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334화 (334/352)

〈 334화 〉 331. 기억을 되찾기까지 4

* * *

정신을 차리자 아내들은 모두 주변에 없었고 시트라 혼자 남아 나를 돌보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시트라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러셀, 정신이 들어요? 기억이 나요?”

“어? 어 무, 물론이지 내 서, 성녀 아내 시트라.”

어색한 말투로 대답하며 시트라를 품에 안자 시트라가 울먹거렸다.

“걱정했잖아요.”

“미, 미안.”

시트라는 내 품에 안겨 한껏 내 체온을 느끼다가 신성력을 뿜어내며 의사처럼 몇 가지를 확인했다.

“러셀, 머리가 아프지는 않나요?”

“응. 괜찮은 것 같아.”

“기억이 희미하다거나 하지는요?”

“아, 아니, 저, 절대 아니야.”

“그런데 왜 말을 더듬죠?”

당연히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기억이 희미해서가 아니라 너무 선명해서 문제였기 때문이다.

밤중에 몰래 로리엘과 밀회를 나누던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양심의 가책으로 몸이 떨려와 말을 더듬게 되는 것.

시트라는 나를 잠시 확인하더니, 영혼이나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나를 안심시키고는 나를 향해 물었다.

“지금 저녁 시간이라 다들 밥을 먹으러 갔는데, 저도 교대하고 일을 좀 돕고 올게요? 아, 식사 가져다드릴까요?”

“그, 그래. 어서 다녀와.”

내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자 시트라는 나를 두고 아내들을 돕겠다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휴…. 어떻게 말을 꺼내지?”

어차피 지금 내 머릿속은 로리엘의 생각으로 가득했기에 시트라에게 대충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녀를 내려보냈고, 그리고 이 난관을 대체 어찌 극복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 어쩌지? 그냥 대가리 박아? 아니, 아니지. 로리엘을 달래?’

한참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그덕

교대한다는 다른 아내가 들어왔나 싶었지만, 머릿속에 가득한 고민이 누군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신경 쓰지 않고 침대에서 팔목으로 눈을 가리고 누워, 대체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곧 시트라가 내내 앉아있던 침대 중간쯤에 체중을 싣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누군가가 곧장 내 품으로 안겨 왔다.

코끝에 확 뿜어지는 풀 향기, 살짝 눈을 뜨자 보이는 녹색의 초원 같은 머리카락.

무척이나 익숙한 향기와 색이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최근 밤마다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장본인이고 지금 내가 고민하게 만든 장본인의 머리 색과 체향인데 말이다.

“러셀, 걱정했다.”

역시나 무척이나 익숙한 조금은 어색한 말투가 들려왔다.

“로, 로로로로로 로리엘?”

그러나 로리엘임은 인지하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나에게 다른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자동 적으로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키고, 생각해보니 로리엘을 나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

다시 확인하듯 화들짝 놀라 로리엘의 양어깨를 잡고 앞으로 빼보니 정말 로리엘.

급하게 문을 바라봤지만, 문은 다행스럽게 닫힌 상태였다.

­털썩

쓰러지듯 베개에 머리를 누이자 로리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셀, 배는 고프지 않나? 무엇을 좀 가져다줄까?”

다정한 목소리.

무뚝뚝녀 로리엘은 20일 사이에 번데기가 탈피해 나비가 되듯 아주 다정한 여자친구가 되어있었다.

마치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 거의 표정 없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가득하고, 이렇게 불안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과즙 팡팡 터질 것 같은 분위기의 로리엘.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나였다.

물레방앗간에서 틈만 나면 사랑을 나누며 귓가에 사랑을 속삭여댔으니, 그녀를 껍질처럼 감싸고 있던 차디찬 얼음 껍데기는 이미 흐물흐물 녹아버려 사라지고 말았고, 얼음 안에 감추어져 있는 사랑스러운 로리엘이 봄의 요정처럼 톡 튀어나와 버린 것.

기억을 잃기 전에 우리들의 관계와 지난 20일간의 달콤했던 감정 때문에 극도의 혼란을 느껴야 했지만, 몸은 혼란한 감정, 기억과는 별개로 익숙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로리엘이 품에 안겨드니 자연스럽게 몸이 그녀를 맞아들이듯이 품 안으로 그녀를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자 지난 20일간에 애틋했던 우리 관계의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두근두근

그리고 그것이 불건전한 관계임을 뇌가 알려주자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품에 안긴 로리엘이 고개를 쳐들어 애틋하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러셀, 저녁을 먹고 이실리엘님과 다른 아내들이 올라오면 같이 이야기해주는 것이겠지?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품에서 다정하게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데 왜 저 물음이 협박으로 들려올까?

‘뇌가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

하지만 따듯하게 안겨있는 로리엘의 체온과 그녀의 향기를 맡으니 대답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 그럼 무, 물론이지.”

왜 내가 아내냐고 물었을 때 아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은 것이냐? 따위를 묻고 싶었으나 생각해보니 로리엘은 꽤 오랫동안 나를 좋아했던 모양.

로리엘의 첫 연애 상담을 해준 것이 이실리엘과 결혼하러 찾았던 북쪽 대수림 이실리엘의 할머니 집.

‘병신같이 나를 좋아하는데 눈치를 못 채고 계속 연애 코치를 해주고 있었다니!’

결국 로리엘이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거짓말한 것은 맞지만, 결국 내가 그녀의 행동을 부추긴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그리고 사랑을 나눌 때 로리엘이 나에게 했던 그 말은 아마 가슴속에 계속 숨겨두고 있던 말인 것이 분명했다.

‘저, 정말이냐? 나! 나도 정말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정말이나 하고 싶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러니 로리엘에게 뭐라고 책임을 물을수도 없었다.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황.

‘왜 나는 항상 아내가 늘어나도 한 번에 두셋씩 늘어나는 걸까?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발카리아를 용서해 주라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바로 한 명 더 추가했다고 알린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로리엘을 품에 안고 어찌해야 하나 손톱을 계속 깨물고 있는데, 그러나 나의 고민은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었던 것 같았다.

예상보다 파멸이 빨리 찾아와버렸으니 말이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도 없이 갑자기 문이 열리며 플로라가 식사를 가지고 들어오다 우리를 발견하고 말았던 것.

­삐거덕

“자기, 배고프죠? 내가 먹을 것을?”

밝고 명랑한 여느 때와 같은 플로라의 목소리.

플로라가 방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굳어버렸다.

갑자기 방안에 침묵이 흐르고.

“자기? 로리엘? 어? 지금 상황이?”

플로라가 멍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프, 플로라 내가 다, 서, 설명할 게 이게 그러니까 이게 말이지.”

내가 벌떡 일어나 상황을 설명하려 하자 로리엘이 부끄러운 듯 내 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플로라의 뒤를 이어 아내들이 하나씩 방으로 들어섰다.

“러셀, 깨어났다고…. 어?!”

“러셀님 괜찮으시다고… 응?!”

“러셀, 식사는 했나요? 로리엘?”

‘좆 된 건가?’

***

내방 가운데 꿇어앉은 나.

사방을 둘러싼 아내들의 매서운 눈총을 받으며 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는 내 귓가에 이실리엘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하게 이야기해보겠어요. 러셀?”

나는 이실리엘의 물음에 그날의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너무 답답해서 밤에 몰래 나갔는데, 로, 로리엘한테 잡혀버렸거든. 그래서 둘이 같이 그 밤에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내 설명이 끝나고 이실리엘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기억을 잃은 20일 동안 애니랑 발레리, 리젤다가 잠든 틈에 둘이 몰래 물레방앗간에서 만났다는 건가요?!”

“그, 그게 그렇긴 한데.”

기억을 잃었긴 했지만, 내용을 보니 쓰레기 확정.

내 고백에 애니, 발레리, 리젤다가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봤다.

“러셀을 생각해서 참았는데! 러셀은 로리엘님을 밖에서 만났다니!”

“러셀, 그렇게 기운이 남던가요?”

“나를 재우고 밖에서 로리엘님을 만난 거야? 러셀 진짜?!”

‘아니, 그게 참은 거라고? 그럼 안 참으면 대체?’

나는 생각해서 참았다는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올랐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세 아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리엘, 로리엘은 왜 러셀이 아내라고 오해하는데 오해라고 말하지 않은 거죠?”

로리엘을 향해서도 매서운 질문을 날리는 이실리엘.

“그, 그게…”

이실리엘의 물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 하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는 로리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실리엘에게 그간의 상황을 하나하나 전부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처음에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이지……”

나는 이실리엘의 결혼 이후부터 벌어진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내가 로리엘을 향해 고백하라며 부추겼던 상황까지 낱낱이 말해야 했다.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로리엘을 내가 부추겨서…”

그렇게 내가 아내들에게 싹싹 빌고 있는데 사리나가 급하게 방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저, 이실리엘님 새 마님이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요? 마구 구토하십니다.”

“예? 새 마님이라면? 발카리아요?”

“예!”

‘그동안 쇠줄에 묶어놔서 몸이 안 좋아졌나?’

발카리아가 아프다는 말에 아내들이 다들 서로를 바라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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