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 318. 밀려오는 죽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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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의 예상치 못한 활약으로 상대가 투명화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라는 것을 상정하기로 한 이실리엘이 대늪지 방향으로 모든 정령을 흩뿌리려 할 때.
벨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실리엘에게 말했다.
“이실리엘 형수님, 대늪지에는 사람이 기거할만한 곳이 없습니다. 아마 그 너머 바다 쪽일 확률이 높습니다. 배라든가 섬이라든가.”
오늘따라 허당인 친구들의 뇌가 빠릿빠릿 돌아가는 상황. 벨릭을 여자친구인 에브리나는 벨릭의 의견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벨릭, 우, 우리 벨릭 맞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런 식의 논리적 추론을 해내다니.
벨릭이 너무 매력적이라 오늘밤 가만두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에브리나였다.
그렇게 에브리나가 벨릭의 매력에 다시금 빠져들고, 이실리엘은 벨릭의 의견을 듣고 정령을 대늪지 너머 바다와 섬을 향해 뿌리기로 했다.
“실리아, 나디아 정령들을 통솔해서 바다를 샅샅이 수색해줘. 벌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을 살피라고 해줘. 알겠지?”
혹시라도 장난기 심한 정령들이 놓치는 것이 있을까 이실리엘은 아주 조심스럽게 정령들에게 당부했다.
원래 정령이라는 것이 저희 좋을 대로 움직이는 녀석들이라서, 이렇게 부탁해도 열심히 러셀을 찾다가도 아름다운 물고기라도 한 마리 나타나면, 그걸 쫓아 우르르 몰려가 버리곤 하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우리만 믿어! 우리가 러셀을 꼭 찾아올게.”
“그래, 이실리엘 기다리거라 우리만 믿고.”
실리아와 나디아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걱정하지 말라고 이실리엘을 안심시키고는 모든 정령을 끌고 바다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바람의 정령과 강을 하나 가득 메운 물의 정령, 땅의 정령들과 불의 정령까지, 그렇게 하늘과 땅 강을 가득 메운 정령의 대군이 강과 하늘을 날아 바다 쪽으로 모두 썰물처럼 밀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정령이 러셀의 여관 주변에서 사라지자, 평원 엘프들이 참지 못하고 주변이라도 수색하겠다며 이실리엘에게 말했다.
“이실리엘님 저희가 주변에 단서가 있나 확인해보겠습니다. 족장님이 사라졌다는 것은 엘프의 큰 위기. 가만히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정령의 대군을 풀어 수색 중이기에 이실리엘은 엘프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아니요. 혹시 모르니 마을을 경계합니다. 정령들이 수색 중이니 금방 소식이 들려올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들 기다리세요.”
평원 엘프들이 이실리엘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침묵했다.
발카라아의 흔적을 찾는 정령의 대군이 바다로 몰려들고 있을 때 발카리아의 레어에서는 고민에 빠진 용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있던 중이었다.
그녀의 고민은 다름 아닌 러셀의 생존에 대해서.
러셀은 현재 잠이든 상태지만 인간은 먹고 마시고 배설해야 하는 존재. 마냥 이대로 놔둘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깨워서 음식도 먹이고 배변도 시키고 몸도 씻겨야 했던 것.
그러나 딱히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상황.
이대로 마냥 깨운다면 거칠게 저항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자가 다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한참을 궁리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차리라 갓 태어난 짐승의 새끼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상태라면 자신이 새끼 때부터 키우면 될 일이었는데, 이미 남자는 성인인지라 그럴 수도 없는 것.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머리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만들면 되는 것. 생명체의 정신에 간섭하는 마법은 아주 고등 마법이었지만 위대한 흑룡인 자신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발카리아는 결심이 서자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잠이든 러셀의 정신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전부 잠가두면 완전히 아기처럼 변하겠지? 그러면 아기처럼 키우면 될 일이지!”
자신의 계획에 감탄한 발카리아는 아주 섬세한 마력을 뽑아 올려 기억의 근원인 러셀의 영혼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영혼이라는 것은, 아주 연약하고도 강한 것 섬세히 어루만지지 않으면 아주 바보가 되거나 영혼이 찢겨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하면 영혼 자체가 소멸해버릴 수도 있는 것.
그러니 아주 조심해야 했다.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은 큰 죄악. 위대한 용이 그런 죄악을 저지를 수는 없는 일, 더군다나 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남자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발카리아의 손에서 흘러나오던 마력이 형형색색으로 물들고, 러셀의 머릿속을 뒤지던 발카리아의 마력이 러셀의 머릿속에서 그의 기억을 하나둘 수집해 그의 영혼 아주 깊은 곳으로 숨기기 시작했다.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자신만의 큰 아기가 태어나길 바라면서.
러셀의 수색은 순조롭지 않았다. 바다까지 나갈 일이 없어 아무도 몰랐지만, 대늪지 너머 바다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였던 것.
더군다나 체계적인 수색을 지휘해보지 않은 상급 정령 둘이 수색을 지휘하는 상황. 수색 상황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떨어지려는 저녁때가 되어서 나타난 실리아와 나디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웜 포트로 날아와 이실리엘에게 보고했다.
“이실리엘 섬이 너무 많아. 수백 개는 될 것 같아. 하나하나 다 찾아봐야 하니까, 며칠은 걸릴 것 같아. 수색한 섬을 정령들이 헷갈리기도 하고.”
“이실리엘 하급 정령들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 최소한 중급 정령이 아니면 수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희끼리 장난을 치느라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역시나 하급 정령들은 지적 수준이 어린아이들 정도라 그런지 숫자만 많을 뿐 수색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실리엘이 자기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빠졌다.
수색할 곳은 많고 체계적인 수색을 펼쳐야 했으나 이런 것을 지휘할 사람이 없었던 것. 평소라면 러셀이 모두 알아서 했을 일이었지만, 지금 그 러셀이 없던 것이었다.
이실리엘의 고민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수리아와 시트라가 눈빛을 교환했다. 이실리엘이 첫째 아내이고 그녀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지휘 수색 통솔은 그녀의 전문 분야가 아닌 것. 이럴 때는 자신들이 나서야 했다.
“이실리엘님, 저와 수리아가 수색을 지휘하겠습니다. 저희는 숨어있는 마족이나 은신처 찾아내는 일을 했었으니, 저희가 정령들을 지휘하겠습니다.”
시트라의 말에 그제야 생각에 빠졌다가 빠져나온 이실리엘은 자신이 너무 혼자다 결정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첫째 애님이긴 했지만, 그것은 존중받은 자리이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셀도 아내들이 평등하길 원했고.
“미안해요. 모두. 저희가 다 함께해야 하는 일인데, 너무 제가 혼자 짊어지려 했군요.”
“아닙니다. 이실리엘님 저희가 더 보좌해 드렸어야 했는데….”
이실리엘의 사과 후 회의에는 여러 사람이 추가되었다. 에반을 비롯한 몇몇 기사들과 수리아 시트라까지.
합류한 인원들과 함께 러셀의 수색 회의는 깊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러셀에 대한 걱정과 회의로 모든 사람이 깊은 밤까지 회의했고, 그 모든 인원이 잠들고 나자 러셀의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달칵
러셀의 방안에서 방문을 열고 나온 것은 리젤다. 리젤다는 아직도 고통스러운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머리맡에 깊이 잠든 사리나를 두고 로브를 뒤집어쓴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맨발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서 여관 밖으로 조심스레 걸어 나갔다. 그렇게 조심스레 몇 걸음 떼었을까?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로브의 후드가 벗겨지며 리젤다의 앞에 로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러셀이 슬퍼한다. 돌아가라.”
“아뇨, 잠시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어디를 간다는 것이지?”
“신전이요.”
“신전?”
로리엘은 리젤다를 설득해 그녀를 다시 방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리젤다의 고집은 완고했다. 무조건 신전으로 가겠다는 리젤다.
로리엘이 혹시 고통이 심해서 그런가 싶어 리젤다에게 물었다.
“신전보다 시트라가 더 나을 텐데?”
사소한 상처도 잘 치료해주는 시트라기에 로리엘도 쓸린 상처 정도는 몇 번 치료받아봤고, 그 능력을 알고 있기에 리젤다에게 물은 것.
“아뇨 치료는 다 받았어요. 신전으로 가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무슨 이유지? 물어도 되나?”
“제약과 서약.”
“제약과 서약?”
엘프인 로리엘은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리젤다는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제약과 서약을 이용해, 러셀을 찾을 능력을 그녀가 계약한 신에게 얻으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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