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289. 그란 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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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야간에 일어났던 소동 이후 나는 모든 남자의 적. 아니, 모든 병사들의 적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병사들이 보기에는 미인들을 납치해서 하렘을 차린 마왕이나 그 수하쯤의 포지션이랄까? 뭐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병사들의 아내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뭔가 배신당한 눈빛,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역겨운 기만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되어있었다.
내가 뭔가를 물으면 훈련 중에도 ‘악’소리를 지르긴 하는데, 왠지 반항하는 목소리 같기도 하고?
하도 병사들의 눈빛과 목소리가 불손스러워 훈련 중에 물었다.
“니들 나한테 뭐 불만 있냐?”
“아악!”
다 같이 빼액 소리를 지르는 병사들.
“뭐야!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이새퀴들이!”
그렇게 한창 병사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병사들의 기본 활쏘기를 봐주고 있는데, 사리나가 여관 쪽에서 달려와 영애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러셀님, 그란 폴에서 영애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리나의 보고에 병사들의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일곱이나 있는데 또 여자야?]
“지금 어떤 새끼냐?”
저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나까지 들으라며 대놓고 속닥거리는 소리. 내 날카로운 물음에 병사들이 다들 모른 척하며 먼 산을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
시치미를 뚝 떼는 어리바리한 놈들.
그러나 여기에 나만 있는 것은 아닌 상황. 단상 위에 있던 이실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러셀, 두 번째 줄 다섯 번째 분이에요.”
고자질하는 것도 예쁜 이실리엘. 이실리엘의 말에 병사들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실리엘을 바라봤다. 아마도 정확히 위치를 특정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모양.
‘엘프가 귀까지 밝은 건 몰랐구나! 너희들? 엘프 귀가 그냥 큰 게 아니란다.’
보통 엘프들이 눈이 좋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귀가 좋다는 사실은 그만큼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부분에 더 뛰어난 수인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엘프도 소리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종족. 그 큰 귀는 그냥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나는 재빨리 이실리엘이 특정한 병사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두 번째 줄의 한 병사의 좌우로 흔들리는 동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흐흐흐흐…. 이 새끼 넌 뒤졌어!”
나는 놈들이 원하는 나의 이미지에 맞게 마족 같은 웃음을 지으며 병사에게 천천히 다가가 연필 대용으로 가지고 있던 숯을 들어 놈의 옷에 X표를 그었다.
그리고 그놈의 귀에 속삭였다.
[넌 이 훈련이 끝날 때까지 뒤졌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자 놈은 배신과 좌절, 절망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찔끔 뽑아내며 말했다.
“저만한 게 아닌데…”
“또 있다고? 어떤 새낀데? 말하면 네가 받을 고난을 반으로 줄여준다.”
내 말에 병사가 자기 근처의 다른 병사를 쳐다보려 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주인님? 영애께서….”
“아차차. 그래, 영애가 시찰을 왔다고?”
“예, 러셀님.”
사리나가 영애를 기다리게 한다며 나를 재촉했다.
“안 되겠다. 그냥 네가 다 뒤집어써라! 바빠서 안 되겠다 올빼미야.”
내가 놈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리나를 따라 연병장 밖으로 향하자 뒤에서 영혼잃은 병사의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그렇게 입 함부로 놀리라고 했나? 크흐흐’
“이실리엘, 리젤다, 나 좀 다녀올 게 훈련 좀 부탁해.”
“네, 알겠어요. 러셀.”
“네, 러셀.”
훈련장을 떠나며 이실리엘과 리젤다에게 병사들을 부탁했다.
리젤다는 오늘 아침부터 교관으로 투입되었다. 자기도 집에만 있는 건 심심하다는 말에, 생각해보니 그녀도 활 쏘는 기본 훈련 정도는 충분히 시킬 수 있는 실력.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교관으로 참가시켰는데, 그녀는 하루 아니, 반나절 만에 자기의 별명을 차지했다.
무서운 교관들이 사병들이 만든 별명으로 불리는 건 전생이나 이곳이나 비슷했지만, 며칠도 아니고 고작 반나절 만에 자기 별명을 차지하는 위업을 이루어낸 리젤다.
그녀의 별명은 정강이 학살자. 답답한 놈은 가차 없이 내질렀다.
“이것밖에 못 하나요?”
빠악
“끄아아악!”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에반과 벨릭을 통해 다져진 그녀는 어리바리한 놈들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아주 매서운 교관이었던 것이었다.
연병장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내가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재를 부엌에 가둬두고 허드렛일에 사용하고 있었다니!’
연병장에 도착한 그녀는 물 만난 고기였다. 어릴 적 병사들과 부대끼며 살아와서 그런지 병사들의 습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몇 년간 벨릭과 다니면서 다양한 어리바리함을 경험해 그런지 어리바리한 놈들을 다루는데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어리바리한 놈들이 정신을 차리는지 너무 잘 안다고 할까?
날카로운 목소리와 인상 그리고 정강이를 가격하는 발길질. 별것 아닌 그녀의 표정과 발길질에 여자라고 실실 웃던 놈들도 아주 바짝 군기든 모습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눈앞에 인재를 보지 못한 내 안목에 한탄하는 마음이 들 정도.
지금도 엘프들만 있다면 그냥 두고 가기 좀 걱정인데 리젤다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 편하게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것이다.
이실리엘은 워낙 순해서 다 웃으면서 받아주는 편이라 병사들이 그녀를 부르는 별명은 여신님, 로리엘은 워낙 말수가 적고 화가 나면 일단 죽이고, 아니, 패고 시작하고 보니 병사들이 감히 두려워 말을 못 걸었다. 나머지 수호자 둘은 아직 말이 서툴고. 그래서 엘프들만 두고가면 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데.
말도 잘 통하고 군기도 바짝 잡을 수 있는 리젤다가 들어오니 자리를 비우는 걸 떠나서 리젤다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질 정도였다.
빈 활을 당기며 자세를 연습하는 병사들과 리젤다의 정강이 차는 소리를 뒤로하고, 다녀와서 X표 친 놈을 괴롭힐 생각에 싱글벙글한 미소를 떠올리며 사리나를 따라 여관으로 향했다.
“영애는 왜 왔다고 하든?”
“아, 시찰을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주인님.”
“시찰. 시찰이라….”
영애가 국왕의 사병들 훈련 상태를 지켜보러 올 리는 없으니. 아마도 용병, 모험가 길드의 지부 건물 공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보러온 것 같았다.
한 번쯤은 더 찾아오리라 생각하긴 했는데, 그녀가 찾아오리라 예상한 시기는 용병, 모험가 길드 지부 건물이 완성되고 나서. 아마 그때쯤이나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조금 이른 방문이었다.
건물이 얼마 후면 완공이니 굳이 지금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 완공 후에 완공을 축하할 겸 찾아오면 되니 말이다. 이미 담당자인 릴리아나 누님이 계시고 굳이 건물 짓는 것을 영애가 중간에 확인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뭐 다른 게 필요한가? 다른 문제가 생겨 조언이 필요한 거면 조금 곤란한데?’
어쨌든 그란 폴과 이제는 한배를 탄 운명이기에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하지만 사소한 것까지 도움을 구하면, 아주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누군가 문제를 팍팍 해결해주면, 그가 어려운 사람이라도 은근히 의지하게 되는 관계로 변하기 쉬우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인데 매일 찾아와서 무슨 신문고 두드리듯이 애로사항 해결해 달라며 읍소하는 관계는 사절이었다.
그렇게 영애와의 관계를 걱정하며 여관에 도착하자 영애는 보이지 않고 그녀를 따라온 수행 기사들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들”
“러셀님 안녕하십니까?”
기사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보이지 않는 영애의 행방을 물었다.
“영애께서는?”
“아 용병, 모험가 길드 지부 건설을 보러 가셨습니다. 따라오지 말라고 하셔서 대기 중입니다.”
용병, 모험가 길드 건설장소는 우리 여관 바로 옆. 당장은 모르겠지만 나중에 모험가들이 늘어나면 우리 여관 많이 이용하라고 바로 옆으로 터를 잡았기에 나는 곧바로 릴리아나 누님이 항상 늘어져 있는, 목책을 오르는 계단 아래 만들어진 그늘 쪽으로 향했다.
릴리아나 누님은 그란 폴에서는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다더니 여기 와서는 무슨 게으름뱅이도 그런 게으름뱅이가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떠야 눈곱 떼고 일어나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건설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에서 챙이 긴 모자 하나 눌러쓰고 꺼떡거리면서 조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건물을 돌아 목책 쪽으로 향해 조금 걷자 누님이 항상 졸고 있는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책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는 장소. 누님은 항상 계단 아래 있는 그늘진 공간에서 조는데, 계단 아래 그늘에서 앉아서 졸다가 영애한테 걸려서 혼나는 건 아닌가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자 멀리서 영애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렸나?’
누님을 구조하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하는데 그러나 들려오는 내용이 이상했다.
“그분이 좋아하는 거나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인지 알아냈어? 언니.”
“아니, 그게 뭐가 필요한지는 아직.”
“언니, 요즘 대체 뭘 한 거야? 내가 알아보라는 건 제일 먼저 알아봤어야지?!”
“내가 아무래도 건물 지어지는 것도 확인해야 하고….”
“하…. 언니, 우리 이러지 말자. 내가 앞으로 잘할게. 월급 더 올려줄까? 나도 결혼 좀 하자!”
‘헐…’
영애의 결혼 좀 하자는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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