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 293. 무희가 춤추는 밤 1
* * *
로렐라인 영애가 다녀가고 이틀 후.
다시 맞은 병사들의 휴식의 날, 늦은 밤. 나는 내 방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톡톡
탁자를 두드리는 손톱의 톡톡거리는 소리가 내가 얼마나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지 알려주는 상황.
내가 이렇게 고민에 빠져있는 이유는 며칠 전 영애 앞에서 나를 개망신 준 릴리아나 누님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어째서 30살 넘어서 시집도 못 가고 있는 릴리아나 누님에게 연애 고자라는 평가를 들어야 하는지 말이다.
나는 이미 일곱 번의 연애와 결혼을 아주 성공적으로 치른 베테랑인데 말이다. 더군다나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뭐 나도 서른 살이 넘어 결혼하긴 했지만, 누님과 나의 처지는 전적으로 다르다. 누님이 만년 성적을 못내 3군 방출 예정인 투수라면, 나는 말년에 포텐이 터져 한국시리즈 우승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니 말이다.
‘남들은 일생 한번 하는 결혼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한 내가 왜! 어째서!’
누님이 나를 하찮게 취급하는 것은 마치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과 같은 것.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 모르고 덤비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나를 아마 병사로 치면 베테랑이요, 역전의 노장쯤? 될 것인데, 그에 비해 누님은 늦게 입대한 나이 많은 신병 정도의 위치인데 말이다.
‘정말 말도 안 돼!’
나는 테이블을 내려치며 분노를 억눌렀다.
탕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을 내려쳐서 그런지, 테이블에 놓여 있던 꽃병이 앞으로 쏟아지며 안에 있던 물 조금과 말라붙은 꽃이 테이블에 엎어졌다.
“이런….”
많지 않은 물이었지만 다급히 닦을 것을 찾는데, 말라붙은 꽃이 물 위에 뜬 채 내 앞으로 천천히 밀려왔다.
며칠 전에 플로라가 밖에서 꺾어온 꽃.
활짝 폈을 때는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말라붙어 생기 잃은 꽃. 말라붙은 꽃을 들어 한참을 바라보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랬다.
누님의 현재 상태는, 한 번도 성공적 결혼을 하지 못한 ‘노’ 처녀 상태. 누님이 나를 근본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이유. 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 그것은 누님이 노처녀이기 때문.
노처녀.
국어를 사랑하고 한때 문학청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내 처지에서는 노처녀라는 단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조합의 단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본디 처녀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처녀.
한 번도 때가 타지 않은. 허락되지 않은. 미지의. 감히 범접하지 못할.
순수하고 순결한 그런 의미를 지니는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처녀라는 단어 앞에 ‘노’를 붙인다?
‘이게 맞아?’
노라는 것은 늙었다는 의미.
생기 넘치는 이미지를 가진 단어에 정 반대되는 늙은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노처녀’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더욱 와닿게 된다.
처녀림. 한 번도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은 생기 넘치는 숲을 말한다. 여기에 노를 붙여보자. 노 처녀림. 한 번도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은 늙은 숲?
그래 아주 말도 안 되는 조합.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노처녀라는 단어는 늙은 여자들의 자기 위안을 위한 단어라고 말이다.
늙어버린 순간 처녀는 가치를 잃는다, 왜냐? 늙어버렸기 때문. 그런데도 자신은 아직 처녀라고 위안하는 상태. 그것이 노처녀.
‘나는 나이는 조금 들었지만, 아직 처녀야 그러니 젊은 처녀들과 다를 바 없어.’ 라고 말이다.
누님도 자신이 아직 가치 있는 처녀라 생각하기에 나를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딱한 사람.
‘자신이 가치 높은 처녀라 생각하니 유부남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겠지.’
현재 누님의 상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턱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지금은 다들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 자기 직전인 시간이기에 누가 찾아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병사들이 쉬는 날은 나도 쉬는 날. 로테이션 돌 듯이 번갈아 가며 나를 찾는 아내들은 이날만큼은 나를 홀로 쉴 수 있게 해주었기에 누군가 찾아온다는 것이 의외인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밖의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큼큼, 들어와”
“자기, 잠든 줄 알았네?”
문이 열리자 들어온 것은 플로라였다. 플로라는 의자에 앉은 나를 확인하자마자 예쁘게 웃으며 나에게 안겨 왔다.
아마 내가 알아채기 전에 노크를 몇 번 더 했던 모양.
평소라면 노크하기 전에 발걸음 소리라도 들었겠지만, 생각에 초 집중했는지 방밖에 누가 온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자기, 꽃이 시든 것 같아서 새로 가져왔는데?”
플로라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신든 꽃 대신 새로운 꽃을 꺾어왔다고 말했다.
밤중에 꽃을 꺾어왔다는 플로라. 플로라는 뭐 평소에도 밤에 잘 돌아다니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야행성 동물 플로라였으니 말이다.
“뭐야 왜 엎어졌어요?”
플로라가 꽃을 꽂아 주려다가 꽃병이 넘어진 걸 보고는 왜 그것이 넘어졌는지를 물어왔다.
“아, 내가 실수로.”
“닦아야겠다.”
릴리아나 누님 때문에 빡 쳐서 테이블을 내려치다 그랬다고는 할 수 없으니 실수라고 둘러댔는데, 내 다리 위에 앉았던 플로라는 어느새 방 안에 있던 수건으로 테이블 위에 흐른 물기를 훔치고. 꽃병에 새로 꽃을 꽂기 위해 움직였다.
꽃병을 다시 세우고 테이블에 있던 주전자에 물을 조금 담아 그녀가 꽃병에 다시 꽂은 꽃은 하얀색의 아름다운 꽃.
내가 그녀에게 고백했을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꽃이었다.
꽃병에 꽂힌 하얀 꽃을 보는 순간 내가 그녀에게 했던 고백이 생각났다. 그리고 한 마리 붕어도.
붕어를 떠올리자 미소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 내 미소를 본 플로라가 물었다. 아마 혼자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궁금한 것 같았다.
“왜요? 뭐가 그렇게 좋아요? 같이 좋으면 좋겠는데 자기?”
플로라는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데다 나한테 아주 관심이 많은 상태니, 나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응? 뭔데요? 응? 자기이잉”
어느새 의자에 앉은 내 허벅지 위에 다시금 올라앉아 나를 강아지처럼 바라보며 묻는 플로라. 플로라의 물음에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음…. 뭐 사색이라고나 할까? 깊은 깨달음을 느꼈달까?”
내 말에 플로라는 꺄르르 웃었다. 싱그러운 이슬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웃음.
“자기는 너무 웃겨! 푸흐흡”
“어허 하늘 같은 남편에게 웃기다니!”
“꺄하하! 하늘!”
배꼽이 빠질 듯 웃어대는 플로라. 내가 입만 벌리면 웃어대는 플로라였다. 내가 개그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플로라는 내 팬이라 그런지 정말 숨만 쉬어도 웃어댈 기세였다.
플로라의 모습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내 개그 실력이 나쁘지 않을지도?’
플로라는 무희 출신.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어쩌면 빠삭한 전문가. 그런 전문가를 웃길 수 있다는 것은 역시나 내 개그가 나쁘지 않다는 것이고. 결국 플로라를 웃길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연애에도 소질이 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
며칠 누님에게 무시당한 충격으로 나 자신을 너무 하찮게 평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역시나 릴리아나 누님 따위에게 무시당할 내가 아니지. 아무렴.’
플로라의 모습에 나는 어깨에 뽕이 잔뜩 차올라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나 연애 재간둥이인데 누님은 정말 뭣도 모르고 나를 무시하신다니깐?”
내 무시한다는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플로라. 남편이 무시당했다는 말에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는 플로라.
“재간둥이? 누가? 아니, 그게 아니고. 누님이 무시해요? 릴리아 씨가? 자기를? 왜에?”
이해가 안 된다는 플로라의 반응.
나는 플로라의 이해 못하겠다는 목소리에 기운을 얻어 그녀에게 미주알고주알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릴리아나 누님의 말도 안 되는 작태를 말이다.
“아니, 내가 말이지. 영애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서 고민하는 거 같길래, 연애 상담 좀 해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누님이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현자의 능력을 발휘해서 영애의 고민을 해결해주려고 했는데, 누님이 영애 앞에서 나를 연애도 할 줄 모르는 바로 취급하는 바람에 결국 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어.”
한참 이야기를 듣던 플로라가 웃으며 말했다. 뭔가 어색하게?
“자, 자기가 영애의 여, 연애 상담을요? 영애가 누굴 좋아하는지는 알아요?”
“나야 모르지. 그래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누님 때문에 망했다니깐.”
“흐응….”
플로라는 뭔가 한참 고민하는 모습이더니 내게 질문했다.
“자기는 자기가 연애 상담을 잘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구나?”
“당연하지! 믿는 게 아니고 사실인 거지! 나는 그래도 일곱 번의 결혼을 한 숙련자니까 말이지.”
“음…. 숙련자…. 하긴 일곱 번 결혼 당한… 아니, 음…”
플로라는 연신 흠, 음. 흐응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손바닥을 짝 치더니 물었다.
“자기, 자신감이 아주 넘쳐서 좋아! 이런 건 내 의견보다 한번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어!”
“확인?”
“응 확인!”
“어떤?”
“내가 그럼 질문을 할 테니까 맞춰봐? 내가 자기 방의 꽃병에 왜 꽃을 계속 꽂아둘까? 왜 이 밤중에 자기를 찾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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