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 319. 밀려오는 죽음 9
* * *
삐걱
신전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로브를 후드까지 눌러쓰고 조용히 신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리젤다. 그 뒤를 로리엘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로리엘은 리젤다가 걱정되어 혼자 보낼 수 없었기에 결국 그녀를 따라오고 만 것이었다.
리젤다가 천천히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 신전 중앙에 조용히 꿇어 엎드렸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꼈던지 신전 안쪽 거주 구역에서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천천히 걸어 리젤다를 향해 다가왔다. 로리엘이 등불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자 걸어 나온 사람은 시트라와 생활했던 사제. 그녀는 등불에 비친 리젤다와 로리엘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누, 누구?! 리, 리젤다 씨!? 로리엘님?”
등불을 가져가 후드 앞을 비춰보고 리젤다가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사제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리, 리젤다씨 어째서?”
그리고 사제의 외침에 안쪽에서 조금 소란이 일어나더니, 성기사 둘과 추기경이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왔다. 자다 깨서 그런지 잠옷 위에 로브만 걸친 채로.
그리고 리젤다와 로리엘을 발견하고는 추기경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저분은? 리젤다 씨?”
소란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꿇어 엎드린 리젤다.
추기경도 러셀이 사라진 것을 알고 있기에 리젤다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러셀님이 너무 걱정되어서 온 건가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추기경을 바라보는 리젤다. 리젤다가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추기경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거죠?”
“무엇을 말이죠 리젤다?”
“서약과 맹약.”
“예?!”
리젤다의 서약과 맹약이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추기경.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국에서는 서약과 맹약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약과 맹약으로 인한 이득도 큰 만큼 제약도 크기 때문.
자신이 노력해서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갑자기 늘어난 힘을 어쩌지 못하고 크게 다칠 수도 있거나 아니면 서약과 맹약 자체가 왜곡되어 잘못하면 원치 않는 능력이 생겨버릴 수도 있는 것.
수리아 왕녀처럼.
추기경이 난처한 얼굴로 리젤다를 바라보자, 리젤다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목소리로 추기경을 향해 말했다.
“제발….”
리젤다의 간절한 목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눈물. 추기경이 눈을 한번 질끈 감더니 리젤다에게 능력을 누구에게 받았는지를 확인했다.
“능력을 내려주신 신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사, 사냥의 여신입니다.”
“사냥의 여신이라면….”
리젤다의 말에 난처한 얼굴이 된 추기경. 리젤다는 난처해진 표정의 추기경에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물었다.
“어, 어째서?”
추기경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사냥의 여신은 수인들의 종족 신중하나, 수인의 종족 신은 특이하게 셋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냥의 여신이었다.
활과 화살에 관한 능력도 조금 있지만 근본적으로 수인들의 종족 신인 사냥의 여신은 같은 종족인 수인들에게 강한 능력을 내려주는 것.
인간인 리젤다가 사냥의 여신과 계약했다면, 아무리 맹약과 서약을 하더라도 그리 큰 효과를 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리젤다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젤다 잘 들으세요. 사냥의 여신은 수인들의 종족 신. 인간에게도 능력을 주긴 하지만 변덕이 심한 신이라서 리젤다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데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추기경의 말에 실망하는 리젤다.
그러나 리젤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리젤다가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추기경을 향해 말했다.
“그럼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분과 계약하겠어요. 러셀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분이라면 그 누구라도.”
“예?!”
신과의 계약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무 때나 마음대로 해지할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고. 능력을 사용한 만큼 뭔가를 지불해야 했다. 인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대가 또한 첫 계약 때 받아 가는 예도 있고, 나중에 한꺼번에 받아 가는 경우도 또는 아주 조금씩 대가를 받아 가는 예도 있기에, 만약 계약을 해지한다면 밀려있던 대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육체나 정신이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리젤다 다시 생각하세요. 제발 잘못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뇨! 러셀이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러셀을 찾을 수만 있게 해준다면 누구와도 계약하겠어요!”
추기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젤다의 간절한 목소리가 한밤의 신전을 울리자, 신전에서 기묘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우우우우웅
신전 벽에 걸린 수많은 신들의 문양이 갑자기 경쟁하듯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
“이, 이것은!”
추기경이 놀라 뒷걸음질 치고 신들의 문양에서 빛줄기가 쏟아져나와 리젤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 맙소사. 신이시여!”
비현실적인 모습에 추기경이 꿇어앉고 모든 사제와 성기사들이 처음 겪는 모습에 신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그때, 그 수많은 빛 중에 하나의 빛이 다른 빛들보다 더욱 엄청난 빛을 발하더니, 모든 다른 빛을 다 지워버리고 마치 리젤다를 독점하겠다는 듯 리젤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아….”
리젤다의 탄성과 함께 빛 속에서 리젤다가 풀썩 쓰러졌다.
변덕 심한 고양이 귀의 수인 모습을 가진 사냥의 여신은 오늘도 나른한 표정으로 뭔가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싶어 하계를 구경하고 있었다.
하급 신 하나가 급하게 날아와 비보를 알리기 전까지.
“사냥의 여신 벨루니아시여 크, 큰일입니다.”
뭔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하급 신.
“왜! 또 무슨 일인데 그러냐!”
보통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도 별로 큰일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벨루니아는 아주 나른한 얼굴로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자 하급 신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전달했다.
“리, 리젤다가 계,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합니다!”
“뭐! 누가 뭘 해?! 왜! 무엇 때문에!”
솔직히 리젤다라는 인간 여자에게 능력을 허락한 것은 흔하디흔한 마리나의 변덕의 일환.
딱히 뭘 기대하는 것도 없었고 하계를 살피다 활을 너무 사랑하는 모습에 그냥 변덕스럽게 허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능력을 하락한 이들 중 인간들만을 관리하는 하급 신이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해왔던 것,
“그 아이가 러, 러셀의 아내가 될 것 같단 말이냐?”
“예, 여신님 확실합니다. 제가 그대로 인간 중 성장이 빠른 편이라 살펴보고 있었는데, 러셀 그의 여자로 받아들여진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하급 신의 보고에 벨루니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강력한 영혼을 가진 전생자가 세계에 심어졌을 때, 자신도 조금 기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자신을 섬기는 자나 수인이 그의 부인이 된다면, 자기의 신성력도 그에 영향을 받아 커지거나 자기 추종자들이 더욱 강력해져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더 높은 여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
처음에는 경쟁이 아주 치열했다. 서로서로 견제하며, 물밑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추종자들을 밀어 넣으려는 경쟁.
그렇게 경쟁이 치열해져 그 결과, 이쪽 세계 러셀의 부모가 신들의 싸움의 여파로 사망해 버리고 말자, 신들은 협정을 맺어 러셀에게 직접적인 접근이나 추종자를 보내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신들의 협정 결과 내려진 결론은 그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
협정이 끝나고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일 년, 이년 그렇게 보낸 세월이 15년.
그러나 세월이 계속 흘러 30이 넘었음에도 전생자는 그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않았다. 아니, 용병으로 생활하며 맺은 인연이 있긴 했지만, 그건 정말 거대한 강에서 흘러나온 작은 물줄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나눠 마시는 수준.
사소한 인연 외에 가족을 만들지 않는 것. 여자를 만나 결혼해야 했는데, 이 남자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행만 하고, 그 인간들이 좋아한다는 몸을 파는 여자도 안지를 않는 것. 수인이라면 벌써 수십의 암컷을 거느리고 새끼를 쳐도 수백 번을 칠 상황에 이 남자. 러셀은 도통 여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냥 놔두면 결혼도 하지 않고 그대로 늙어 죽을 것 같기에 신들이 모여 결단을 내렸다.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한번 밀어 넣어 보자는 것. 진짜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눈이 높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대로 아무도 이익을 보지 못하고 늙어 죽게 만드느니, 차라리 세계에 도움이라도 되게 누가 이익을 보던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밀어 넣자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선발된 것이 이실리엘. 엘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족이고 그 엘프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이실리엘이 선택된 것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청혼까지 성공했는데, 러셀이 이실리엘을 버리고 남부로 떠나버렸다.
그 사실에 콧대 높던 세계수의 망연해진 모습을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능력을 내려주고 잊고 있던 리젤다가 청혼에 성공한 엘프를 젖히고 먼저 그의 여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벨루니아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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