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 320. 밀려오는 죽음 10
* * *
신들의 연회장.
치솟은 양어깨 들려진 턱, 우아하게 내딛는 걸음걸음.
모든 신들은 벨루니아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변덕으로 내려줬던 자기의 능력을 받은 인간이 전생자의 첫사랑이 된 것.
신들의 부러움에 찬 시선을 받으며 벨루니아가 천천히 연회장에 입장했다.
쏟아지는 시선과 짜릿하고 떨리는 느낌 속에 연회장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저 앞에는 지금까지 다른 신들의 부러움을 샀던 다크 엘프들의 종족 신, 죽음의 여신이 슬픈 표정으로 다른 여신들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
다크 엘프 둘이 전생자를 한입 훔쳐먹어 그대로 그의 여자가 되나 싶었지만, 그건 한입으로 끝나고만 헤프닝.
러셀을 다크엘프들을 다시 찾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리젤다는 완벽한 정실. 죽음을 넘나드는 위기 속에 싹튼 사랑, 결코 버려질 리 없었던 것.
벨루니아는 아주 행복했다. 부러움에 찬 시선과 질투 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결국 이실리엘이 찾아와 러셀의 첫째 아내가 되고, 리젤다가 죽을 뻔했을 때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지만, 세계수가 러셀을 만나기 위해 쏟아부은 신성력과 다른 신들이 협정을 깨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러셀의 아내로 밀어 넣기 위해 엄청난 신성력을 협정 위반으로 낭비할 때만 해도, 남의 불행을 관망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니.
자신은 리젤다에게 한 줌의 능력을 허락했을 뿐인데, 얻어지는 이익은 다른 신들이 막대한 신성력을 뿌려대는 결과와 같았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신성까지 절반으로 나누어 자기 이단 심문관을 러셀의 아내로 강제로 밀어 넣은 자애와 순결의 여신이 질투에 차.
“언제까지 그렇게 거저 이익을 볼 수 있을 것 같나요? 대 우주의 법은 항상 공평합니다. 아마 당신이 리젤다를 그런 식으로 계속 대접한다면, 아마 크게 후회할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질투심에 악담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계약 해지라니….
벨루니아는 급하게 리젤다의 위치를 찾았다.
하급 신을 통해 리젤다의 위치를 확인해보니, 울부짖으며 신전에 꿇어 엎드려있는 리젤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다른 여신들이 리젤다를 향해 미친 듯이 달콤한 속삭임을 보내고 있었다.
눈알이 빠져버릴 듯 놀란 벨루니아는 급하게 리젤다가 있는 곳으로 신성을 강림시켰다. 다른 여신들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이, 이년들이! 다 안 비켜!”
“어머, 리젤다는 계약을 해지하겠다는데, 늦으셨어요.”
“맞아요. 그렇게 홀대하시더니 꼴좋네요.”
다른 여신들의 비웃는 소리 속에서 벨루니아가 소리쳤다.
“아직 해지된 게 아니니 다 비켜! 이년들아!”
벨루니아가 쏟아지는 빛을 모두 밀어내고 허겁지겁 리젤다의 정신 속으로 쏙하고 빨려 들어갔다.
어떻게든 리젤다를 말려야 했으니까.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뜬 리젤다. 온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순백색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위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지더니 리젤다 앞에 착 하고 내려섰다.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서자 들려오는 급한 목소리.
“리, 리젤다.”
갑자기 자신을 안아오는 무엇인가에 리젤다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것은 재빨리 리젤다를 안아 들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젤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와의 계약까지 끊겠다고 하신 건가요? 저한테 서운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셔야죠. 예?”
자신을 살살 달래는 목소리. 리젤다가 품에서 빠져나와 앞을 보니 고양이 귀의 수인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황금으로 빛나는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
“누, 누구?”
리젤다가 놀라 누군지를 묻자 수인이 손바닥을 탁하고 치더니 대답했다.
“아참, 이런 내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리젤다가 계약한 사냥의 여신 벨루니아, 리젤다의 간절한 음성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리젤다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수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계약한 사냥의 여신 수인들의 종족 신이라는.
리젤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을 해지하고 싶습니다.”
리젤다의 말에 일렁이는 공간. 여기저기서 실낱같은 빛이 뿜어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빛을 보더니 여신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이년들아, 안 비켜!”
그리고 리젤다를 향해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무,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야 제가 도,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드리죠. 어, 어서 말씀을 해보셔야….”
“제가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제가 왜 계약을 해지하려 했는지도 모르시는 분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리젤다는 다른 신들은 능력도 자주 올려주고 그런다는데, 자신은 처음 능력을 받은 이후에는 능력이 향상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자신이 왜 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여신에게 완전하게 실망해버렸다.
그렇기에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요구했던 것.
명백히 당황해 보이는 여신이 리젤다에게 급하게 변명을 토해냈다.
“리, 리젤다 제가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살피지 못한 것이에요. 제가 리젤다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급한 일만 아니었으면, 제가 항상 지켜보고 있었을걸요?”
리젤다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제가 왜 다쳤는지도 아시겠네요?”
“다, 다쳐요?! 큽!”
뒹굴뒹굴하고 다른 걸 구경하느라 평소에 리젤다를 전혀 확인 못했던 벨루니아는, 그녀가 다쳤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었던 것.
리젤다는 여신의 말에 완전히 화가 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분노찬 불만을 와다다닥 쏟아냈다.
“저는 그래도 믿었어요. 언젠가는 좋은 능력을 주시겠지? 이실리엘님 같은 무력이나 시트라 씨 같은 치유력도 아니고 왕녀님 같은 특별한 능력도 아닌, 그저 은 등급 용병에서만 벗어나면 만족했는데, 제가 지금 러셀의 아내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인 줄 아시나요?”
“그, 그게…”
리젤다의 물음에 손톱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하지 못하는 벨루니아. 리젤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떨구며 말했다.
“차라리 무력이 못하면 다른 일이라도 잘할 수 있으면 좋은데, 여관 일이나 요리는 애니가 제일 잘하고, 플로라는 애교도 많고 춤도 춰서 러셀을 기쁘게 해주죠. 발레리는 여관 살림을 책임져요. 시트라 씨는 러셀의 건강을 살피고 그런데 저는? 시트라 씨는 러셀의 건강을 살피라고 성녀까지 만들어주셨는데 저는? 제가 뭐 큰 걸 바랬나요?”
후두둑 후둑
리젤다의 눈물이 새하얀 공간으로 떨어져 내리며 긴 파문을 여기저기 흘려보냈다.
그러자 공간 여기저기 난 구멍에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리젤다 저에게 오세요. 저는 당신이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래요. 리젤다 저에게 오세요. 훨씬 나은 대우를 해드릴게요.”
여기저기서 리젤다를 향해 쏟아지는 여신들의 사랑에 찬 속삭임.
벨루니아는 리젤다에게 할 말이 없었다. 방치한 것이 사실이니.
리젤다가 눈물 속에서 부르짖듯 외쳤다.
“여신님은 러셀을 도둑맞은 것도 모르시죠!”
“네?! 뭘 도둑맞아요?!”
설마 그럼 어제부터 하급 신들이 보고할 게 있다고 찾아왔던 것이?!
경악에 찬 얼굴이 된 벨루니아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러셀을 누군가가 훔쳐서, 그 와중에 리젤다가 부상을 했으며, 지금까지 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제야 이 일련의 소동의 이유를 알아챈 벨루니아.
“리젤다, 도둑맞은 러셀을 찾고 싶은 거군요!”
벨루니아의 말에도 리젤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깨만 들썩였다.
‘이제야 알아채다니 여신 맞아?’
그때 여신이 리젤다에게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러셀, 제가 찾아드리겠어요!”
여신의 말에 그제야 눈물 가득한 얼굴로 여신을 바라보는 리젤다. 그녀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말이죠?”
그러자 여신이 리젤다에게 그녀의 각오를 확인했다. 러셀을 찾기 위해 어떤 각오를 했는지를.
“리젤다는 러셀을 찾기 위해 어떤 위험이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수할 각오가 당연히 되어있는 거겠죠?”
“물론이에요! 이 목숨까지도! 이 영혼까지도!”
리젤다의 단호하고 매서운 외침에 움찔하고 뒤로 물러난 벨루니아는 리젤다에게 말했다.
“조, 좋아요. 그, 그런 각오라면.”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주시겠다는 거죠? 여신님은 수인의 종족 신이라서 인간에게는 능력을 크게 못 내려주신다고 하던데?”
밸루니아가 고양이 특유의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저는 수인 이외에는 능력을 크게 못 내려줍니다. 틀린 말이 아니죠.”
여신의 말에 다시 실망스러운 표정이 된 리젤다.
그런 리젤다의 귓가에 벨루니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수인이 아니면, 리젤다가 수인이 되면 되잖아요?”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