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여자, 그리고 일과 사랑 (1)
여자, 그리고 일과 사랑
대기업 제약회사의 영업부의 홍일점이었던 난, 직계상사의 권력을 이용한 성희롱과 괴롭힘에 거의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상사는 둘이 있을 때면 노골적으로 내 몸을 요구했다.. 계속 거부하자, 사소한 실수를 핑계삼아, 퇴사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서른 여섯.. 남자들 사회에서 인정받고 도퇴되지 않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결혼은 커녕 사귀는 남자도 없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지 12년. 나보다 능력 없는 입사동기가 과장을 달 때, 난 대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도 여자는 어차피 결혼하면 퇴사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진급을 꺼리는 눈치였거든.
12년간 해온 병원영업을 그만 두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병원이란 조직은 의외로 보수적이라 영업사원이 바뀌면, 기존 거래선이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거든.
내가 이 거친 세계에서 살아남은 건, 그동안 잘 관리해온 인맥때문이었다.
난 부장의 노골적인 괴롭힘과 왕따에도 버티면서 회사를 그만 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버티면서 그만두지 않자, 부장은 날 지방 영업소로 발령을 내렸다. 서울의 대형 병원들을 관리하던 내가 하루 아침에 지방의 작은 병원을 관리하게 된 거야. 그것도 입사한지 몇 년 되지 않은 남자 부하 한명만 거느리고.
정말 내 인생에서 경험해 본 최악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오기로 버텼다. 어차피 여기서 꺾인다면, 다시 사회로 나가도 30대 중반인 나를 받아줄 회사는 없으니까.
기껏해야 퇴직금으로 작은 가게나 차리는 게 고작이겠지.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 젊음과 모든 열정을 바친 그 12년 간의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었다.
그만 둘 때는 내 자신의 의지로 사표를 쓰고 그만두고 싶었다. 그래야 미련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서울 본사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면서, 난 초심으로 돌아가 정말 이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
버틸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정말 죽을 만큼 힘들면 그때 가서 그만 둘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역시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밑에 있는 남자 부하가 큰 사고를 쳐서, 지방에 몇 안 되는 우리 회사와 거래가 있던 대형병원과의 거래가 파기된거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왜 내가 남의 잘못을 뒤집어 써야 돼? 억울했다..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부하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거나 내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할 정도로, 영리하게 처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변명을 한다고 해도 이미 미운털이 박힌 내가 있을 곳은 없었을 거야.
부하의 잘못은 모두 내 책임이 됐다. 회사는 내게 '지방발령'에 이어 '대기발령'을 내렸다. 하루 아침에 보직이 없어진거야. 지방발령보다 더 노골적으로 퇴사하라고 압박을 가한 거지.
자진해서 사표를 내고 퇴사하면, 퇴직금에 4개월치 월급을 얹어 준다는 얘기로 퇴사를 종용했다.. 대개 '대기발령'을 받으면 빠르면 3,4일 길어도 한달을 못 버티고 모두 그만 두거든.
대가발령 중에는 회사내규에 따라 기본급의 70% 정도의 급여가 나오는데, 퇴직금은 그만두기 3개월 동안의 급여로 계산되기 때문에 버틸수록 더 손해야. 그래서 대부분 빨리 털고, 회사가 선심처럼 얹어주는 4달 치의 보너스 급여와 온전한 퇴직금을 챙겨서 회사를 그만 둬.
회사에 출근해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데스크라도 있으면, 하루종일 벽이라도 쳐다 봤겠지만, 서울에 있던 내 데스크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난 세상을 서툴게 살아 왔다. 그래서 이번만은 영리하게 살려고 곧 사퇴를 쓰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2년 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쓰라리고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내 일에 대한 자부심도 켰거든. 사표를 쓰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흘러서 끝까지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버티기로 했다..
'그만 둘 때는 내가 정말 원해서 그만둘거야. 이렇게 그만두면 내 인생은 망가질뿐이야.'
회사에서 퇴사를 종용하는 전화가 몇 주 동안 왔지만 난 고집스럽게 버텼다.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외부와의 연락도 끊고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그러던 중, 결혼한 대학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거야. 거의 두문불출하고 한달이 다 되었을 때.
작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하는 그 친구는 자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내가 방구석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내게 전화한 것 같았다.
망설이는 날 친구는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래서 난 못 이기는 척하고 친구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더 이상 방에만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거든.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돈을 까먹는 생활이 두렵기도 했으니까.
홀에서의 서빙을 권했지만, 난 주방에서 허드렛일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는 게 싫었고, 홀에 있으면 늘 미소를 지어야 되는데, 그건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냥 몸을 혹사시키면서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처음엔, 점심과 저녁 피크 때, 주방에 틀어박혀서 정신 없이 설거지와 양파나 감자 같은 걸 다듬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키는 일이라면 싫은 소리 한 마디 없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방장이나 스태프들이 '~씨'라고 부를 때, 처음에는 창피하고 어색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아니 오히려 '~대리님'이라고 부를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책임감을 모두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
그냥 열심히 그릇을 씻고, 재료를 다듬고, 레스토랑 여기저기를 쓸고 닦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어린 스태프들이 차츰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차츰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미소를 짓는 일이 많아졌고.
일하는 시간을 늘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친구의 말에,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게 문을 여는 오전 10:30부터 점심 피크가 끝나고 쉬는 1시간을 포함해 저녁 6시까지 일하게 됐다.
그리고 차츰 설거지뿐 아니라, 홀에서 접객을 하거나 레지에서 계산도 하게 됐다.
그렇게 한달이 훌쩍 지나갔다. 회사에서 가끔 퇴사를 종용하는 메일이나 카톡이 와도 그냥 무시했다.. 가게에 있을 때는 일에 쫓겨 우울할 틈이 없었거든.
그렇게 차츰 가게일에 거의 적응하고 있을 때, 그와 만나게 됐다.
대학생풍의 20대 초의 남자 아이. '그'가 새로 아르바이트로 들어온 거야.
첫인상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느낌?
그는 나에게 사적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주방에 있을 때, 설거지 거리를 가지고 올 때도 '이거.... 부탁드려요.' 그렇게 짧게 한 마디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냥 자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아줌마' 취급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나와 거리를 두는 사람에게까지 다가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 아이가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지 2주가 지났을 때야.
그날은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이라,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누나...."
고개를 돌렸더니, 늘 날 아줌마 취급하던 그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아줌마가 아니라 누나라는 호칭에 조금 가슴이 설레였다.
아, 친구의 레스토랑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거든. 아마 지금 내 앞에 있는 대학생도 집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은 게 아닐까.
그동안, 사적인 대화가 전혀 없어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그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누나 이 근처 살아요?"
처음으로 사적인 질문을 받자, 좀 당황했지만, 솔직히 대답했다..
"네. 이 근처에 살아요. 잠깐 산책하려고..."
"....누나, 저...시간 있으면 저랑 커피 마시지 않을래요... "
"아, 네...."
생각지도 못한 제의에 어이 없이 승락하고 말았다.
'주택가라 마땅한 카페가 없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걷기 시작해서, 난 그냥 황급히 뒤따라갔다.
편의점이 눈에 띄자, 그가 안으로 걸어들어가더니, 곧 양 손에 캔커피를 들고 다가오는 거야.
"누나, 여기 커피...."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캔커피를 하나 건네는 거야.
'설마, 커피 마시자고 한 게 편의점 커피?'
그가 캔커피를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얼떨결에 따라 마셨다.
"...누나가 이 근처에 사는 줄 몰랐어요. 저도 이 근처 원룸에 살거든요."
"…네, 그러네요."
띄엄띄엄 얘기하면서 캔커피를 홀짝이다 보니, 곧 커피가 바닥나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누나, 내 방에서 캔맥주 한잔 할래요?"
"네?"
"여기서 몇 분 안 걸려요."
놀라는 나를 뒤로 하고 그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금 가까운지 뭔지를 얘기하는 게 아닌데. 갑자기 남자 혼자 사는 집에...가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데, 그가 다시 내쪽으로 걸어와, 내 손목을 잡았다.
남자가 내 손을 잡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손바닥에 살짝 땀이 배어서 습한 느낌이 들었지만, 난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 혼자 사는 방에서 할 일은 역시 그것밖에 없잖아?
그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뻘쭘하게 두리번 거리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