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288. 그란 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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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을 하고 싶다고?”
“예, 아버지. 모름지기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이 일을 잘하는지 살펴야 하는 법. 맡겨두었다고 마냥 내버려 두는 것은 무능이 아닐까요?”
로렐라인은 항상 모든 일을 아랫사람에게 맡겨두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 에드먼드를 향해 도발적으로 말했다.
움찔
자기의 말에 움찔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눈썹이 한번 꿈틀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딸에게조차 화도 못 내는 아버지.
그녀가 보기에는 아버지는 정말 무능의 결정체였다.
선대들의 업적 아래 호의호식하는 무능한 귀족.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
뭐 주변의 다른 귀족들도 딱히 아버지와는 다르지 않았다. 같은 귀족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놈들이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버지는 특별히 무능한 것이 아니라 딱 평균적인 귀족의 모습에 수렴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뛰어난 마법 재능과 뛰어난 머리를 이용해 자기의 길을 개척했다 생각하는 그녀의 시선에 무능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그녀는 아버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실망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녀가 모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그녀의 무능한 아버지를 찾아와 이렇게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할 말을 골라 하는 이유는, 자신을 자꾸 압박하는 아버지의 말에 그녀의 계획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그녀를 부른 아버지가 했던 말.
“이젠 돌아가서 공부를 끝마치고 와도 될 것 같구나.”
“예?”
“하던 마법 공부는 마쳐야 하지 않겠느냐? 금 등급 마법사는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위치니, 말이다.”
호들갑을 떨어대며 어서 복귀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러셀님이 일을 처리해주고 영지가 정상화가 되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고는 어서 돌아가 마법 공부를 마치라는 아버지.
“아뇨, 스승님께는 나머지 과정은 스스로 하겠다며 말을 마친 상태이니 괜찮습니다. 남아서 아버지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분노를 참아내며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을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 이미 학업을 정리하고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말이다.
어차피 배울 것은 다 배운 상태. 남은 것은 개인적인 연구 결과를 쌓아 올리는 것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돕겠다는 말은 그저 핑계,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그녀의 일차적 목적은 일단 후계자 자리였다.
그렇기에 그래도 수도에서 스승 밑에서 배우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계속 수도로 갈 것을 종용하는 아버지의 권유에 그녀는 후계자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마치, 어서 후계자 자리를 내놓으라는 듯이.
가주에게 보고될 것을 자신을 거치게 하거나 회의에 슬쩍 참석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자기의 버릇없는 행동에 아직 가문을 이을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거나, 가문을 여자에게 물려줄 수 없다거나, 아직 본인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둥 다른 말을 할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저 가끔 저렇게 불편한 심기를 눈썹을 한번 꿈틀대는 정도로 드러낼 뿐 딱히 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가문의 후계자가 결정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신이 후계자인 양 행동하는 것은 다른 후계자들 위에 서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거나, 전대 가주를 압박하기 위한 경우이니. 심기가 매우 불편하실 텐데도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압박하는 이유는 전부 그녀의 계획의 일환.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후계자라는 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후계자라는 자리가 급하게 필요해진 이유.
그것은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 그것이기 때문.
로렐라인은 아버지의 모습과 비교되는 그녀의 목적인 멋진 모습의 남자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귀족은 아니라지만. 아니, 북부 에삭스의 왕녀의 남편이니 그도 이제는 귀족이나 마찬가지. 용병 출신의 비루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현자라는 칭호를 얻어내고, 신분을 뛰어넘어 높은 신분의 아내들을 얻었다는 것은, 마치 가문 시조들의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위업.
신분의 벽을 넘거나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이 된다는 것은 어지간한 위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남부 평야의 몬스터들을 사기꾼 왕과 같이 몰아내고 그란 폴을 개척한 그 위대한 자기 시조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그의 개인적 위업도 위업이지만 그를 직접 만나 그의 지혜를 접한 순간 로렐라인은 그에게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뛰어난 마법적 재능은 뛰어난 머리가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녀의 세계를 산산이 부수며 그녀의 영혼에 강렬하게 각인된 남자.
그녀가 지금껏 살아왔던 세계를 깨부수고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음을 알게 해준 남자.
남자의 지혜 앞에서 로렐라인은 하찮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뛰어나고 명석한 두뇌의 로렐라인은 그의 가능성 아니, 그의 단편을 살짝 엿본 순간.
그의 몇 번째 아내가 되더라도 대륙의 역사에 한 줄 정도 자기 이름을 남기는 정도는, 일도 아니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로렐라인이 생각한 최소한의 조건이 후계자였다. 어째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데 후계자라는 자리가 필요할까?
솔직히 로렐라인이 필요한 것은 후계자나 작위 따위가 아니었다. 금 등급 마법사 정도면 하위 귀족 작위는 언제라도 받을 수 있기에 딱히 작위에 목마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란 폴 그 자체였다.
‘혼수 정도로 그란 폴 정도는 되어야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이라도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작위나 영지 따위에 욕심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북부에서 어떤 작위라도 받아냈을 테니.
혼수로 그란 폴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녀의 자의적 판단.
저 그란 폴 아래 웜 포트에 기거하고 있는 그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그가 뻗어나가려면 그란 폴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중앙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길목 또는 선대에 허락받은 남부 늪지대 너머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후방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란 폴은 그의 원대한 발자취에 날개가 되어주어야 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이유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 생에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이성이 등장했는데, 그녀의 아내들이 너무나 쟁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첫째 아내는 높은 엘프라는 무력과 북부의 엘프들과의 연줄.
둘째 아내는 북부 다섯 왕국 하급 귀족들과의 연줄.
셋째 아내는 거대 상단이라는 재력.
에삭스의 왕녀는 북부 다섯 왕국과의 연줄과 에삭스 그 자체를, 성녀는 성국의 연줄과 지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의 호화로운 아내들의 신분과 배경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그란 폴 정도는 그에게 선물로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컸던 것이다.
그렇다 구구절절 이유를 생각했지만, 그녀는 단순하게 한눈에 반한 남자에게 집안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성격처럼 아주 화끈하게 말이다.
그녀가 그에게 그란 폴을 바치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 속에서 한창 헤엄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네가 해보고 싶은 데로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딸아….”
“예?! 아버지?”
한 번도 어떤 말을 더 붙이지 않았던 아버지는 놀랍게도 오늘은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하려는 듯했다.
조심스레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데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
“가문의 이름은 남기려무나….”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말은 그녀가 무엇을 계획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말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
그 무능한 그녀의 아버지가 말이다.
로렐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같은 물음을 담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받은 아버지가 그녀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무척이나 따듯한 눈길로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내 후계자니 한번 마음대로 해보려무나.”
로렐라인은 그 순간 항상 국왕을 사기꾼의 핏줄이라고 비난하던 자신의 아버지도 아니, 그녀가 속해있는 그녀의 핏줄도 비난 대상인 국왕의 핏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안일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딸을 감쪽같이 속인 아버지라니….’
그리고 곧이어 크게 후회했다.
‘내가 아주 단순한 논리를 잊고 있었다니.’
마법을 공부하며 배웠던 지식. 뛰어난 몬스터나 마물의 자식들은 부모의 특성을 타고 태어나 뛰어나지는데.
자신도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뛰어난 마법적 소질과 머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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