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 304. 충성 경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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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막 떠오르는 아침 평원 엘프 구역에는 비상이 걸렸다. 아침을 준비하던 엘프들은 다들 부리나케 부족장인 에밀의 집으로 향했다.
부족장인 에밀이 긴급 소의회를 소집한 것. 에밀의 집으로 몰려든 엘프들은 에밀의 사색이 된 표정에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것을 자연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항상 밝기만 한 에밀인데 저런 심각한 표정이라니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다들 심각한 에밀의 표정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황, 한 엘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족장님은 안 오시나요?”
그의 물음에 시선이 집중되자. 얼마 전 부족원으로 합류한 타냐린이 말했다.
“저희가 모인 것이 그 족장님 때문입니다.”
족장님 때문이라는 그의 말과 심각한 말투에 질문했던 엘프가 놀라 외쳤다.
“호, 혹시 족장님에게 무슨 일이?!”
그러자 타냐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모든 엘프가 타냐린의 긍정에 놀라고, 질문했던 엘프도 놀라 다시 물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인 거죠?! 조, 족장님은 괜찮으신가요?”
“족장님은 무사하십니다. 아직은 말이죠. 제가 에밀 부족장님과 여러분을 불러 모은 이유는 그분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다 모이셨고 궁금하실 테니, 에밀 부족장님의 허락을 받아, 여러분에게 제가 이 일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엘프들이 아직은 러셀이 무사하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타냐린의 설명을 듣기 위해 긴 귀를 토끼처럼 쫑긋거렸다.
모든 엘프의 귀가 타랴린의 말에 집중하자 타냐린이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드워프 놈들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더럽고 냄새나는 드워프들이 마흔 명이나 들어온 것을 이야기하는 타냐린. 엘프들은 아침부터 드워프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타냐린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까 질문했던 엘프가 대표로 타냐린에 말에 대답했다.
“예, 드워프지만 드워프 같지 않은, 깨끗하고 착한 드워프인 노르딕 씨의 가족이라고 들었어요.”
다른 엘프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는지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드워프들은 냄새가 심하고 말도 함부로 하지만 노르딕이라는 드워프는 매일 목욕도 하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는 아주 착한 드워프. 더군다나 드워프이면서도 아주 겸손해 이실리엘님의 전속 장인을 자처한 아주 개념 있는 드워프인 것이다.
“그 노르딕 씨의 아버지. 그가 우리 족장님의 눈을 가리고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착한 노르딕 씨를 죽기 직전까지 팼다는, 전형적인 난폭하고 말을 함부로하는 드워프의 표본 같은 늙은 드워프의 모습을 떠올리며 엘프들이 다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말에 다 같이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
“예!? 대체 무슨? 그 늙고 더러운 드워프 말인가요? 폭력적이고? 그가 우리 족장님에게 대체 어떤 흉계를? 족장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족장님은 그가 어떤 흉계를 꾸미는지 모르는 상태. 이런 건 저희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높은 엘프인 이실리엘님이 그분과 행복한 생활을 하실 수 있게 돕는 것이 저희의 일 아니겠습니까?”
모든 엘프가 타냐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외쳤다.
“““당연하죠!”””
타냐린이 좌중을 둘러보며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자세하게 엘프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늙은 드워프가 이곳을 이실리엘님의 마을이 아닌 드워프의 마을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0여 명의 드워프가 더 이곳으로 이주한다고 하는군요.”
“배 백 명의 드워프라니. 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엘프들이 동시에 몸서리를 쳤다. 생각 만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은 마치 벌레나 더러운 것을 만지거나 상상했을 때 짓는 표정.
선한 엘프들이 짓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드워프를 생각하면 인상이 절로 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 크고 다른 이의 기분을 생각지도 않으며 말을 함부로 하는 드워프들. 더군다나 나무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내는 드워프를 생각하면 인상이 써지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드워프가 100명?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 더군다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러셀 족장님이 마을 구성원으로 받아준다는 말 같은데. 100명의 드워프와 같은 마을에서?
인간들에게 입은 피해가 나아가고 있는 엘프 중 몇 명은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타냐린 아까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밀이 끔찍한 표정으로 절망에 물들어가는 엘프들을 보다못해 어서 빨린 계획을 이야기하라는 투로 타냐린을 종용했다.
어서 엘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라며.
“알겠습니다. 자매들이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군요, 자, 잘 들으세요.”
타냐린이 자리에서 일어서 엘프들의 시선을 주목시키며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을 열어 엘프들에게 물었다.
“숲의 자녀 여러분. 연못 물이 더러워지면 어떻게 해야 물이 깨끗해지죠?”
타냐린의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엘프들 그중 한 엘프가 조심히 손을 들고 대답했다.
“어, 비가 와서 물이 많아지면 깨끗해지지 않던가요?”
그 대답에 손뼉을 짝하고 치며 눈을 빛내는 타냐린.
“맞습니다! 역시 저희 자매님들은 지혜로우시군요. 더러워진 연못이 깨끗해지려면 더 많은 물이 필요합니다. 비가 많이 와서 깨끗한 물이 흘러들어와야 하는 것이죠.”
뭐가 엄청난 사실을 말할 것 같은 타냐린의 말에 엘프들이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엘프들에게 타냐린이 다시금 질문했다.
“자 그럼 드워프 백 명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이 더럽혀진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죠?”
엘프들이 그녀의 질문에 숨은 뜻을 깨닫고 벼락을 맞은 듯 전율했다.
***
노르웨는 드워프 10대 가문의 한 축인 스톤 스틸 가문의 현 가주. 일곱의 아들과 딸 넷을 둔 그는 자신이 했던 수많은 계약 중 가장 어려웠던 계약을 끝마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러셀, 콧대가 높은 산맥보다 높다는 높은 엘프를 한낮 여자로 만들어 들어 앉힌 남자. 성녀와 공주를 비롯해 일곱의 아내를 두고 있다는 남자는 정말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니, 최악의 상대였다.
계약 과정에서도 귀신같은 눈치를 발휘해 가만히 앉아서 조건을 계속 끌어올리더니, 그녀의 빨간 머리 아내가 계약을 얼마나 꼼꼼하게 따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계약을 마치고 계약서를 장남인 노르빌에게 맡기고 나자 진이 빠질 지경.
식은땀을 흘리며 테이블에 주저앉자 러셀이 예의 차가운 맥주를 대접하며 말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노르웨 씨. 발로나 여신님 만세!”
“무, 물론이지. 나만 믿게 내 절대자네에게 손해가 가는 일은 없게 할 테니. 발로나님께 영광을!”
20명의 장인을 불렀을 때만 해도 그가 분명히 넘어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러셀의 한마디에 노르웨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발로나님께 맹세코 저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없는 것이죠?”
드워프들의 종족 신은 어떻게 알았는지 발로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진실을 알려달라는 러셀의 물음에 노르웨는 모든 사실을 러셀에게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가문의 사정을 속속들이 말이다.
아까의 기억에 인상을 쓰며 맥주라도 마셔 기분을 풀기 위해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얄미운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다들 일찍 일어나셨네. 러셀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참을 수가 없었다.
“끄아아아악!”
노르웨는 괴성을 지르며 짧은 다리로 힘차게 달려 나가 노르딕의 두 가슴에 다시금 발차기를 먹여주었다.
퍼어억! 쿠당탕!
자기의 발차기를 얻어맞고 굴러가 여관 문 앞에 자빠진 노르딕을 보니 그나마 속이 풀리는 듯했다.
모든 것이 저놈 때문이었다.
가문 최고의 재능을 타고 태어났는데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저놈.
아버지가 만든 귀한 검을 팔아 아가씨를 끼고 술을 처마셨던 저놈.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그 검을 판 돈을 다 썼나 했더니, 드워프라는 놈이 확인도 안 해보고 은화 몇 개에 할아버지께서 만든 걸작을 팔아치웠다는 것.
더군다나 동부에 장비를 사러 왔던 떠돌이 용병에게 팔아먹은 것이라 다시 찾을 수도 없었다.
그날 노르웨는 불같이 분노해 잡히면 가만 안 둔다며 노르딕이 들어오는 것을 벼르고 있었는데, 저놈은 노르웨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자 그 길로 가출을 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노르웨는 분노를 삭이며 기다렸다.
보통은 가출해도 돈이 떨어지거나 며칠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 놈인지라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이번 가출은 길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노르딕이 돌아오지 않는 것.
결국 용병을 고용해 노르딕의 소식을 찾았는데 그가 손에 쥔 것은 가출 당일 술에 잔뜩 취한 노르딕으로 보이는 드워프가 노예 상인들에게 잡혀간 것을 보았다는 소식이었다.
가문 최고의 재능을 가진 노르딕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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