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75화 (275/352)

〈 275화 〉 272. 영업 방해 3

* * *

단박에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워낙 갑작스럽기도 하고.

일단 다행이라는 점은 대늪지 사냥철이 끝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돌아올 사냥철까지도 시간이 좀 있다는 것.

우기가 끝난 사냥철은 만물이 풍요로운 시기. 짐승들이 그 시기에 맞춰 번식하니 그걸 잡아먹는 몬스터나 마물들도 그때 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시사철 번식하는 놈들을 제외하고, 그때 태어난 놈들이 자라서 대늪지 밖으로 넘쳐 나온다고 해도 최소한 일이 년 이상은 시간이 남아있는 것.

그리고 몬스터나 마물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더라도, 이쪽으로 몰려오면 상급 정령도 둘이나 있고 이실리엘과 수호자들도 있으니 딱히 큰 위협은 아닐 것 같긴 한데…

‘우리보다 주변 영지가 더 큰 일이겠지?’

정작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우리 주변의 영지가 아닐까 싶다. 몬스터들이 길을 따라 이동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습격 같은 문제가 아니라, 역시나 가장으로서의 위엄과 나의 취미생활인 여관 운영이 위협받는다는 것 정도?

에브리나와 벨릭에게 상황 설명이 끝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나는 둘째치고 마을 주민들이 입을 크고 작은 피해와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문제들도 여러 가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농사 문제. 마을의 농지는 대부분 목책 외부에 있다. 마을 주민들이 별다른 대책 없이 경계병을 세우는 정도로 주변 농지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평원이라는 특수성 때문. 평원이라 몬스터들이 접근하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늘어난 몬스터들이 주변에 바글거리면 아무래도 농사도 어려워질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농사가 힘들어지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그러면 또 먹고살기 위해 마을을 떠나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는 것, 그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그런데 잠깐 여러 가지 고민을 이어가는 사이. 잊고 있었던 눈치 없는 벨릭의 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형님 어쩔 거요? 보통 ‘큰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큰일’이면 뭔가 대책이라도…. 그런 ‘큰일’이라면 형님이 나서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뇨? 난 그렇게 ‘심각한 큰일’인지 전혀 몰랐네? ”

눈치 없이 계속 큰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벨릭. 눈치 없는 건 여전한 놈.

‘너 인마 그러다 진짜 큰일 치른다.’

속으로 벨릭이 저러다 에브리나에게 무슨 큰일을 당하진 않을까 생각하며, 에브리나 쪽을 흘깃 살피자 에브리나의 관자놀이에 실시간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핏대.

깊고 깊은 굴속에서 기어 나온 구렁이가 에브리나의 관자놀이를 꾸물꾸물 기어가고 있었다. 저 뱀을 부른 것은 벨릭.

결국 에브리나가 참지 못하고 부탁했다.

“통신도 끝났으니 자리 좀 피해주실 수 있을까요? 벨릭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관자놀이의 구렁이가 이제는 아나콘다쯤으로 변한 상황. 자리를 피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벨릭을 한번 슥 쳐다본 후 에브리나에게 말했다.

“그래, 자꾸 큰일 큰일 하는데, 큰일이 뭔지 확실히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네….”

내말에 섬뜩한 미소를 떠올리는 에브리나.

그리고 나와 에브리나가 나누는 이야기에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이게 무슨 이야기지?’ 하는 표정을 짓는 벨릭.

­쿵

나는 재빠르게 방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닫힌 방문 안에서 들려오는 벨릭의 비명 섞인 절규!

“벨릭? 눈치 없이 자꾸 ‘큰일’이라고 반복해서 말해야겠어?”

“응? 에브리나가 못 참으면 그건 큰일이…. 헉! 왜! 왜! 지금 낮이잖아 밤도 아닌데 왜 벗어! 자, 잠깐만 에브리나! 끄아악!”

벨릭은 결국 눈치 없이 큰일, 큰일 거리다가 정말 큰일을 치르게 되었다.

‘벨릭, 너의 명복을 빌어주마.’

재앙과도 같은 큰일을 치르는 둘을 뒤로하고 일단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 홀에 모여있는 아내들 아내들도 용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여관으로 들어서는 나를 부르는 아내들.

“러셀, 이야기는 잘 나눴나요?”

“러셀, 그런데 늪지에 용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면서요?”

“러셀님. 용도 큰 와이번 같은 겁니까?”

그리고 그런 물음 사이에 이실리엘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왕은 왜 하필 용이 있다는 소문을 냈을까요? 저는 그냥 고양이가 좋은데…”

다른 아내들이 설명을 해줬는지, 용이 어떤 의미이고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이해한 이실리엘이 자기가 용이 되었다는 사실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이실리엘은 내가 지어준 고양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야옹’

머릿속에 이실리엘이 야옹 하며 우는 모습이 떠오르고, 나중에 이실리엘에게 야옹이라고 한번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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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여관에 손님이 도착했다.

여관 앞마당에 큰 가죽을 깔고, 아내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나를 훼방 놓은 손님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화가 잔뜩 난 릴리아나 누님.

어제 통신을 멋대로 끊어버려서 그런지 누님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보니 어제 나와 통신이 끊어지고 나서 바로 달려온 것 같은 상황.

마차에서 뛰어내려 나를 발견하자마자 누님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나를 협박했다.

“야! 그렇게 통신을 끊으면 어떻게 해! 내 목숨도 끊어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아니, 누님이 자꾸 쓸데없는 소릴 하니까…”

“우리 사이가 이런 사이였어?”

‘아니, 이분이 아내들도 있는데.’

릴리아나 누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오해할 리는 없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단어를 줄줄 뱉어내는 릴리아나 누님이셨다.

“사이는 무슨 사이요! 이분이 큰일 날 소리를!”

“뭐 어? 러셀 너 정말 그럴 거야?”

그렇게 한참 누님과 실랑이하는데 들려오는 소리.

“큼큼…”

눈치를 주는 목 가다듬는 소리에 누님의 뒤쪽을 보니, 누님 뒤로 처음 보는 여자와 두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기사 둘은 익히 아는 얼굴. 검문소를 번갈아 가며 지키는 두 기사였다. 기사 둘의 뒤에 시립 시키고 서 있는 여자. 기사 둘을 호위로 대동하고 왔다면 조금 신분이 높다는 이야기.

안면을 아는 두 기사에게 살짝 눈인사하고 누님의 소개를 기다렸다.

원래 높은 분들은 옆에 따르는 사람이 소개해주는 것이니 누님의 소개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먼저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실례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누님께서 당황한 얼굴로 바로 여자의 소개를 해왔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이분은 로렐라인 발트. 그란 폴의 영주이신 에드먼드 발트의 외동 따님. 이번에 중부에서 마법 공부를 마치고 그란 폴로 돌아오셨어.”

챙이 넓은 백색의 마법사 모자를 쓴 오렌지색 머리의 여자. 긴 머리를 가슴 앞으로 살짝 땋아 내린 모습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마법 공부를 마치고 왔다면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얼굴이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한 성숙미.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영주의 외동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영애를 뵙습니다.”

내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정색하며 말하는 영주의 딸.

“아, 아뇨 그렇게 예의를 갖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국왕과 이곳을 보호구역으로 만들 때 그란 폴의 영주에게는 세세한 상황을 전달한 상황. 영주의 딸은 아마 이쪽의 신분이나 다른 내용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영주의 외동딸까지 대동하고 온 릴리아나 누님. 인사를 끝내면 방문 목적을 누님이 이쪽에 알려줘야 했지만. 삐져버린 누님은 내가 난처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인사가 끝났는데도 미동도 없는 누님.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조금 뻘쭘해진 상황.

삐져서 자기의 본분도 잊고 심술 맞게 입술만 내밀고있는 누님. 대체 영주의 딸은 왜 데리고 온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누님이 얄밉게 혀를 쏙하고 내밀었다.

‘아니, 저 양반이 나잇값도 못 하고’

원래 여기서는 누님이 나서서 나에게 방문 목적을 알려줘야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직접 정중하게 물었다.

대충 느낌 오지만, 그래도 방문한 분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어떤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영주의 딸에게 방문 목적을 묻자 영주의 딸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부 다섯 왕국에서 현자의 칭호를 받으신 분이 계신다고 해서, 작금의 저희 영지의 상황에 대해 고견을 듣고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늪지의 현자님?!”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듯한 간곡한 어조.

보호구역을 정할 때 북부와 라페스빌, 성국 그리고 어찌 보면 당사자였던 그란 폴의 영주가 대화를 나눌 때, 다 까발려진 나의 이불킥 하고 싶은 별명은 이제 글로벌화가 되어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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