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273. 영법 방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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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현자님의 고견을 듣고 싶다는 말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고견을 들려달라면 내가 무슨 꾀주머니 아이디어 뱅크도 아니고….
벨도 그러더니 릴리아나 누님도 무슨 일만 생기면 나를 찾는 느낌이 든달까? 인상을 쓰며 릴리아나 누님을 바라보자 누님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야 러셀아 뒤에 아내들도 소개해드려야지.”
화제를 귀신같이 돌리는 릴리아나 누님.
그러고 보니 다 같이 풀밭에서 일광욕하다가 누님의 일행을 맞은 터라. 내 뒤로 넓게 깐 가죽 위에 앉은 아내들이 다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아내 소개를 시작했다.
일단은 손님이고 귀족 영애니, 소개해드려야지….
“여기는 제 첫째 아내 이실리엘”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높은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이실리엘의 이야기는 이미 들었는지 무척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해오는 영애.
“여기는 둘째 아내 리젤다. 북부 출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같은 인간들끼리의 인사는 간단하게. 귀족이라고 또 미사여구 남발하며 길게 질질 끌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격식도 귀족끼리의 예로 하는 것을 보니. 아마 리젤다가 북부 하급 귀족 출신인 걸 알고 있는 것같은 느낌.
‘하긴 만나러 왔으면 그 정도는 릴리아나 누님을 통해서 공부하고 왔겠지?’
“그리고 셋째 아내 발레리”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 아내의 소개를 끝내고 다음 아내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릴리아나 누님이 영애를 안내해 여관 안으로 들어서는 행동을 취했다.
제집처럼 영애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가려는 누님. 그러나 제집처럼 행동하는 건 둘째치고. 나 아니, 우리를 당황하게 한 것은, 남은 아내들의 인사를 받지 않고 몸을 돌린 것.
“로렐라인님 그럼 현자님과는 안으로 들어가서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죠.”
누님의 행동에 잠깐 아내들과 당황했는데. 생각해보니 누님은 내 아내가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 누님은 아마도 내 아내 소개가 끝났다고 생각해, 영애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려 한 것 같았다.
어색하게 굳어진 아내들의 표정에 나는 누님을 급하게 불렀다. 누님이 무시한 사람 중에 누님이 알면 경기를 일으킬 분들이 계신 것. 그분들이 화나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누님?”
“어? 왜?”
‘그사이에 좀 늘었는데요?’
영애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가려다 급하게 되돌아보는 누님. 나는 누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들에게 아내가 늘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매번 할 때마다 어색했으니 말이다. 뭔가 내가 쓰레기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기분이랄까?
“어? 아직 안 끝났는데요?”
“뭐가?”
“아내 소개요?”
“뭔 소리야? 너 아내 세 명 소개 다 끝났잖아? 그사이에 아내가 더 생긴 것도 아니면…?”
길드 접수원이라 숫자 셈은 빠른지. 내 뒤로 앉거나 서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더니. 릴리아나 누님이 경악에 차 부릅뜬 눈으로 외쳤다.
“설마 또? 그사이에?”
누님의 놀란 얼굴과 물음에 머리를 긁적거리자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럼 네, 넷째는 누군데? 설마 뒤에 있는 전부는 아닐 거 아냐?”
누님의 질문에 나와 아내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어색한 미소와 웃음.
“하… 하하… 저, 전부면 이, 이상한가?”
“세, 세상에!”
놀란 여자의 외침.
내 어색한 말을 비집고 들어온 놀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님이 아니라 영애였다. 누님의 뒤로 영애가 누님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 기사의 부러움 가득한 표정 속. 놀란 영애와 누님을 진정시키고 인사를 이어갔다.
“이쪽은 애니라고 합니다. 영애님 누나도 애니는 알지?”
“다, 당연히 알지 애니씨랑은 대체 언제?”
“아, 안녕하십니까?”
‘벌써 그렇게 놀라면 안 되는데…?’
아직도 자기들이 듣고 있는 게 과연 현실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얼굴의 릴리아나 누님과 놀란 영애. 이런 사소한 일에 놀라면 안 되는데, 벌써 저렇게 놀라는 둘을 보니 인사가 조금 주저되었다. 그래서 순서를 조금 조절했다.
약한 것부터 차례로 타격하는 방향으로.
처음부터 명치를 때리면 부지불식간에 맞은 충격으로 주저앉을 수 있지만, 약한 펀치부터 시작해 천천히 강도를 올리면, 면역되어서 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
놀란 둘의 얼굴을 보니 다른 아내들 소개하면 기절이라도 하는건 아닐까 싶어 배려를 하기로 한 것.
그러니 애니를 시작으로. 플로라.
“이쪽은 플로라입니다. 셋째 발레리와 비슷하게 생겼지요? 발레리의 언니입니다.”
“그, 그렇군요. 어, 언니.”
“다, 닮으셨네요. 두 분.”
다행히 발레리의 언니라 쓰레기 같은 놈이 되는 건 아닌 모양. 남부는 언니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수리아.
수리아는 일어설 수 없으니 바닥에 앉은 상태였다. 릴리아나 누님도 영애도 앉아서 소개받는 수리아를 보고 결례가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을 찾아온 것은 묵직한 복부, 한 방.
“이쪽은 수리아 북부 다섯 왕국 에삭스의 왕녀입니다.”
“반갑구나. 그란 폴의 영애여. 금번에는 몰라서 이해하지만, 여의 남편이니, 러셀은 에삭스의 부마. 좀 더 예를 차려주길 바라네.”
앉는 것이 아니라 누워서 인사를 받아도 결례가 아닌 수리아이고, 결례는 좀 전에 자신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안, 둘의 귓가에서 식은땀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까 인사를 잘린 것 때문인지. 처음 듣는 수리아의 왕족다운 말투. 수리아의 날 선 인사에 대답도 못 하고, 원망의 눈빛으로 릴리아나 누님만 바라보는 영애. 저 눈빛은 대체 왜 이런 건 말 안 해줬어? 이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누님은 영애의 눈빛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누님도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까 도착할 때보다 더욱 원망과 실망이 가득한 눈빛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급하게 찾아오랬냐고…’
그러나 당황하는 것도 잠깐 귀족은 귀족인지 영애는 급하게 사과를 해왔다.
“죄, 죄송합니다. 에삭스의 왕녀 수리아님.”
“찾아올 사람의 정보 정도는 살피고 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북부 다섯 왕국이 인정한 나의 부마인데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덜 풀렸는지. 찾아오려면 최소한 이쪽의 가족 구성원 정도는 알고 와야지. ‘왜 그냥 와서 결례를 저지르는 것이냐’라고 을러주는 수리아.
귀욤귀욤 핑크 머리 우리 수리아가 화가 많이 난 모양. 처음 보는 수리아의 날 선 반응 나는 급하게 수리아를 달랬다.
“우리 벚꽃이 이곳에 있는 게 알려지면 안 되니까. 내가 말을 안 했어. 자자, 수리아 마음 풀고…”
내 벚꽃이라는 말에 고압적인 표정이었다가 눈썹을 꿈틀하더니, 벚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수리아.
“러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이해해야죠. 헤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트라.
충분한 면역력을 키워줬으니 괜찮겠지, 싶어 수리아의 소개를 시작했다.
“이쪽은 자애와 순결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
[었지만 지금은… 성…]
“시트라님은 길드에도 찾아오신 적이 있었잖아 당연히 알지! 잘 계셨는지요. 시트라 님. 영애님 이쪽은 자애와 순결 교단의 상급 이단심문관 시트라님 이십니다. 그란 폴에서도 범죄자 심문에 도움을 받은 적도 있죠.”
누님은 수리아는 놓쳤지만, 시트라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영애에게 알리고 싶었던지. 내 말을 자르며 시트라와 인사를 하고, 시트라를 영애에게 급하게 소개했다.
옆을 보자 역시나 눈썹을 꿈틀하는 시트라.
‘앗! 저건!’
시트라가 성녀 모드에서 이단 심문관 모드로 변화하려는 상황.
“잘 계셨습니까? 릴리아나님? 그런데 제가 이번에 교단 내에서 직책이 변경되어서요.”
“예? 오오! 축하드립니다. 다, 당연히 좋은 일이시겠죠?”
누님은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과한 리액션을 취하며 시트라를 축하했다. 그러나 내 말을 자른 것이 불편했던지. 시트라는 성녀가 아니, 범죄자를 앞에 둔 이단 심문관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아주 복되고 축하받을 일이지요. 성녀가 되었으니…”
털썩
털썩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두번 들리고 눈을 까뒤집은 두 여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게 있는데 면역력은 맞는다고 길러지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전생에서도 면역력은 질병 같은데 쓰는 단어였던 것. 전문 분야가 아니라 나온 실수랄까?
자꾸 맞으면 길러지는 것은 맷집이지만 그건 적당히 두드릴 때나 생기는 것. 사람이 처맞다 보면 누적되는 것은 데미지요. 데미지가 누적되면 당연히 쓰러지게 되는 것이었다.
펀치드렁크 증후군 같은 병도 올 수 있고 말이다.
애니, 플로라, 수리아, 시트라로 이어지는 강렬한 타격은 두 여자에게 깊은 데미지를 남긴 것 같았다.
그리고 누적된 데미지에 두 여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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