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49. 순서가 뒤죽박죽이지만 어쨌든 여친님과 생에 첫 데이트!
“늦어.”
약속한 역 앞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미, 미안.”
단 한마디에 쫄게 만드는 카리스마.
여자 앞에서 여포 노릇은 많이 했으나 이 여자 앞에서는 예외다.
바깥에서 만나니 특유의 분위기와 주변의 선망 섞인 시선으로 휘어잡는다.
시선을 뺏기는 건, 가깝게 지내던 내 두 눈동자도 예외가 아니다.
우아한 색감의 백금발.
머리는 평소보다 좀 더 웨이브를 주고, 라인을 따라 감듯이 자그맣게 땋았다.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는 쭉 내려오다가 딱 아슬아슬 허벅지까지 감싼다.
위에 어깨라인은 훤히 보이도록 쇄골 부분이 과감하게 파였고, 거기에 꼭 어울리는, 예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네크리스가 가슴 언저리에 빛난다.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백옥피부와 어울려 자연스럽게 머금어져 있다.
시선을 더 내려 하이힐은 분홍색에, 패티큐어를 마친 발톱이 나와 있다.
발톱 하나하나의 그림마저 다르다. 최근에 했는지 나비나 멋진 문양들이 예쁘게 장식됐다.
더구나 다가갈수록 달콤한 바닐라 향과 형용 못할 다른 고급 향수의 향이 섞여서 나온다.
하나하나 신경 안 쓴 곳이 없다.
그럼에도 과하지는 않은, 절묘한 밸런스를 자랑한다.
오늘은 첫 데이트 날.
사귀기로 한 뒤, 처음으로 선화와 밖에서 만난 날이다.
선화는 언제나 늘 패션을 신경 썼지만 오늘은 특별히 한 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가꿔진 원석의 폭력적인 미관으로 길거리 여자들을 흔한 돌멩이로 만들어 버린다.
길거리를 나와 보니 뷰티 유튜버 이선화의 위엄을 확실히 알겠다.
감각이 살아있다.
나도 나름 치장에 신경 쓰느라 지각했지만, 변명거리가 없다.
데이트를 위해, 상대를 위해 잔뜩 준비했는데, 변명하면 염치가 없는 짓이다.
“흐음….”
그래도 노고는 이해하는지 나를 위아래로 쭉 스캔하는 선화.
“근데 넌 오늘 정체가 뭐야?”
“응? 뭐냐니, 이거 몰라? 무려 롤○스라고?”
“…….”
전에 방송에 나왔던 패션에 자신감 있게 손목에 명품을 들이밀자 경멸하듯이 노려본다.
곧이어 한숨을 쉰다.
답도 없다는 표정이 나온다.
도리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나름 열심히 꾸몄는데, 왜지?
“됐다. 오래 서있기 싫으니까 움직이기나 해.”
“그래, 추우니까 어서 실내로 가자.”
“…….”
“…….”
“…….”
“…….”
“뭐해? 앞장 서.”
“어? 앞장을 서다니?”
닭 모가지처럼 멍청하고 귀엽게 까딱 돌아가는 내 머리.
잠깐의 정적이 거리를 지배한다.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설마 데이트로 나 만나면서 데이트 코스도 준비 안 한 건 아니겠지?”
어두운 동굴에서 물방울 하나 떨어지는 섬뜩함.
살의가 스쳤다.
가상의 날카로운 비수가 명치를 꿰뚫고 지나간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여자와 성관계는 많이 맺었는데, 데이트는 처음이다.
생에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겼고, 여태껏 만남을 대부분 집안에서 가졌기 때문에 이것이 첫 데이트.
순서가 뒤죽박죽이나 첫 경험이다.
때문에 너무나 생소하다.
조금 꾸미고 밖에서 논다는 생각만 했지, 세세하게 코스까지 정해두진 않았다.
“…….”
여친님의 눈빛이 초점 없이 사늘하게 굳으려하자 서둘러 변명한다.
“무, 물론 정해뒀지! 엄청 환상적인 코스로! 선화는 가자마자 자지러질 걸?”
“호오, 어딘데?”
“그럼 모처럼 예쁘게 꾸몄으니 저쪽 방면에 새로 생긴, 중세의 고성을 본따 만든 모텔─”
“…불알 대. 그 잘난 좆, 한 번 시원하게 차보자.”
“─은 농담이고, 일단 걷자! 저 백화점에 가면 볼거리가 그렇게 많대!”
예쁜 각선미로 가랑이를 올려 찰 준비를 하자 다급하게 페이드어웨이한다.
이윽고 분노 게이지가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조금씩 다시 거리를 좁혔다.
달래주기 위해 달라붙어 어깨를 감싸 문질러준다.
“처음부터 너무 화내지 말구! 오전부터 나왔으니까 갈 곳은 많을 거야! 우, 우선 카페에서 언 몸이나 좀 녹일까?”
“후우….”
내가 이런 놈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미간을 꾹꾹 눌러 화를 삼키시는 여친님.
이대로 있을 순 없으니, 할 수 없이 따라온다는 느낌으로 함께 길거리를 걷는다.
차가운 날씨 덕에 다행히 열은 빨리 식는다.
“그런데, 웬일로 밖에 나오자는 거야?”
“……너는 나랑 그거만 하려고 만나냐?”
“당연히 아니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 방송하잖아. 이렇게 나랑 막 나와도 돼?”
선화는 방송인.
나는 그녀의 남친이긴 했지만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했다간 논란이 될 수 있다.
“흥.”
하면서 어깨에 멘 백에서 선글라스 케이스를 꺼낸다.
떡하니 명품 마크가 박힌 그곳에서, 내용물을 꺼내 쓴다.
꼭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명품.
이쯤 되니 뭐든 잘 어울리는 얼굴이 사기인 것 같다.
그런데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고작 그걸로 정체를 가리겠다고?”
“어차피 생각보다 잘 못 알아봐.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세가 엄청난 정도는 아니니까. 바깥에 나온다고 해도 막상 알아보는 사람은 은근히 적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들키면 곤란해지지 않아? 같이 있는 사진이라도 찍힌다던가.”
“…….”
선화는 여기에 대한 반문은 바로 달지 않는다.
방송을 하는 BJ들은, 특히 얼굴을 내거는 여 BJ는 연애 관계에 민감하다.
사소하거나 근거 없는 스캔들이 터져도 해명이다뭐다 공개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사과를 해야 한다.
여캠방에선 연애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밥벌이의 원천인 시청자와 직결된 문제다.
암묵적으로 연애가 금지된 아이들 같은 존재다.
이 점을 선화가 모를 리가 없다.
선화가 한동안 묵묵히 걷다가 나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너랑 집안에서만 만나기 싫단 말이야….”
살짝 붉어져 있는 화장기 있는 얼굴.
긴 속눈썹을 새침하게 세우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였다.
단순히 몸만 섞는 관계가 아니라, 나와 여친으로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들키는 리스크를 감안하더라도 나가고 싶다.
함께 놀고 싶다.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다.
그런 단순한 욕구다.
지내다보니 속마음을 대놓고 비춰주기 싫은 선화의 고양이 같은 심리를 알아챘다.
따져보면 시작부터 실책을 그렇게 질렀는데, 돌아가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꼭 하고 싶었던 거다, 데이트를.
교제하는 남녀답게.
이런 귀여운 생물체가 내 여친이라니 몸이 근질근질해져서 손을 꼭 잡는다.
잡아주니 잡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댄다.
무얼 더 원하나 싶어 손깍지를 껴주자, 그제서 얌전해진다.
“♥”
만족한 듯이 미소짓는 선화.
여왕님이 이렇게 소녀처럼 나올 때마다 귀여워 죽겠다.
─우와, 쩐다…
─와……
─미친…
거기에 지나가는 남자들의 집중포화.
정말 한 명도 빠짐없이 쳐다본다.
한 번 쯤 꼭 선화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도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본다.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그 안이 어떨지는 짐작되고도 남는 스타일.
여왕님의 수준 높은 미모 덕에 나 또한 묘한 우월감에 우쭐해진다.
선화와 꼭 잡은 손등을 문지르다가 다가가 작게 속삭인다.
“이대로 오늘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되지?”
“그런 거 일일이 묻지 마….”
“오늘 너무 예뻐서 그렇지. 밖에 나올 때부터 진짜 내 여친이 맞는지 생소하단 말이야.”
“야, 야… 느끼한 소리하지 마. 닭살 돋아.”
“진심이라니까. 손에 땀 흥건한 거 안 느껴져?”
“……♥”
연인답게 시시덕거린다.
느끼하다고 하지만 이런 무드 살리는 멘트가 싫지는 않은지, 살짝 토라졌던 귀여운 오리주둥이가 달싹거린다.
실제로 손은 다한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축축하다.
첫 데이트라고 하니 어째 처음 몸을 섞을 때보다 훨씬 긴장이 된다.
그저 시내의 거리를 걸을 뿐인데, 옆에 고고한 여친님이 탓에 몸이 후끈후끈 더워진다.
처음 실책은 덮어두고, 좋은 분위기로 흘러간다.
사실 마땅한 목적지도 없이 걷고 있는데 마냥 기분이 좋다.
누가봐도 한창인 오붓한 연인 관계.
이대로도 좋지만, 역시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싶다.
“아…♥”
과감하게 손깍지를 풀고 허리를 감는다.
길거리에서 내 여자라는 걸 광고하듯이 잘록한 라인을 꽉 안아든다.
나올 라인은 나올 만큼 나왔으면서, 선화의 허리는 개미만하다.
여자들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는 몸매를 손안에 넣는다.
필시 첫 데이트에선 하지 않을 행동이나 선화는 이 자세가 익숙할 거다.
데이트보다 몸을 먼저 섞었으니까.
바깥이라 조금 부끄러워하더라도 내 손길을 능숙하게 받아드렸다.
여친님을 가깝게 안아들자 정수리에서 바닐라와 달달한 코코넛 냄새가 난다.
얼굴까지 기울여서 딱 달라붙는다.
하이힐로는 걷기조차 불편한 구도가 된다.
“야… 너무 가깝잖아….”
“어쩔 수 없잖아. 선화 몸에서 나는 체취가 너무 좋단 말이야.”
“그, 그런 건 단둘이 있을 때만 해…♥”
“데이트니까, 딴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은 둘이라고만 생각하자고.”
“아 진짜아…♥”
싫은 것처럼 보여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눈치.
사랑스러운 여왕님의 비성이 섞여나온다.
좋아, 좀 더 가볼까.
하면서 슬쩍 허리를 감은 손을 내린다.
허리까지 정복했으니 엉덩이를 노린다.
정확하겐 그러려고 했다.
덥썩!
내리는 찰나에 손이 검거되고 말았다.
“……뭐하냐?”
여왕님의 심기 거슬리는 낮은 목소리.
좋았던 분위기가 싹 식어버린다.
“새끼가 밖에서 미쳤냐.”
“그, 그게 분위기가 좋길래…….”
“침대 위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문질러? 진짜 돌았구나? 앞으로 데이트 중에 슬쩍 엉덩이이나 가슴 만지면 죽인다. 알았어?”
“………네.”
내 손등을 꽉 꼬집으며 용안에 푸른빛 불꽃을 일렁이는 여왕님.
연수나 미나와 달리, 선화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창녀취급하는 몸짓은 결코 용납하지 않고, 극도로 경멸한다.
섹파가 아니라. 정식적으로 사귀는 사이니 그런 건 용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보다.
“흥, 알면 됐어.”
그러면서 옆구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가슴에 살포시 닿도록 내 팔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