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94화 (294/352)

〈 294화 〉 291. 그란 폴 4

* * *

로렐라인은 새벽부터 팔 두 마차를 달려 웜 포트로 향했다.

웜 포트를 찾는 표면적인 목적은 시찰이지만 숨겨진 진짜 목적은 러셀님을 뵙고 조금 더 친해지기(?) 위한 것.

끝없이 펼쳐진 비슷한 풍경의 풀밭들을 연속해서 지나니 더디게만 느껴지는 마차의 속도.

로렐라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법 책을 꺼내 읽다, 창밖을 내다봤다, 하며 연신 마차를 재촉했다.

“서두르거라!”

“알겠습니다. 영애.”

그리고 새벽같이 팔 두 마차를 전력으로 달려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의 재촉 때문인지 몰라도 오후가 되기 전 그녀를 태운 마차는 웜 포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첫 방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되어있는 웜 포트.

웜 포트는 이제 시골 마을이 아니라. 마치 군사 거점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외관은 아직 시골 마을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마치 생기를 뿜어내듯 들려오는 병사들의 우렁찬 목소리에서 마을이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악!”

“하나, 둘, 셋, 넷!”

로렐라인은 그렇게 평원 엘프들의 검문을 지나, 병사들이 지르는 기합 소리와 활시위 튕기는 소리를 배경으로 마을 안에 들어섰다.

마을에 도착해 여관 앞에 마차를 세우자 뛰어나와 인사하는 한 명의 여급.

“안녕하십니까? 영애님.”

“아 이름이?”

“사리나라고 합니다. 영애님.”

“아 그래요.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시찰을 왔는데, 릴리아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공사 진척 상황 보고 받고 싶어서요.”

“릴리아니씨는 용병, 모험가 길드 건물 공사장에 있습니다. 영애님. 저쪽인데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현자님의 고용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에 로렐라인은 그녀의 동행을 거절했다. 다른 귀족의 고용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현자님의 사람은 하찮은 하녀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

“아니요. 제가 혼자 찾아가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평소라면 여급 따위에게 반말을 했겠지만, 현자님들의 주변 인물들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심어줘야 했기에 하찮은 여급이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 로렐라인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러자 자신의 호의 덕뿐인지. 눈치 빠르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겠다는 그녀. 조금이라도 빨리 러셀님을 만나고 싶은 로렐라인은 반색하며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면 러셀님께 영애께서 오셨다고 알릴까요?”

“어머, 기꺼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현자님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하찮은 시녀조차 유능하게 윗사람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금방 알아채 제안하는 모습. 로렐라인은 사리나라는 고용인에 감탄하며 그녀가 알려준 곳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자 따라붙는 기사들.

“릴리아나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영애님.”

지금부터 릴리아나와 할 이야기는 비밀 이야기이기에 기사들을 무르고 도착한 공사 현장. 그러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릴리아나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두리번거리며 릴리아나를 찾자 조금 떨어진 목책 계단 아래, 의자에 널브러진 릴리아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의자에 대충 구겨져 다리까지 벌리고 침까지 헤 흘리며 졸고 있는 모습.

­드르릉 커어

코까지 골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이 언니가 진짜!’

한심한 모습에 화가 치솟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을 맡긴 상황. 일만 제대로 처리했으면 평소에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는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니. 졸고 있는 릴리아나를 향해 다가가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

­커어 푸우

“언니? 어제 피곤했어?”

­푸우

“언니?”

­커어어

“언니!”

“흐아아악! 로, 로렐라인?”

잠깐 조는 게 아니라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모습. 롤렐라인은 결국 화를 내며 릴리아나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화들짝 놀라 침을 닦고 마치 졸지 않은 척 핑계를 대기 시작하는 릴리아나.

“이게 조, 존 것이 아니라. 자, 잠깐. 그러니까….”

“아 됐고. 이해하니까

‘참자, 현자님이 곧 오실지 모르는데 화내다 들켜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니 참자.’

로렐라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릴리아나에게 물었다.

“시킨 건 알아봤어! 언니?”

“시, 시킨 거?”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자기가 시킨 게 무엇인지도 기억 못하는 릴리아나.

­뿌드득

로렐라인은 이빨을 갈며 다시 물었다.

“러셀님 말이야 언니. 동생이 반해 시집가고 싶다고 말했던 러셀님. 그 러셀님에 관한 거 말이야. 그분이 좋아하는 거나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인지 알아냈어? 언니.”

“아니, 그게 뭐가 필요한지는 아직.”

‘뭐?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렇게 시간이 많았는데? 처잘 여유는 있고 그걸 알아볼 여유는 없었단 말인가?’

관자놀이에 핏대가 오르고 눈이 충혈되었지만 로렐라인은 초월적 인내심으로 참으며 릴리나에게 말했다.

“언니, 요, 요즘 대체 뭘 한 거야? 내가 알아보라는 건 제, 제일 먼저 알아봤어야지?!”

떨려오는 목소리.

“내가 아무래도 건물 지어지는 것도 확인해야 하고….”

“하…. 언니, 우리 이러지 말자. 내가 앞으로 잘할게. 월급 더 올려줄까? 나도 결혼 좀 하자!”

간신히 분노를 참아내며 월급을 더 올려준다며 릴리아를 재촉하는데 들려오는 소리.

“큼큼….”

“어?!”

남자의 목을 가다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로렐라인이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현자 러셀님이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망의 눈길을 담아 릴리아나를 바라보자 릴리아나도 자기 때문에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현자님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러, 러셀, 설마 들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훗…”

릴리아나 언니의 물음에 미소로 대답하는 현자님. 그 미소는 로렐라인에게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보고 싶었던 사람의 미소에 기쁨, 그리고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킨 절망. 로렐라인은 한마디를 내뱉고 릴리아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

“마?”

“망했어!”

그리고 릴리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 나중에 뒤질 줄 알아!]

자기의 협박에 파르르 떠는 릴리아나 언니. 그리고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현자님께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

‘무슨 소리지?’

현자님의 비호를 위해서 아내 자리를 탐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는데 현자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잠시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모습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뭐?! 괜찮다고?’

자기의 행동이 나쁘지 않다는 현자 러셀의 말에 로렐라인은 믿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

“에? 저, 정말로요?”

“그럼요. 솔직히 뭐랄까? 수동적인 여자들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여성들은, 운명을 자기 자기의 손으로 개척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현자님의 모습에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이 움직였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서 말이다.

“여, 역시 현자님… 그, 그렇군요. 적극적인 여성을 나, 나쁘지 않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럼요! 그러니 부끄러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영애. 저도 뭐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몰랐으면 모르겠는데, 제가 이야기를 들은 이상 영애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뭐…. 어쨌든 현자. 지혜로 사람을 돕는 것이, 저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친한 사이인 영애라면 더더군다나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죠. 몰랐으면 모르겠는데 들은 이상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저, 정말요?”

로렐라인은 현자님의 책임져준다는 말에 두 눈을 부릅뜨며 현자님을 바라봤다.

‘이, 이렇게 쉽고 화끈하게? 마음을 조금 들켰는데, 그냥 바로 책임을 져주신다니!’

현자의 책임을 져준다는 말에 기뻐하고 있는데 이 사달을 만든 눈치 없는 릴리아나 언니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 러셀, 대체 어떻게 하려고 해? 너! 아내들에게는 어떻게 말하려고!? 커 헉….”

­퍽

‘아니, 자기가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현자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 말씀하셨겠지! 시키는 일이나 잘할 것이지!’

로랄레인은 팔꿈치로 헛소리를 내뱉는 릴리아나의 명치를 힘껏 찍었다.

저 쓸데없는 주둥이는 침 흘리는 거 말고는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이미 책임져주겠다 하셨으니 이정도로 무른다고 하시진 않겠지?’

자기 본모습을 드러내야 했지만, 언니가 너무 얄미워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언니의 명치를 가격하고 현자님을 바라보자 현자님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릴리아나 언니를 향해 말했다.

“누님 제가 바보입니까? 저 부끄럽긴 해도 현자라고요! 현자! 당연히 영애를 위해서 아내들에게는 비밀로 해야죠.”

“예?!”

“뭐!?”

‘어? 아내들에게 비밀로?’

아내들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현자님의 말을 듣는 순간. 로렐라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아내를 삼아주겠다고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내들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것은…. 그것은….

정부….

정부를 삼겠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현자님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인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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