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72화 (272/352)

〈 272화 〉 269. 신년 6

* * *

“사리나 토란 한 개랑 과도, 밖에서 파란 꽃, 한 열 송이 정도만 꺾어올래? 작은 그릇하고?”

벨에게 활자의 개념을 설명해주기 위해 사리나에게 토란 한 개와 작은 과도 한 개 그리고 파란 꽃 열 송이를 부탁했다.

잠시 후 사리나에 의해 내 손에 들어온 것들을 이용. 토란을 반으로 갈라 거기에 적당히 글자를 좌우 반대로 새기고 짓뭉갠 꽃물에 그것을 찍어서 벨의 손등에 찍어주었다.

손에 찍힌 단어는 ‘바보.’

자기 손등을 한번 쓱 보다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는 벨.

“책을 늘리는 방법을 알려달래 했더니 장난이나 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 러셀!”

흥분해 소리치는 벨. 나는 놈에게 말했다.

“알려줬잖아!”

“남의 손등에 바보라 글을 찍어준 것이 말이냐?!”

벨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자기 손을 한번 보고 다시 나를 보더니. 뭔가 알아챈 듯한 느낌의 소리를 내뱉었다.

“오?!”

“너, 내가 이실리엘 친구라서 알려주는 거야 알았냐?”

뭔가 눈치챈 듯한 벨에게 ‘이 러셀님의 깊은 뜻을 알겠느냐?’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벨은 뭐랄까 약간 막냇동생 같은 막무가내인 성격의 미워할 수 없는 아이이다. 수많은 언어를 단숨에 습득하는 재능이 있다는데, 그런 건 전혀 모르겠고 실제로는 그냥 떼쟁이 어린 동생 느낌인데.

그러나 지금 보니 벨도 마냥 어린 떼쟁이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인제 보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

‘하긴 책도 쓰고 그런다는데. 제법 엘리트겠구나?’

“그, 그렇구나! 글을 찍는 것이구나! 그럼 토란과 잉크만 있으면 되는 것이구나!”

그러나 나의 감탄은 아주 짧은 여운으로 끝났다. 벨의 접싯물보다 얕은 응용력이 금방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코를 박고 빠져 죽을까 봐 의심되는 얕고도 얕은 그녀의 응용력.

‘벨 이 자식 나의 감동을 돌려내라!’

뭐, 벨에게 무언갈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벨이 언어 천재라지만 이쪽은 그와 반대되는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니.

나는 북부에서 토란을 깎으며 고생할 사람들을 생각해 벨이 알아들을 수 있게 자세하고 천천히 설명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전생에 눈높이 교육이라는 게 생겼구나’라고 깨달으며 말이다.

“나무 조각이나 금속으로 문자를 하나하나 만들어서, 배열한 다음에 찍는 거야. 같은 글자를 여러 개 만들어서 조합하는 거지.”

“음… 잘 이해가 안 가는구나…”

이해가 안 간다는 벨,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한 번도 이쪽에 없던 개념이니 말로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아무리 내가 자세히 말해줬어도 개념조차 이해를 못 하는데 알아들을 리 만무한 일.

벨은 그냥 신분만 높은 평범한 여자이니 말이다. 결국 벨에게 이해시키려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일.

‘결국 보여줄 수밖에 없단 말인가?’

“야 올빼미 아니, 레오나야 노르딕 씨 아니, 대장간 건설로 바쁘시지…. 그래! 스나졸린양 좀 찾아서 데려왔으면 좋겠어.”

나는 아침을 먹고, 신년이라 열흘간 최소한의 일만 하며 쉬라고 명령을 내리자 이틀 내내 제 방도 아닌, 여관 식당에서 앉아 졸고 있는 올빼미에게 노르딕 씨의 딸인 스나졸린 양을 모셔 오라고 부탁했다.

내 부름에 화들짝 놀라 탁자에 그대로 머리를 박는 올빼미. 녀석은 일어나 머리를 주무르는 것도 귀찮은지. 처박힌 그대로 올빼미로 갈아탄 것 같았다. 처박힌 채 미동도 없는 녀석과 여관 문밖에서 들려오는 올빼미의 홰치는 소리.

그리고 한참 후에 열린 여관 문에 작은 드워프 하나가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여관 벽면에 몸을 가리고 머리만 반쯤 내밀에 안을 확인하는 스나졸린.

‘저게 어떻게 성인이냐고!’

“러, 러셀님 저, 차, 찾으셨나요?”

“어! 스나졸린양 들어와!”

“예, 예…”

조용한 성격의 스나졸린은 아주 조심조심 걸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벨과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무, 무슨 일로 차, 찾으셨나요?”

조심스럽게 자신을 찾은 이유를 묻는 스나졸린.

“아무래도 노르딕 씨와 그리나 씨가 바쁘시니, 스나졸린양이 뭘 좀 만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말이지…”

“예?! 제, 제가요?”

말도 안 된다는 목소리의 스나졸린양. 뭐 엄청 대단한 걸 만들어달라고 생각하는 모양.

“저, 저는 견습 정도고 그,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아, 나무로 깎으면 되는 거라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그런 거면 저라도…”

스나졸린양의 승낙에 나는 재빠르게 잉크와 펜을 가지고 와 빈 양피지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만들기 쉽게 재질은 나무로, 모양은 이렇게 네모난 모양,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할까? 서로 세웠을 때 공간이 생기지 않게 딱 붙을 수 있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높이도 다 같아야 해. 틀에 딱 집어넣으면 짝수로 딱 들어가게 그리고 한 면에는 글자를 이렇게 반대 되게 새겨줬으면 좋겠어.”

팬으로 슥슥 그리면서 설명하자 금방 알아듣는 스나졸린.

“이건… 글자를 어딘가에 찍는 건가요?”

오… 정확한 사용처는 몰라도 거의 근접한 느낌. 역시나 관련 계통 종사자라 그런지 보기만해도 글자를 찍어서 사용한다는 사실까지 알아낸 스나졸린.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설명을 이었다. 뭔가를 설명할 때 말이 잘 통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한번 설명한 걸 또 하고, 또 하는 게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응 이걸 글로 배열해서, 여기에 잉크를 발라서 양피지에 찍을 거야. 그러면 같은 내용을 여러 장 찍을 수 있거든.”

“가, 같은 내용을 여러 장!”

스나졸린은 그제야 정확한 사용처를 듣고는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랄 만도 하지. 이쪽 세계에서는 이제 내가 쿠텐베르크다!’

내가 마음속으로 한껏 기쁨에 젖어 이쪽 세계 역사책에 이름이 오르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기쁨에 젖어있을 때. 드워프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런데 러셀님. 이, 이 그림은 뭔가요?”

활자 개발이라는 대단한 업적을 보여줬는데 뭔가 아주 짧은 놀람.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응? 뭐가?”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전개도와 투영도로 그린 활자의 도면. 여섯 면을 펼쳐 그린 도면과 안 보이는 부분을 점선으로 표시한 그림이었다.

“아. 이건 전개도라고 잘라서 펼쳤을 때 이런 모양이라는 걸 그린 거고. 이건 투영도라고 안 보이는 부분을 점선으로 표시해서 그린 거지. 이해가 가?”

“전개? 투시? 점선?”

나는 토란을 사각형 모양으로 여섯 조각 깎아 스나졸린양에게 육각형 모양을 만들었다가 펼쳐서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펼친 모습의 전개도.”

그리고 육각형 모양으로 깎은 토란을 비스듬한 모습으로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위치에서 본다는 생각으로, 안 보이는 반대 부분을 점선으로 표시하는 거야. 이게 투영도.”

내 설명이 끝나자 내가 그린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던 스나졸린은 고개를 쳐들고 아까의 얌전하고 조용한 드워프는 어디로 보내버린 모습으로 말했다.

“대, 대, 대 대단해요! 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러, 러셀님도 자, 장인인가요?”

갑자기 말이 빨라지는 스나졸린.

“어, 엄청나요!”

“그, 그래?”

아니 활자를 보여줬는데도 잠깐 놀란 반응이었는데, 고작 시점 바뀐 도면 두 개에 저런 반응이라니. 스나졸린 양의 과도한 반응에 벨도 놀란 얼굴.

벨은 그게 뭔데 그렇게 대단하게 놀라냐? 하는 얼굴로 스나졸린을 바라봤다.

아까 얌전은 내숭이었던지. 스나졸린은 참을 수 없는 얼굴로 내가 그린 도면을 집어 들더니 음악공연에 열광한 관중 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이거 아버지 보여드리고 와도 되나요?”

“그, 그래도 되긴 하는데…”

스나졸린은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들어올 때 얼굴만 빠끔히 내밀던 모습과는 다르게, 도면을 들고 신이나 밖으로 달려 나가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달려온 노르딕 씨와 그리나 씨.

노르딕 씨는 나에게 다그쳐 물었다.

“러, 러셀님 정말 이것을 러셀님이 그리 신 겁니까?”

“예? 그, 그렇죠?”

“오오오오오오!”

환호하는 노르딕 씨.

나는 진정된 노르딕 씨가 보여주는 대장간 도면을 보고 드워프들이 열광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노르딕 씨가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대장간의 도면을 통해서 말이다.

이쪽에서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도면에는 딱 세종류의 그림이 존재했다. 평면도, 단면도, 그리고 입면도.

평면도란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런 것. 단면도는 반으로 잘라, 가른 모습으로 내부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입면도는 완성했을 때 전후좌우의 모습을 그린 도면.

전개도나 투영도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다양한 시각에서 그리는 것도, 화가가 등장해야 발전하는 것인데, 염료 기술이 낮은 이쪽은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직업이 없고 벽화 같은 것도 대부분 기술자가 그리는 상황.

그러니 벽화나 그림도 대부분 자기들이 그리는 도면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입체적으로 표현한다거나 풀어 헤치는 발상이 그들 보기에는 대단한 모양이었다.

‘아니, 님들아 그것보다 활자가 더 대단하다니까요?’

나는 드워프들에게 활자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설명했지만, 그건 전개도와 투영도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책을 찍어내서 대체 어디다 쓴다고?’라는 표정의 드워프들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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