, 외투는 밝은 갈색의 조합.
입어보니 발목과 손목을 쉽게 드러내 답답한 느낌을 줄이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확실히 브랜드라 그런지 몸에 착 감겨온다.
“어때?”
탈의실 커튼을 열고 나오자 기다리던 선화가 돌아본다.
자수정 같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아래를 스캔한다.
이윽고 내 라인을 살피다가 멍하니 눈을 뺏긴다.
발그레 뺨을 물들인다.
“뭐뭐… 괜찮네. 역시 제대로 꾸미면 제법 괜찮잖아….”
“그러네. 역시 모르면 전문가에게 배워야하나 보다.”
“응…… 그래.”
“그런데 왜 자꾸 눈길을 피해?”
“내, 내가 뭘?!”
명백히 수상쩍은 반응.
아예 턱을 90도로 튼다.
쑥스러움을 떨치려는 행동이 오히려 힌트를 준다.
자화자찬이나, 지속적인 운동 덕에 옷걸이가 썩 괜찮아진 것 같다.
미나한테 반응이 좋았고, 선화한테도 꽤 먹히는 모양이다.
이렇게 호의를 보여주는데 기분이 안 좋을 수 없겠다.
“이렇게 입으니까 마음에 들어?”
스킨십 기회다 싶어서 씨익 웃으면서 선화에게 다가간다.
치파오풍 금빛 원피스를 입은, 얇은 허리를 감는다.
선화는 마치 주인을 귀찮아하는 고양이처럼 소심하게 손으로 가슴을 민다.
하지만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기고만장해지지 말아줄래? 누더기들 기워 입고 다니는 것보다 낫다는 거야.”
“어쨌든 선화한테 점수 땄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는 이러고 다녀야겠다.”
“야, 야… 그만 떨어져. 가게에 사람들 좀 있다고…….”
“커플인데 뭐 어때. 보려면 보라고 하지.”
“……여기서…? 아 진짜아…♥”
분위기를 잡으며 입맞춤을 시도한다.
여왕님이 몸을 잔뜩 웅크렸지만 촉촉한 입술은 쉽게 벌려졌다.
“후읍… 쪽…♥ 으응♥”
너무 깊지 않은, 가벼우면서 연인다운 키스를 나눈다.
허리를 감싸고 가느다란 팔목을 꽉 잡는다.
격식있는 복장 덕에 춤을 추는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공개적 장소라도 선을 지키면 여왕님은 기꺼이 몸을 윤허해주신다.
무드가 올라오고 부드러운 말로 꽁꽁 언 마음을 잘 녹여주면 터치를 허락한다.
이윽고 떨어지자 여왕님이 작게 입술을 훔친다.
성가시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발정나서는……”
“싫으면 거부하면 되잖아?”
“……흥.”
새초롬하게 피하는 눈빛.
본인도 즐긴다는 사실을, 고귀한 입으로는 말하고 싶진 않은가보다.
어쨌든 그렇게 여친과 소프트하게 사랑을 나누고 계산대로 옮겨간다.
“네… 전부 다 해서…… 420만 7500원입니다.”
……역시 너무 많이 골랐다.
프리저도 발라버릴 전투력이 나왔다.
하지만 단순히 비싸서가 아니라 장바구니에 담아둔 양이 장난 아니라 그럴만 하다.
전부 쌓아두면 파묻힐 지경이니까.
선화가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본다.
“저기… 빌려줄까? 좀스럽게 이자 같은 건 안 매길 거니까….”
이제 와서 본인 기준으로 쇼핑했다 생각하나보다.
허나 콧방귀로 답한다.
멋지게 지갑에서 카드를 뽑았다.
“괜찮아. 수비범위 내야. 이거 카드결제로요.”
“네. 고객님 할부로 할까요, 아니면 일시불로?”
“아, 일시불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카드를 받는 직원이 바로 긁어버린다.
눈살을 찌푸리며 옆을 흘기는 선화.
“일시불이라니… 요즘 돈을 버는 거야?”
“어어, 괜찮은 일자리를 하나 구했거든.”
“어떤 일인데?”
“음… 얼마 안 돼서 설레발치면 그러니까, 제대로 자리 잡고 나서 말해줄게.”
“이상한 일 아니지…? 너, 나 만나기 전만 해도 통장에 얼마 없었잖아.”
“신용카드도 뽑았고 별 문제 없대도. 아, 감사합니다.”
“…….”
미심쩍은 표정을 했으나, 더 추궁하지 않았다.
선화가 골라준 옷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온다.
선화도 양 손에 하나씩 들어서 거들어준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1층에서 엘리베이터로 환승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선화가 백색조명에 펼쳐진 주얼리 매장에서 발을 멈춘다.
“응? 뭐 있어?”
“아니… 조금 괜찮은 것 같아서.”
“뭐가?”
함께 얼굴을 들이밀며 살펴보니 꽂혀있는 건 귀걸이였다.
눈결정을 본뜬 귀걸이.
24K금이었으며 여섯 갈래로 뻗어가는 선에 작은 보석이 규칙적으로 박혀있다.
“오, 진짜 예쁘네.”
“그런데 가격이 54만이야… 조금 나가네.”
“야, 이건 비싸다고…? 옷 살 때는 물 쓰듯이 썼잖아?”
“옷은 생필품이잖아! 옷은 꼭 사야하지만 이건 단순 사치품이라고. 쓸데없이 빛나는 금속덩어리야.”
같은 잣대를 들이대자 노발대발하는 여왕님.
솔직히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너랑 왔을 때 너무 신나게 긁어서 고지서가 날아왔어. 이번 달에는 자제할 거야.”
돈 많이 버는 여왕님도 주머니 사정이라는 게 있나보다.
“그럼 한 번 껴보기라도 해봐. 껴보는 건 공짜니까. 집에 가서 아쉬워하지 말고.”
“……그럼 껴보기만.”
내심 마음에 쏙 들었는지 멍석을 깔아주자 바로 시착에 들어간다.
직원을 불러서 유리 안에서 꺼내고, 양쪽 귀에 건다.
효과는 엄청났다.
금빛 치파오 드레스와 귀에 반짝이는 금색 귀걸이, 거기에 언제나 찰랑이는 백금발까지.
이 세 개가 시너지를 일으켜 더욱 찬란하게 반짝거린다.
여왕님이 한 층 더 우아하고 고결해지셨다.
매장 거울에 좌우로 번갈아보는 선화.
표정만 봐도 얼마나 기쁜지 나타난다.
“어, 어때?”
최종심사는 내게 맡긴다.
붉은 입술을 물결치며 의견을 묻는다.
저런 기대에 부푼 얼굴에 해줄 말은 정해져있다.
“양 손에 쇼핑백만 없었으면 바로 껴안아줬겠다.”
“……바보♥”
“꼈으니 이제 가자.”
“야, 기다려. 빼고 가야지.”
“아니 샀어. 그냥 가도 돼.”
“……?”
전에 사랑이에게 썼던 수법 그대로 이용한다.
선화가 귀걸이에 정신 팔린 사이에 결제를 끝냈다.
농담인 줄 알았는지 직원에게 반납하려고 했지만 직원이 웃으면서 안내해준다.
결제 끝났으니 가져가면 된다고.
깜짝 선물에 선화는 잠깐 버퍼링이 걸린다.
시간이 지나자 여왕님이 선택한 행동은… 노여움이었다.
“야, 멋대로 사면 어떡해!”
“아니… 그렇게 마음에 들어 보이는데 어떻게 지나가? 전에 사자 인형처럼 선물해준 샘 쳐.”
“이건 전혀 다른 문제잖아! 가격대가 있는 물건이라고…. 야, 빨리 환불해! 부담스러워.”
“싫어. 내가 좋아서 선물한 건데 왜. 정 싫으면 오늘 도와준 수고라고 쳐.”
“아니, 그치만… 그렇다고 쳐도 너무 고가라고. 게다가 나는 전에 도와줬을 때 아무것도 안 해줬는데…?”
“안 해주긴. 제대로 콘돔 심부름까지─”
더 씨불이기 전에 길로틴 초크를 걸어왔다.
백숙에 쓰일 닭의 모가지 잡듯이 꽉 붙잡아버린다.
입안에 게거품이 대량 생산된다.
“……후우.”
하지만 여왕님께선 머지않아 힘을 풀었다.
용안에는 깊고 복잡한 표정이 깃들어 있다.
고맙지만, 다소 미안한. 빚만 지기 싫다는 그런 복합적인 뉘앙스가 섞여있다.
다가가서 그런 여친님의 부담을 줄여준다.
“너무 그러지 마. 귀걸이 선물해준 건 나를 위한 이유도 있으니까”
“……? 어떤 이윤데…?”
“선화가 더 예뻐지잖아. 따져보면 여자친구가 더 예뻐지는데, 그걸 곁에서 볼 수 있는 내가 이득 아니야?”
“…………바보♥”
귀걸이 낀 귓불 빨갛게 물들이고 쑥스러워하는 여왕님.
자존심 강한 주제에 속마음을 비출 때는 깨물어줄 듯이 귀여워진다.
지금 여왕님의 백만 캐럿 표정은 충분한 선물의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카드 고지서 날아왔을 땐 의견이 달라지겠지만.
“미안. 이 빚은 꼭 갚을 게….”
“됐어. 사귀는 사이끼리 빚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무거우니까 얼른 돌아가자.”
“응….”
우리는 수다 떨면서 진짜 목적지인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뒷좌석이 없어서 트렁크에 물건을 싣는데, 선화가 차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차 다시 봐도 좋네… 리스야?”
“아니, 그냥 지인한테 빌린 거야.”
“그게 더 충격적인데…… 이런 고가의 자동차를 그냥 빌려준다고?”
“일에 관련이 있어서 내막이 좀 복잡해. 일단 선화 집부터 가자.”
차키를 뽑는다.
그러나 선화가 팔을 뻗어 막았다.
“선우야, 시동 걸기 전에 잠깐만….”
“응?”
“생각 많이 해봤어. 정말 혹시나해서 묻는데…… 역시 이거 너야?”
“뭐가?”
선화가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는 건 뉴스 기사였다.
<서울 한복판에 나온 사자>
-사자가 서울 한복판에 출몰했다. 하지만 두발로 걸어다니는 사자다.
요즘 야외방송에서 핫한 <금사자TV> 자세한 정체가 밝혀진 바는 없으나 나오자마자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해……
덤으로 기사 첨부된 건 금사자 탈을 쓴 남자가 길을 걷는 도중에 포착된 사진.
분명 나다.
어?
고개를 갸우뚱 돌린다.
어안이 벙벙하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일반인 채선우와 그 속에 감춰진, 금사자 한 마리.
주변 지인 몇 명에겐 알리고 다녔다.
하지만 선화한테 들키는 건 전혀 예정에 없었다.
다른 여자에게는 괜찮지만 선화는 전혀 다른 레벨이다.
여자친구니까.
먼 훗날에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이 너무나 갑작스레 다가왔다.
진실을 요구하듯, 조수석에서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선화.
그러니까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