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화 〉 326. 용 아내와 호랑이 아내 6
* * *
“허억 허억….”
“크흑윽….”
지친 러셀의 아내들의 거친 숨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일찍 시작한 전투가 정오까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안에서 시작된 죽음의 술래잡기. 술래는 용인 발카리아, 그녀가 사방으로 손과 발, 꼬리를 휘두르며 러셀의 아내들을 찾고, 러셀의 아내들은 잡히지 않으려 도망가며 발카리아를 공격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용과 싸우고 있음에도 러셀의 아내들이 하는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던지, 용인 발카리아는 여기저기 비늘이 벗겨지고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러셀 아내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다. 수리아의 갑옷과 방패가 용의 공격을 선두에서 막아내느라 거의 너덜너덜해졌으며, 수리아와 리젤다의 치명적 상처를 몇 번이나 치료한 시트라도 차오르는 신성력보다 빠르게 소모되는 신성력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플로라나 로리엘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고 드문드문 빠진 손톱으로 동굴 벽에 매달린 리젤다도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실리엘 또한 동굴 벽에 기대 지친 얼굴로 용을 노려보고 있었다.
“헉헉…”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지쳤을 때 용이 이실리엘이 힘을 짜내 다시 한번 날린 화살에 몸을 웅크리는가 싶더니, 그 자세 그대로 갑자기 꼬리를 휘둘러왔다.
부우웅
불의의 일격.
지쳐 비틀거리다가 피하는 것이 늦어버린 시트라는 재빨리 보호막을 외쳤지만, 비어버린 신성력은 반응하지 않았고, 시트라는 그대로 질끈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러셀!”
시트라는 망연히 주저앉으며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시트라!”
“시트라!”
모두가 시트라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 동굴 벽에 지쳐 기대앉았던 이실리엘이 움직였다.
바람보다 빠르게 뛰어든 이실리엘이 시트라를 감싸 안았고, 그와 동시에 이실리엘과 시트라가 용의 꼬리에 맞아 동굴 벽으로 처박힌 것이었다.
퍼억
쿠쿵
“크흐흑!”
시트라가 눈을 뜨자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실리엘 그리고 이실리엘의 머리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
“이, 이실리엘님!”
이실리엘의 머리에서 시작된 피가 이실리엘의 긴 귀와 턱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곧 동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시트라가 이실리엘을 부여잡고 이실리엘을 치료하려 했지만, 짓궂은 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둬!”
“네? 어째서?”
“인제 그만 싸움을 끝내야지.”
“네?”
동작이 느린 시트라를 보조해주느라 그녀의 몸 안에 깃들었던 실리아가 튀어나와 용의 코앞으로 날아가 외쳤다.
“야! 항복하려면 지금뿐이야. 러셀이 널 아끼는 마음이 느껴져서 기회를 주는 거야 항복해!”
“무슨 헛소리냐! 내가 다 이긴 것 같은데! 성녀의 신성력은 이제 고갈되었고, 높은 엘프도 이제 화살을 날리지 못하니, 인제 와서 상급 정령 하나가 나서봐야….”
실리아의 항복 권유에 용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지만, 갑자기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 동굴 안이라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야 했지만, 갑자기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동굴 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뭐, 뭐냐?!”
발카리아가 놀라 외쳤다.
그리고 나타나는 또 다른 상급 바람의 정령.
“흥! 고작 상급 정령 두 마리에 내가?”
고작 정령 하나 추가되어봐야 자신의 승리는 확정된 것이라는 믿음에 발카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다시금 나타난 또 다른 상급 정령.
“세 마리라고 내가 무서워할 줄?”
그리고 발카리아를 비웃기라도 하듯, 상급 정령들이 점차 숫자를 늘려 어디선가 계속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디서 갑자기 상급 정령들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놀라 소리치는 발카리아.
상급 정령 한두 마리쯤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수십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상급 정령의 숫자에 경악하는 발카리아의 귓가에 똑같이 경악하는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어째서 롱 윈드에 피가 대지에?!”
“얘들아! 뒤에 롱 윈드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어!”
“뭐, 뭐라고!”
모든 정령이 일시에 동굴별에 처박힌 이실리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수십의 정령들이 이실리엘에게 몰려들어 그녀의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어떤 놈이냐! 감히! 고귀한 우리 친구 롱 윈드의 피를 대지에 뿌리게 한 녀석이! 누구냐!”
“어떤 놈이야! 롱 윈드 괜찮아?”
“찾아! 찾아서 갈기갈기 찢어버리자!”
“그래, 이건 그냥 놔둬서는 안 될 일이야!”
“정령왕! 정령왕님을 불러오자!”
정령들이 몰려들어 외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발카리아는 재빨리 인간 형태로 돌아와 러셀의 아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 우리 지능 있는 조, 종족답게 대, 대화해보지 않겠나?”
그제야 호들갑을 떨던 정령들이 발카리아를 에워싸고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년인가 봐!”
“이년인가!”
***
용과 미녀들의 거대한 전투가 막을 내렸다. 내 아내가 저버렸다. 6:1이라는 비겁한 전투에도 분투하던 발카리아는 마지막에 훼이크 섞은 꼬리치기 일격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나 싶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수십, 수백의 정령들.
용과 드래곤슬레이어 들의 신화적 전투는 갑자기 군대와 용의 전투가 되어버렸고, 반칙해버린 드래곤슬레이어들 덕분에 아내인 발카리아는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로잡혀 포로가 된 발카리아, 나는 동그란 구체에 갇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다.
여자들은 승리가 확정된 후 발카리아 앞에 몰려들어 발카리아와 무슨 이야기를 한참 나누는가 싶더니 내가 들어있는 구체가 발카리아 앞으로 휙 하고 끌려갔다.
구 안에 발가벗은 나를 바라보는 여섯의 여자, 무척이나 미인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부끄러워 몸을 웅크렸다.
‘남자 처음 보나? 부끄럽게 왜들이래.’
잠시 후 여자들이 발카리아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싶더니 사라지는 구체. 그러자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누, 누구세요? 왜? 왜들 이러세요? 바, 발카리아 사, 살려줘.”
“#$@#$@# #$@#$@#”
“#$^#$ #$@ *^$@$@!”
내가 발카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여자들이 화난 목소리로 발카리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빨리 말을 되돌리지 못하겠어요?”
“해, 했다.”
“했다?”
“해, 했습니다.”
져버린 발카리아는 여자들의 포로가 된 듯 여자들에게 존댓말을 하며 순종했다. 일장춘몽이라더니. 나의 이세계 신혼 생활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인가?
그래 할머니 한 명 구한 것 치고는 너무 대우가 좋다 싶었다.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고민하는데,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진 여자가 나에게 달라붙어서는 내 얼굴을 부여잡고 말을 걸어왔다.
“러셀, 들려요? 러셀? 말 좀 해봐요! 아 러셀 몸에서 저년의 비린내가 나욧!”
말을 걸다 나의 냄새를 맡고는 급격하게 분노하는 남색 머리카락의 여자.
‘수인이라는 거였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그녀의 물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네?! 러셀 혼내지 않을게요. 그러지 마세요. 러셀은 포로로 잡혀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아요? 저희 다 이해해요. 용이 무서워서 살려고 그런 거잖아요. 그렇죠?”
“누구신지 기억이…”
내가 어색한 얼굴로 여자에게 말하자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예요. 리젤다 러셀의 둘째 아내!”
“예!?”
‘뭐야? 그럼 첫째 아내인 발카리아와 둘째 아내의 캣파이트인 것인가?’
앙증맞은 고양이 귀와 꼬리를 보니 아내라는 말에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란 놈, 잘한 놈, 고양이 귀의 수인이라니 캬하!’
이거 일장춘몽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왠지 모를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둘째 아내라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럼 첫째 아내인 발카리아와 왜 싸운 거죠?”
“러셀, 맙소사! 저년은 도둑년이에요! 러셀의 첫째 아내는 이실리엘 님이잖아요?! 어쩌지 러셀이 기억이 안 나나 봐요!”
“어머 러셀 어떡해!”
“러셀 정말 기억이 안 나요?”
여자들이 호들갑을 떨어대며 부산을 떨어대기 시작할 때, 한쪽에서 빛에 휩싸여 치료받고 있던 엄청난 미모의 엘프가 나에게로 다가와 부드럽게 얼굴을 쓸어주며 말했다.
“러셀, 저예요. 저 이실리엘, 러셀의 첫째 아내. 저 기억 안 나요?”
용인 발카리아와 둘째 아내라고 주장하는 리젤다도 아름다웠지만, 이건 정말 초월적 아름다움을 가진 무엇인가.
‘세상에 맙소사 나란 놈 대체 뭘 한 거길래 이런 여자가 아내라고 주장하는 거지?’
나는 나의 첫째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바, 반드시 나, 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