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280. 늪지의 거머리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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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스빌과 회담이 있고 나서 며칠 후부터 마을은 미칠 듯이 밀려드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주로 몰려오는 인원은 건설을 위한 목수와 인부들.
용병, 모험가 길드 지부를 건설하기 위한 기술자들과 인부들의 방문이다. 땅을 확인하고 위치를 잡고 자제를 뽑고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몸이 달아오른 그란 폴은 사람과 함께 자재까지 이미 실어 보내는 중이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마차들에 잔뜩 실려있는 목재.
대충 말을 들어보니 성에서 보유하고 있던 예비 목재들을 미리 실어 보내는 중이라는 것.
바로 베어낸 나무들을 사용하면 나중에 뒤틀리거나 갈라질 염려가 있기에, 규모가 있는 성이나 도시에서는 항상 예비 목재라고 하여 베어낸 목재를 건조 작업을 해 준비해두곤 하는데, 그걸 실어 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비축물자 아닌가 그건?’
그란 폴이 얼마나 몸이 달았는지 보여주는 모습.
길드 규모가 아직은 축소된 그것도 아닌데, 길드 지부 건설 감독을 위해 벌써 길드 접수원도 둘이나 이곳에 도착해있었다.
그중 한 명은 역시나 릴리아나 누님.
“러셀, 진짜 고마워! 앞으로 내가 진짜 잘할게!”
좀 전에 목재들과 같이 도착한 누님은 나에게 연신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 매일 야근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던 누님을 내가 이쪽 담당자로 요청했기 때문.
이쪽이야 평소에는 별로 일이 없을 예정이고, 병사들 훈련할 때 잡아들인 몬스터 종류 계수하고 그란 폴에서 정찰한 결과 받은 걸로 계산만 하면 되니 개꿀이 예정된 상황.
더군다나 누님이 좋아하는 내가 만든 식사와 온수 목욕을 매일 즐길 수 있는데 누님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누님은 천국에 도착한 영혼처럼 감격한 모습으로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내가 누님을 부탁한 이유는 일단 말도 잘 통하고 친분도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쪽 입장을 그란 폴에 전달할 창구로 쓰려는 것인데 누님이 잘한다고 했으니 뭐 앞으로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신이 난 누님이 같이 온 길드 접수원을 끌고 와 나에게 인사를 시키고 길드 지부를 세울 자리로 인부들을 몰고 사라진 후.
마지막 마차가 목책 안으로 들어서자. 마을 자경대 하나가 나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촌장님 좀 전에 들어온 마차는 총 다섯 대입니다.”
“예, 확인했습니다.”
마을 아재들이 나에게 촌장이라 부르는 이유. 그것은 내가 결국 마을의 촌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마을에 용병 모험가 길드 지부와 국왕의 병사들이 훈련을 위해 주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촌장님께 전하러 갔더니 촌장님 아니, 전 촌장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촌장 직책을 떠넘기셨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네가 하는 게 좋겠네.”
“아니, 그래도 그 나이 많고 인품이 훌륭하신 촌장님이….”
매번 벌어지는 촌장님과의 촌장직 주거니 받거니.
내가 그냥 덜컥 넘겨받으면 되는데 왜 자꾸 거절하냐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촌장직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넘겨주고 받는 직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촌장은 마을 주민 중에서 선출되는 것 마음대로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마을에서는 촌장이, 마을에서 사용하는 공용 화덕이나 창고를 관리하고, 세금까지 모아서 영주의 성의로 보내는 역할까지 해야 하니. 마을 사람들 처지에서는 좀 더 지혜롭고 공정한 인물을 뽑는 것은 당연한 일.
촌장님이 마음대로 덜컥 넘겨주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여기는 공백지 마을이라 촌장님과 애니 아버지였던 장인어른의 두 분의 마을이었기에 현재 촌장님이 평생직으로 맡아 하고 있고, 촌장님의 욕심 없는 성격과 공백지 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에, 저리 만날 때마다 나에게 촌장직을 넘겨주신다고 애를 쓰시는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리 촌장님이 넘겨주신다고 해도 아무래도 이주한 지 이제 일 년 된 내 처지에서는 눈치가 보이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촌장님도 마음을 독하게 먹으셨던지 날카로운 말씀을 해오셨다.
“아니, 어차피 다 자네가 알아서 하지 않나?”
라페스빌 국왕에게 말도 없이 일을 진행했다고 서운함을 전한 내가 촌장님에게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큰일이 날 때마다 사전 상의를 못 한 것이 몇 번이던가. 나는 촌장님에게 급하게 사과를 드렸다.
마을 어른이면서 마을의 대표인데 아무리 시급한 일이라도 모시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촌장님…”
“아니, 화난 건 아니고. 자네가 잘하고 있는데. 결정하고 또 나를 찾아와서 알려주고 하는 게 번거롭지 않냐 이거네. 그리고 큰일에는 나보다 자네가 맞고.”
촌장님은 화나신 건 아니셨는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늘어나면 큰일도 잦을 텐데 나도 이제 나이가 있고… 어차피 애니도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자넨 내 사위나 마찬가지기도 하고… 먼저 떠난 그 친구가 좋아하겠어…”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시지만, 정리되지 않으시는 느낌의 촌장님의 말씀. 촌장님은 더는 말을 잊지 못하셨다.
애니의 아버지와는 두 분이 친구분이셨다고 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드시는 모양이었다.
나이도 많은 분이 눈물까지 찔끔하시는데 매몰차게 안 된다고도 할 수 없는 일. 결국 나는 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부터 본격적 촌장 임무에 투입이 되었다.
일단 마을에 들어오는 마차나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은, 원래 하던 일이니 상관없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촌장의 일이 훨씬 많았다.
해야 할 일을 넘겨주는 전 촌장님의 싱글벙글한 얼굴에서 어제 설마 내가 당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드는 상황.
넘겨주시는 일을 설명하는 촌장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러셀, 아니, 이제 촌장님이지 잘 부탁합니다. 촌장님. 우헤헤…”
‘촌장님의 웃음이 왠지 간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냥 내 기분이겠지?’
촌장의 일은 가장 중요한 빵을 굽는 화덕, 거기 들어가는 땔감을 구하는 것부터 방앗간 관리, 빵 굽는 날을 정하고 마을 공용 창고의 출납 관리. 우기 때 배수로 확인. 우기가 끝나고 목책 확인과 우기가 끝나고 드러나는 삼각주를 나누는 것까지.
마을 살림을 온통 책임져야 하는 것.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싱글벙글 웃는 촌장님을 뒤로하고 털레털레 여관으로 향했다. 나의 여유로운 은퇴 생활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은퇴하니 늘어나는 건 아내와 일뿐.
아내도 일도 뭐든지 적당한 것이 좋은 것. 지금은 둘 다 과했다.
그렇게 영혼 잃은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걸어 여관으로 향하자 여관 쪽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목소리.
“이쪽 좀 잡아주세요. 리젤다.”
“이쪽 말인가요 이실리엘님?”
“플로라 언니, 제가 반대쪽을 잡을게요.”
“발레리 꽉 잡아야 해.”
일곱의 아내들이 다 같이 웃으며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사랑스러운 모습. 일곱 아내가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을 보니 풀어지는 마음.
‘그래 일곱까지만 과하지 않은 걸로 하자…’
나는 아무래도 단순한 놈인 것 같았다.
새해가 한 달하고 절반 정도 지난 어느 날, 수도 한편에 주둔하고 있던 국왕의 첫 번째 부대.
평소 이들의 임무는 다른 두 개의 부대와 번갈아 가며 국왕의 직영지 경계를 정찰하는 것과 수도 치안 유지.
그런 국왕의 첫 번째 부대에 라페스빌이 직접 방문했다.
국왕의 방문으로 발칵 뒤집힌 주둔지.
“국왕 폐하!”
선임 기사는 국왕의 출현에 경악하며 라페스빌을 맞았다.
국왕이 직접 찾았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터졌다는 것. 평소에는 국왕이 부대를 직접 시찰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찾았을 때는 암살자 길드와 관련된 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닦달하기 위해서.
당시 불붙은 늑대처럼 날뛰던 왕의 모습을 떠올린 기사와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긴장한 기사와 병사들에게 불같은 호령이나 질책이 아닌 명령이 떨어졌다.
이동 명령이었다.
이동 목적은 새로운 직영지의 방어. 국왕의 직영지로 편입된 최남단의 변방 영지 파텔의 방어였다.
국왕의 명령에 기사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물들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좌천.
벌레들이 늘어나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국왕이 직접 자기의 친위 기사들까지 내보내 암살자들을 소탕하게 만든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방앗간 집 넷째로 태어나 별다른 기술이 없어 국왕의 군대에 자원한 지 벌써 오 년. 밴드(Band)의 선임 병사인 브랜든은 국왕의 방문에 차가워진 부대 분위기를 눈치채고 신병들을 단속했다.
“오늘 기사님들 기분 별로이신 것 같으니 다들 조심해라,”
그리고 국왕이 다녀가고 싸늘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부대는 며칠 후 이동을 시작했다.
500명의 병사와 선임 기사 셋, 10명의 기사, 견습 기사 20으로 이루어진 국왕의 첫 번째 부대가 파텔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부대의 이동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천막을 치는 시간도 아깝다며 불을 피우고 노숙하며 나누어주는 육포나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보름 동안의 강행군.
결국 목표인 파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브랜든을 비롯한 병사들이 도착한 것은 파텔 영지의 경계에 있는 강가. 도착한 병사들은 강가에서 씻고 하루 동안 푹 쉴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모처럼 강물에 깨끗하게 씻고 푹 잠을 잘 수 있게 된 병사들은, 따듯한 음식을 해 먹고 깨끗하게 씻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브랜든과 병사들의 마지막 행복이었다.
다음날 절반으로 나눠진 부대는 반은 파텔의 성이 있던 곳으로 이동하고, 절반은 이곳 강변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디선가 나타난 태양을 가리는 챙이 머리 앞으로 오리주둥이처럼 나온 새빨간 모자를 쓴 남자들이, 악을 쓰며 자신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빨리빨리 움직입니다!”
“줄 똑바로 섭니다!”
“누, 누구십니까?”
빡
“끄아아악”
질문했던 병사는 주먹에 머리통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풀밭을 뒹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