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 349. 북부로의 귀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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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돋아나는 새싹들로 산맥이 푸르름을 되찾고 꼭대기에 남은 눈이 녹은 물이 계곡으로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는 에삭스의 봄.
평소라면 왕이 벌이는 봄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웃음이나, 왕의 첩들이 내는 교성이 울려 퍼져야 할 왕궁에는 침통한 분위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런 침통한 분위기의 원인은 국왕인 헥터가 자기의 침대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경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침대에 누운 이유는 친정에서 당한 큰 부상으로 인한 것.
완연한 봄이 시작되고 몬스터와 마물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에삭스의 방어선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강하게 왕의 친정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내부의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호위 기사들과 두터운 인의 장벽 뒤에 숨어 친정에 나섰으나 한밤중 어둠 속에 숨어든 마물에 중상을 입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피가 낭자한 침대 위에서 헥터가 피가래를 뱉어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크으윽… 사제 사제는 아직이란 말이냐?”
헥터의 말에 서로를 바라보던 그의 심복들은 헥터가 혹시라도 지랄할까 무서워 나서지 못하고 애꿎은 시종을 앞으로 밀었다.
침대 근처로 밀려 나온 시종이 공포에 젖은 얼굴로 헥터의 물음에 떨며 대답했다.
“그, 그것이. 아직…”
“뭐라?! 너희 놈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냐? 네놈은 분명히 귀족들의 끄나풀이 분명하구나! 이놈! 이놈을 죽이고! 어서 다시 성국에 추기경을 요청하거라!”
심복들의 예상대로 헥터의 분노를 맞은 시종이 병사들에게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헥터의 심복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시종이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며 손톱으로 바닥을 끓어댔지만, 결국 다리를 붙잡힌 시종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허망한 표정으로 끌려 나갔다.
주르륵
대리석 바닥을 긁어대며 시종이 끌려 나가자 헥터가 다시금 피가래를 뱉어내며 외쳤다.
“벌써 몇 번은 더 왔어야 할 사제이고 성국에서 왔어도 몇 번을 왔어야 쿨럭. 할 때인데 대체 어째서 오지 않는 것이냐!”
바닥에 굴러다니는 최고급 포션 병들은 워낙 상처가 중하여 시간 벌기밖에 되지 않고 있는데, 도착할 기미가 없는 사제.
헥터가 분노하여 다시금 외치려 할 때.
침실의 문의 열리고 귀족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헥터는 고통 속에서 침실로 들어온 귀족들을 살폈다.
자신을 사지로 밀어 넣은 귀족 놈들의 수장들.
윈터 폴 공작가를 위시하여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죽어가는 너희 왕을 확인하러 온 것이냐? 너희 놈들의 원대로 내 이리 죽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니라. 쿨럭! 크흐흐… 사제만 오면 내 털고 일어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헥터가 씹어뱉듯 윈터 폴 공작에게 외쳤지만, 윈터 폴 공작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런,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이죽거리는 공작의 모습에 핏물이 입 밖으로 솟았지만, 그것을 삼킨 헥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커흡! 무, 무슨 소식을 말이냐?!”
그러나 들려오는 윈터 폴 공작의 무심한 목소리.
“사제들은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이냐?! 사제들이 미쳤단 말이냐? 조약이 엄연히 존재하거늘 에삭스의 왕이 다쳤는데 오지 않는다?! 서, 설마 너희 귀족 놈들이 무슨 짓을…”
더러운 귀족 놈들이 무슨 농간을 벌였나 싶었지만 윈터폴 공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왕께서 하셨지요.”
헥터 자신이 벌인 일 때문이라는 대답에 헥터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이냐!?”
“저런, 정말 모르셨군요? 저번에 암살자를 보내 수리아 왕녀의 목숨을 위협했을 때, 같이 있던 현자님의 아내 중에 성국의 새 성녀가 계심을 모르셨습니까? 성국이 그 일로 분노하여 국왕의 치료와 사제 파견을 금지했는데… 정말 모르셨나 보군요?”
물론 그때는 그녀가 성녀가 아니었지만, 결국을 성녀를 위협한 것이 되어서 성국이 무척이나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헥터의 분노를 무서워한 그의 심복들이 모든 정보를 헥터에게 숨기는 바람에 그만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헥터가 공장의 말이 맞느냐는 듯 자기의 심복들을 바라보자 헥터의 심복들이 모두 헥터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쿨럭!”
분노에 찬 목소리로 헥터가 다시금 소리를 쳤지만, 그 분노에 찬 목소리 뒤로 웃음기 섞인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희는 이만. 높은 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해서 말이죠.”
“저, 저놈들이! 죽어가는 나를 비웃으러 왔단 말이냐! 끄흐윽…”
헥터의 고통에 찬 외침이 그의 침실 너머로 흘러넘쳤다.
에삭스의 왕궁에 밤이 찾아왔고, 온종일 헥터의 침실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비명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성국에 버림받은 헥터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복부가 반쯤 뭉개지고 다리가 기묘한 모양으로 꺾여있는 상태에서 포션으로 겉만 붙여 출혈만 막은 상태.
내부의 뭉개진 장기들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포션을 물처럼 마시고 몸에 부었지만 애초에 이 정도의 심한 상처는 포션으로 어쩔 수 없는 상처였다.
피를 토해내며 자신 죽음을 기다리는 헥터.
심복들도 모두 죽음을 예감하고 살길을 마련하려 했는지 침실에서 모두 사라져 헥터는 홀로 위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침실에 홀로 남겨져 천천히 죽음이 그를 찾아오고 있을 때.
그의 침실 창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리고 머리에 양 뿔을 단 매혹적으로 생긴 여자 하나가 아주 태연한 발걸음으로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흐응, 다 죽어가고 있네. 성국에 버림받은 불쌍한 왕이라…”
붉은 눈동자와 칠흑 같은 머리카락.
“마, 마족이 어째서… 너 또한 너를 비웃으러 온 것이냐?”
헥터가 침대에 늘어져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러자 망사옷에 매혹적인 몸을 드러낸 마족이 천천히 침대로 다가와 헥터가 흘린 피를 손가락에 찍어 맛을 보며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흐응, 분노의 맛… 살고 싶지 않나요?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죽음 앞에서 달콤한 유혹.
그러나 마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가는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히 고통받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헥터는 마족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대답했다.
“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느냐. 저리 꺼지거라.”
그러자 피를 찍어 맛보던 마족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헥터가 누운 침대 머리맡으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그냥 물어본 건데? 어차피 너 따위에게 선택권은 없답니다.”
마족의 요사스러운 붉은 눈동자가 빛을 뿌리기 시작하고, 죽어가는 헥터의 몸에서 피가 남김 없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끕… 크흐흑 무, 무슨 짓이냐. 끄흐윽…”
헥터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자욱한 피 안개가 솟아오르고 헥터의 몸이 천천히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
에반의 소식을 듣고 수리아가 어찌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방으로 뛰어 올라가자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던 수리아는 침대에서 반쯤 실신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 어제 내가…’
침대 위에서 나약한 공주 기사라는 이미지에 너무 달려버렸는지, 수리아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기에 이마를 한번 쓸어주고 잠자리를 살펴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 에반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이라고?”
“친정을 나갔다가 밤에 야영지로 침입한 마물에게 중상을 입은 모양입니다.”
“그래? 그러면 치료받고 살아나는 거 아냐?”
일단 살아만 있으면 사제들의 사기 같은 능력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세계인지라 되물었는데, 에반이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님, 모르세요? 성국에서 에삭스 왕이 다치면 치료 안 해준다고 경고했는데요?”
“무슨 소리야 그건 또?”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국에서 그랬다고?”
에반에게 되묻자 에반이 성국과 에삭스의 왕 헥터와 얽힌 일을 들려주었다.
솔직히 시트라는 위험한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암살자를 보낸 것만으로도 성국이 분노했다는 말.
“아니, 그런데 성녀는 나중에 된 건데?”
“그건 중요하지 않죠. 결국 성녀가 될 분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진데.”
하긴 종교 관련자들에게 이런 상황에서 논리적인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
성녀가 되기로 예정된 분을 위협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에삭스로 쳐들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을 선포한다든지 왕을 파문 한다든지 방법은 많으니까 말이다.
뭐 사제들의 치료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파문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러면 그냥 죽는 날 잡아둔 거네?”
“그렇죠. 형님. 왕녀님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그 두 분 그런데 한동안 만나기가…”
아마도 나와 수리아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에반이 조금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건 아직 나의 계획을 몰라서 하는 소리.
“왜? 매일 보면 되는데.”
“예?!”
에반에 내 대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