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 299. 충성 경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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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지하 창고의 문을 열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자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흘러나왔다. 부르르 처지는 몸서리.
전생이라면 반 팔로 뛰어다닐 온도이지만, 살얼음이 살짝 얼 정도인 추위일 뿐인데 부르르 떨리는 몸. 남부의 온기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팔을 모아 몸을 웅크리고 맥주 통이 쌓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위에서 노르딕 씨가 두드려맞고 있으니, 어서 맥주를 내어가지 않으면 나의 드워프가 떡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빨리 그의 아버지에게 맥주라도 대접해야 기분이 풀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것.
창고 안쪽 쌓여있는 맥주 통을 하나 어깨에 짊어지자, 안쪽에서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러셀?”
나는 싸늘한 여자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외쳤다.
“까, 깜짝이야! 이, 있었으면 말을 하라고!?”
“나도, 지금 막 돌아왔다.”
애 떨어질 뻔한 가슴을 쓸어내리면 등불을 비추자, 창고 안쪽 공중에 긴 드레스를 입은 반투명한 아가씨가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북풍의 요정 나디아.
여관 지하 창고가 이렇게 냉동 창고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다 그녀의 덕뿐이었다.
나와 실리아가 진명 계약을 하고 매일 밖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을 정령계로 돌아가 자랑하는 실리아 덕뿐인지. 어느날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디아가 찾아와 이실리엘에게 진명 계약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을 요구한 것이다.
한밤중 이실리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분위기를 잡는데, 창문을 뚫고 나타나서는….
“이실리엘, 나와 계약해다오!”
원래 롱 윈드는 계약하지 않아도 바람의 정령들이 자진해 부탁을 들어주지만, 그것은 정령 자신이 오롯이 모든 부담을 짊어지는 것. 그렇기에 오랜 시간을 중간계에 머물 수는 없다.
정령계 밖으로 나온 정령들은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배터리 충전된 로봇쯤이라고 보면 되는데. 중간세계에 머무르는 데만도 많은 정령력이 소모되기에, 되도록 빨리 일을 마치고 되돌아가야 하는 것.
그렇기에 그녀는 좀 더 중간세계에 머물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실리엘에게 계약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남편인 내가 진명으로 계약했는데, 높은 엘프인 이실리엘이 쩨쩨하게 일반 계약을 할 수는 없는 일.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로 했다. 아, 설득을 가장한 사기라고 해야 하나?
나는 일단 나디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디아 들어봐. 이실리엘은 높은 엘프, 나는 인간이야. 그렇지?”
“내가 인간과 높은 엘프도 구별 못하는 최하급 정령 따위로 보이는 것이냐?”
발끈하는 나디아. 지능 지수를 의심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싸늘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달래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런데 생각해봐. 인간인 나도 진명계약을 해서 다니는데, 이실리엘이 일반계약? 남들이 다 비웃는다고.”
“뭐라? 롱 윈드를 비웃어?!”
발끈한 그녀의 감정 때문인지 주위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당연하지! 남편인 내가 진명계약을 해서 돌아다니는데, 부인인 높은 엘프가 일반 계약을 한 정령을 데리고 다닌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저 높은 엘프는 인간만도 못한 것은 아닌가? 뭔가 부족한 엘프인가? 모자라는가? 막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 안 그래?”
“큭….”
자신 때문에 이실리엘이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나디아는 분노한 뒤 바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계약을 포기하려는 모습. 나는 나디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나디아 진명계약을 왜 꺼리는 거야?”
“그것은 계약자가 요구할 시에 소멸까지 각오해야 하니 꺼리는 것이다.”
일반 계약의 경우 정령이 정령계 밖으로 나와 활동하다 소멸에 이르는 충격을 받았을 경우 정령계로 역소환 되는데, 진명계약의 경우 그대로 소멸하는 단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로리엘의 말대로 노예 계약이니 목숨까지 걸고 계약자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소멸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본체와 분신 체의 느낌이랄까?
정령들도 제 목숨 귀한 줄 아니 당연히 꺼릴 수 있는 것.
적절하게 꼬투리는 제공한 나디에의 말에 나는 그걸 잡고 맹렬하게 꼬아대기 시작했다.
“아, 그럼 이실리엘이 친구에게 목숨이 위험할 만한 일을 시킬까 봐 믿지 못해서 계약을 못 한다는 것이구나?”
“뭐?! 저, 절대 아니다! 그, 그런 것이!”
“그래, 뭐 내가 같이 살아보니까 좀 이실리엘이 그런 면이 있더라고.”
내가 입 주위를 일그러트리고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말하자, 나디아는 신성 모독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투명한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앙증맞게 움켜쥔 양손을 빠르게 흔들어대면서.
“아 아니다! 네가 잘못 안 것이다! 고귀한 롱 윈드의 핏줄을 감히! 인간인 네가 무엇을 안다고!”
“너도 못 믿으니까 계약 못하는 거잖아? 이해해 나디아. 아무렴.”
나디아의 어깨를 두드려주려다 허공만 휘저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내 말에 나디아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반드시 이실리엘의 고결함은 자신이 증명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띤 목소리로 말이다.
“아, 아니다! 내가 롱 윈드 이실리엘의 고귀함을 증명하겠다! 하겠다! 진명계약! 이실리엘!”
그렇게 우리 집안의 두 번째 정령 노예가 생기고 나디아의 주 업무는 냉장고로 결정되었다. 주변 온도를 낮출 수 있는 북풍의 정령 나디아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주변 온도를 낮출 수 있는데, 생각해보니 지하 창고에 넣어두면 완벽한 냉장고가 완성되는 것.
물론 계속 창고에만 박아두는 노동법에 반하는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기에, 내부의 것들이 녹아 물만 생기지 않게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이다.
그러니 나디아는 자기 맘대로 내외부를 오가며, 창고 온도만 유지하는 조금 자유로운 냉장고 근무를 하는 중인 것이다.
좀 전에도 밖에서 놀다가 냉장고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온 모양.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마침 잘됐다며 나디아에게 급하게 부탁했다.
“나디아 마침 잘됐어. 내 어깨에 맨 맥주 통 안에 살얼음이 얼게 해줄 수 있어?”
“물론이다.”
나디아가 빠르게 날아와 내 어깨에 맨 맥주 통에 입을 살포시 맞추자 그녀가 입을 맞춘 위치부터 맥주 통 겉면에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려지는 어깨. 나디아가 맥주 통의 온도를 떨어트리고 물었다.
“그런데 이건 왜 가지고 나가는 것이냐?”
“아 참! 내 드워프!”
나디아의 물음에 아직도 두들겨 맞고 있을 노르딕 씨가 생각났고. 나는 어깨에 맨 맥주 통을 가지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
맥주 통을 짊어지고 허겁지겁 여관 밖으로 나서자 눈에 들어온 것은, 대자로 자빠져있는 노르딕 씨. 노르딕 씨는 크게 대짜로 자빠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한 마리 동물처럼 단말마의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턱 가죽이 빽빽한 늑대 가죽 갑옷을 입었기에 마치 한 마리의 작은 곰이 자빠져있는 것같은 모습의 노르딕 씨.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냥당한 노르딕 씨는 얼굴을 풀밭 위에 누이고 혀까지 쭉 빠진 상태였다.
가슴 부분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은(?) 살아있는 모양.
부자간의 일이기에 내가 직접적으로 나설 수가 없기에 나는 일단 우회적으로 노르딕 씨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그의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대접하기로 한 것.
붉게 상기된 얼굴로 노르딕 씨 근처에 씨근거리며 주저앉은 그의 아버지.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일단 큰 잔을 손에 쥐여 주었다.
자기 손에 쥐어지는 큰 잔에 영문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와 잔을 바라보는 노르딕 씨의 아버지. 나는 그의 눈앞에서 살얼음이 흘러나오는 맥주를 한잔 가득 따라주었다.
촤르르르르
황금빛 액체와 함께 맥주 특유의 알싸한 향 그리고 살얼음의 촤르르 소리가 들려오자 감격한 드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이것이 살얼음 떠 있는 맥주!”
자기 손에 든 것이 내가 이야기했던 살얼음 뜬 맥주라는 사실에 반색하는 노르딕 씨의 아버지.
그는 감격한 듯 손을 달달 떨며 맥주가 가득 잔에 차오르기를 기다리다가, 거품이 넘쳐 주르륵 흘러내리자 급하게 맥주잔에 자기의 수염투성이 입을 가져갔다.
큰 잔을 수염으로 문지르듯 쓸어올리며 잔을 기울이는 노르딕 씨의 아버지. 저 수염 안에는 그의 혓바닥이 잔을 쓸어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츄르릅 꿀꺽꿀꺽
그는 크게 한잔을 쭈욱 들이키더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진 얼굴로 말했다.
“크으! 대단하구만! 갈증과 더위가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구만! 크하하하핫! 인사를 아까 제대로 못 나눴는데, 나 노르웨 스톤스틸이외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노르딕 씨의 아버지. 나는 그의 거친 손을 움켜잡으며 웃었다. 그리고 짧게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관주인이자 이 마을의 촌장 겸 엘프들의 족장인 러셀이라고 합니다.”
“뭐 뭐요? 저 콧대 높은 귀쟁이 들이 인간을 족장으로 삼았다고?”
그는 인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지, 내가 엘프들의 족장이라는 사실에 매우 놀라 하며 말했다. 그리고 조직원의 생사를 결정하는 보스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귀쟁이들의 족장이 된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건 일단 저놈을 좀 더 두드린 다음에 이야기해봅시다. 갈증을 풀었으니 이십 년 가까이 묵혀뒀던 계산은 마저 해야지. 끙차.”
기분이 풀어지라 맥주를 대접했는데, 갈증을 풀었으니 더 두드린다는 노르웨 씨였다. 20년간의 이자는 복리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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