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276. 영업 방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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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귀족들에게 시달렸는지 라페스빌 국왕은 사이다 뚜껑을 따자마자 아직 향기만 풍겼을 뿐인데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오기 시작했다.
마치 사이다에 목마른 영혼처럼 말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그의 답답한 영혼은 사이다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혀, 현자님 맞습니다! 정녕 버러지 같은 놈들입니다. 귀족으로서 검은 일에 손을 뻗은 것만으로도 수치이거늘! 제 국왕에게 항의나 하는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을 위해서 제가 늪지까지 가서 발바닥 아니, 자, 잠시 말이 허, 헛나왔군요. 아무튼 그런 놈들을 위해서 제가… 흑…”
발바닥의 기억이 아주 깊게 뿌리를 내렸는지, 의도치 않은 것 같은데, 국왕의 입에서 무심코 나와버리는 모습.
나는 수정구 너머에서 입을 가리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모습에 라페스빌의 발바닥을 쑤시는데 한 손을 거들었던 아내들도 싱글벙글. 누군가에게는 비극이었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희극.
나는 입을 가리고 한참을 킥킥거리다가 라페스빌이 조금 진정된 거 같아 보이자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본격적 제안에 앞서 향기만 조금씩 라페스빌의 콧속으로 흘려 넣던 사이다를 라페스빌의 앞으로 쭉 밀었다. 라페스빌의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그를 위한 남부 최고의 바텐더 러셀이 직접 블렌딩 한 사이다.
‘그동안 아주 답답하셨죠? 한잔 드시면 목구멍에서부터 항문까지 고속도로가 납니다. 손님, 그리고 이건 남쪽에서 계산하는 겁니다.’
“어떻게 제가 아내들과 함께 한번 수도로 가서 불편하게 하는 놈들을 다 정리해 드릴까요? 저희가 정치 같은 것은 잘 모르는지라. 혹시 먼저 움직였다가 난처하게 만들어 드리는 건 아닌지 해서 참았습니다만. 국왕께서 살짝 귀띔만 주신다면…”
“예?!”
강한 농도의 사이다에 컵 표면이 녹아내리는 모습에 라페스빌은 기겁하며 되물었다.
“저, 정리 말입니까?”
“아니, 아니지…. 아무래도 우리 국왕께서 불편하지 않게 아베느를 한 바퀴 돌면서 역심이나 불만을 품은 놈들을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고 소리 안 나게 처리하는 것이….”
‘제가, 님 답답한 거, 다 알아요. 그냥 사이다 한잔 시원하게 들이킵시다. 예?’
내 제안에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국왕의 경악하는 목소리. 마시면 항문까지 그대로 녹아내릴지도 모르는 강한 사이다의 향에 손님은 기겁하며 잔을 밀어내며 외쳤다.
“아, 아, 아닙니다. 현자님! 마, 마, 말씀은 감사하지만 버, 버러지라도 나, 나름대로 쓸데가 있기도 하고 또 한 번에 너무 많은 놈들을, 처, 처리하면 국내 혼란도…. 그리고 또 높은 분을 번거롭게 해드리는 건 아닌지 하는…”
“전혀,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벌레 몇 마리 잡는 건데, 그냥 산책하러 나간다고 생각하고 잠시 다녀오는 것뿐인데요. 하하하…”
“그래도 그것이…”
“아하! 그러고 보니…”
나는 뭔가 내가 실수했다는 말투로 국왕에게 말했다.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말이다.
“하긴 제가 이런 걸 묻는 것이 아니었는데요. 그간 감사한 일도 많았으니. 이런 건 묻지 않고 처리해드리는 것이 예의인데, 아무리 미운 놈들이라지만 국내 귀족이면 혈연관계도 있을 것이고, 아무래도 직접 결단을 내리기 힘드실 텐데. 저도 이런 일은 먼저 처리하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이거 제 실수군요.”
다음부터는 큰일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하라고, 사이다에 뼈도 한 조각 띄워서 라페스빌 앞으로 다시 내밀었다.
‘쭉쭉 들이킵시다. 자 어서!’
“아, 아닙니다. 현자님! 제가 이전 건은 연락을 못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지, 진정하시고!”
“아니 저는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버러지 같은 귀족 놈들이 라페스빌 전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소식에 화가 나서 말입니다. 이실리엘, 엘프 수호자들 모여보라고 말해봐.”
마치 이실리엘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것같은 목소리로 말하자. 라페스빌은 기겁하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혀, 현자님 정말, 정말 괜찮습니다. 저,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만으로 이 라페스빌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허허… 이거 참… 저희는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뿐인데…”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라페스빌의 목소리에 강산성 사이다 대접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가기 위해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돕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라페스빌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하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대귀족들이 왜 그리 건방져진 것입니까? 국왕께 항의라니…”
대충 내용은 알고 있지만 본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이 흘러나오게 해야 자연스러울 테니 일부러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이실리엘과 정말 움직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런지 몰라도 주저하는 라페스빌.
“그, 그것이…”
“직접적으로 벌레들을 혼내주는 건 참을 테니 편하게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부끄럽긴 합니다만, 북부 다섯 왕국에서 현자의 칭호를 받은 자… 큭…! 다른 방법으로도 도울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라페스빌이 아직도 내 의도를 의심하는지 주저하는 것으로 보이자.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하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시는데 죄송하지만, 제가 대신 현자님께 설명을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그렇게 행정관.”
라페스빌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노년의 행정관에게 바톤을 넘겼다.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 라페스빌의 오른팔. 같이 발바닥을 쑤심 당했던 노년의 행정관이었다. 나는 그에게 반가운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행정관님 잘 계셨습니까? 노년에 저희에게 찾아오셔서 험한 일을 당하시는 바람에 제가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몸은 건강하신지요?”
“저, 저에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다니 가, 감사합니다. 현자님.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시는데 실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설명은 제가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하여 말입니다.”
하긴 그가 행정관이니 왕실의 제정은 그의 전문.
행정관과 인사치레가 끝나자 행정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에 행정관의 설명으로 디테일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쪽은 보관 기술이나 운송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아 식료품 매매는 비교적 근거리에서 소규모로 이루어 지지만, 곡식만큼은 보관이 용이하니 중부로 수출을 많이 한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수출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보통 직영지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창고에 보관하다가 군량을 제외하고는 상인들에게 판매하는데, 상인들은 이 곡식을 사서 주변국이나 중부 등에 판매하는 것이 아베느의 기본적인 수출 구조.
그러나 국경이나 좋은 길목에 자리 잡은 대영주들이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과도하게 받기 시작한 것.
더군다나 통행세를 올리면서 상인들에게 당근책도 내놓았다. 대영주 직할지에서 곡식을 매입하면 곡식을 매입한 영지에서는 통행세를 받지 않는 것.
라페스빌의 직영지에서 곡식을 사서 대영주 직할지를 지나는 순간 상인들의 수익은 급락하게 되어 버리고, 반대로 대영주의 영지에서는 조금 곡식을 비싸게 사더라도 이익이 더 남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곡식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물품이라도 수출할 물품이면 대영주의 영지에서 매입하는 것만으로 이익이 더 발생하게 되어 버린 것.
영주들의 배는 불러 지고 국왕의 힘은 약해지는 상황이 단순히 통행세 조금 올린 것으로 나타난 결과.
영주들의 수입이 늘어나면 왕이 영주들에게 걷는 세금도 늘어나니, 왕도 좋은 게 아니냐 물었지만. 행정관이 말한 봉건제의 영주들이 내는 세금은, 영주 본인이 죽어 작위와 영지가 세습될 때 한 번뿐. 그것도 영지의 약 일 년 치의 수입 정도라는 것.
작위와 영지는 왕이 내려준 것이니 상속세 개념으로 받는 단 한 가지 세금.
그런 이유로 라페스빌의 직영지에는 최근 십여 년 동안 창고에 팔리지 않은 곡식이 썩어나는 상황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창고가 미어터져 매년 창고만 늘리는 데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
우리 마을로 쳐들어와서 자기가 가장 아끼는 노예 이실리엘 내놓으라고 했던 년에게 작위를 판 것도 재정 악화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말이었다.
그 덕분에 당분간은 한시름 돌렸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창고는 미어터지는데 파산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재정이 악화하니 병사들에게 급료 대신 곡식으로 나눠주기도 하고, 돈이 없어 제때 보수를 못 하니 장비의 질도 떨지 게 되어 병력이 질이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미리 준비해놨던 계획과 떠오른 몇 가지 아이디어를 들려주기 위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허허, 그런 일이… 제가 이야기를 듣고 몇 가지 좋은 생각이 났는데 들어보시렵니까?”
“며, 몇 가지나 말입니까?”
“몇 가지나?”
수정구 너머에서 행정관과 라페스빌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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