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71화 (271/352)

〈 271화 〉 268. 신년 5

* * *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도 피해자들의 마음은 쉽게 풀리질 않았다. 그렇기에 나와 벨은 이틀 동안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피해자들을 쫓아다니며 연신 사과하는 상황. 그나마 나보다 벨은 처지가 괜찮았다.

플로라가 발레리의 행동을 칭찬하면서 여자의 무기를 잘 사용했다며 추켜세우기도 했고, 플로라가 옷 벗은 사실이 알려져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어차피 평생 한 번도 볼 사람이 아니라고 발레리를 달랬기에 보다 빨리 풀렸으니 말이다. 이틀을 꼬박 채우긴 했지만, 이틀째 저녁에는 발레리가 벨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벨은 나름의 소득도 있었다. 발레리를 달래는 과정에서 재미있겠다며 플로라도 자기 이야기를 써달라고 벨에게 인터뷰를 자청하기도 했고 말이다. 어차피 발레리 인터뷰는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벨은 결과적으로는 잘 풀린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벨과 정반대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리젤다와의 첫 키스 순간을 다른 사람에게 알렸다는 리젤다의 비난과 아내들도 내가 잘못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기에, 이틀 동안 눈치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솔직히 억울한 면도 있었다. 인터뷰는 나만 진행한 게 아니었고 리젤다도 했는데, 나는 빠진 부분을 채워준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내 실수라면 결정적인 부분을 너무 자세하게 인터뷰해준 것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아니, 벨의 한마디에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너무 애썼던 것 같다.

“러셀, 그러니까 리젤다가 둘의 첫 키스는 목책 근처에서 엘프어를 배우면서 했다고 했는데, 내 생각에 조금 낭만이 부족하다고 할까?”

인터뷰 날, 우리의 첫 키스가 낭만이 좀 부족하다는 말에.

“벨, 아냐 최고로 낭만적인 순간이었어! 누워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리젤다의 남색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빛! 하늘 위를 거니는 기분이었어. 마지막에 리젤다가 부끄러운 듯 ‘나도 이 정도 권리는 있거든요.’ 하면서 도망치는 것도 예뻤다고.”

그러니까 내 죄라면 우리 키스가 낭만적이라 주장한 것일 뿐 그리고 내가 느낀 감상을 너무 세세하게 말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일까?

내 실수 반 억울한 반이 어우러진 결과랄까? 반반 치킨도 아니고….

토라진 리젤다 이외에 아내들의 경고도 이어졌다. 리젤다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애니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다 말고 경고했다.

“나랑 있었던 이야기 하나라도 벨님에게 알려주면, 부끄러워서 죽여버릴지도 몰라. 그냥 나도 죽고 러셀도 죽는 거야 알았지?”

섬뜩한 눈빛으로 을러대는 애니. 부끄러워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애니.

‘원래 죽어버릴지도 아니었나?’

애니의 섬뜩한 경고에 나는 조용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애니는 흑역사가 많으니, 애니와 나의 이야기 부분은 쓰려면 많은 각색과 미화가 필수였다.

“으, 응….”

부엌에서 애니의 경고가 끝나고 아침 식사가 끝나 한가해질 무렵 시트라가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그녀를 따라 뒤뜰로 향하자 들려오는 당부.

“러셀, 저는 러셀을 믿습니다. 아셨죠? 저희 둘만의 이야기는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요. 저는 당신만의 자애의 성녀이고 싶지. 이단 심문관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무, 물론이지. 시트라.”

시트라식 당부(?). 그 후로도 시트라는 나를 붙잡고 여자의 수치심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한참 훈계를 듣고 시트라에게 풀려나고도 상황은 이어졌다.

“흥!”

나만 보면 콧방귀를 끼고 자리를 피하는 리젤다. 그것은 마치 결혼 전 내가 리젤다에게 받았던 구박을 재현하는 느낌. 정말 단단히 토라진 리젤다는 사람 피를 말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속이 쓰려오고 위가 경련하는 느낌.

그렇게 아내들에게 번갈아 가며 구박과 피 말리는 압박을 당하며 이틀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내가 딱해 보였던지 나를 품에 안은 이실리엘이 리젤다의 마음을 풀어줄 방법을 알려주었다.

“……진짜? 그렇게 하면 된다고? 정말로? 그게 먹힌다고? 아니, 그래도 돼 근데?”

“네, 아마 리젤다의 마음은 무조건 풀릴걸요? 내기해도 좋아요!”

그런 단순한 방법으로 풀릴 거라고는 생각이 안 되긴 했는데, 이실리엘이 이렇게 장담하니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아내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해 친하게 지내더니.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느낌의 자신감 넘치는 이실리엘의 장담.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여관 빨래를 도와주던 리젤다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저, 저기 리젤다?”

“흥!”

내 목소리가 들리자 획 돌아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리젤다. 아직도 토라진 모습. 나는 이실리엘에게 배운 대로 그녀의 뒤통수에 향해 외쳤다.

“리젤다 나랑 화, 활 쏘러 가지 않을래?”

움찔. 내 외침에 리젤다의 쿵쾅거리는 발걸음이 멈춰 섰다. 나는 멈춰선 리젤다를 향해 남은 말을 외쳤다.

“이실리엘이 다른 사람은 안되지만, 리젤다에게는 세계수의 활 한번 쏴보라고 해도 된다고 그랬는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상하게 점점 가까워지는 리젤다. 고개를 내려 내 발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가고 있나 해서. 하지만 내 말은 땅에 뿌리 내린 듯 멈춰선 상황. 머리를 내밀어 리젤다의 발을 보자. 내가 리젤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리젤다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뒷걸음으로.

뒷걸음으로 어느새 내 옆에 도착한 리젤다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기도 조금은 부끄러운지 조금은 말을 더듬으며.

“흐, 흥 이렇게까지 따라와서 말하면 제가 요, 용서해 줄 수밖에 없지요.”

“내가 따라간 게 아니라 리젤다가 뒤… 큽!”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더니 리젤다가 사나운 눈초리로 말했다.

“러셀은 다 좋은데, 가끔 이 입이 문제에요. 이런 입은 혼내야 해!”

­쪽

키스까지 해주고 날 끌고 가는 리젤다.

“자 어서 가요.”

‘이게 진짜 되네?’

더 웃긴 건. 이실리엘이 선물해준 활을 들고 목책으로 가 리젤다와 쏜 화살은 딱 한발. 리젤다는 한 발 이상을 쏘려 하지 않았다. 이실리엘님이 주신 소중한 활이니 한발로 충분하다나?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한 번만으로 무척이나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으니 말이다.

토라진 것도 언제 그랬다는 듯이 미소 짓는 모습.

“제, 제가 세계수의 활을 쏴보다니!”

밤에 다섯 번 연속으로 했을 때 외에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으니, 저 표정은 확실히 최대만족 표정이었다.

그렇게 이실리엘의 사랑 담긴 지혜로 나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다.

점심 테이블에 앉아 축 늘어진 벨과 나. 이틀간 시달린 결과랄까? 둘 다 이틀 동안 시달려 멘탈이 탈탈 털린 상황, 피해자들이 사과받아 주긴 했지만, 기력이 다 빠진 우리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위로했다.

“고생했다. 벨.”

“아니다. 내 글 때문에…”

벨은 테이블에 엎드려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쓰는 게 아니구나….”

“그래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쓸 때는 먼저 다 쓰고, 그 사람에게 확인해달라고 하는 게 좋지.”

벨이 공감한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난스러운 과정으로 벨이 원작자 검수의 필요성을 습득하고, 지친 벨과 가해자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벨이 조금 특이한 부탁을 해왔다.

벨은 지금 북부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공작가 아가씨가 무슨 사업이냐고 집에서 난리를 칠 수도 있으나 벨의 집은 북부. 실리를 중시하는 북부라 그런지 나름 칭찬받는다는 벨.

사업 내용은 자기가 쓴 책과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책들을 모아서 영애들을 대상으로 대여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벨의 말로는 제법 짭짤하게 장사가 잘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필사본을 늘리는 데 무리가 있다는 호소를 해왔다.

“그러니까 책을 필사하는 데는 돈도 많이 들고. 기간도 오래 걸린다는 거지?”

필사라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이쪽은 글 아는 사람도 적거니와 수정을 할 수도 없으니 더욱더 힘들 것이다. 한자 틀렸다고 종이를 버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리고 엘프의 책을 엘프들이 쉽게 구해주긴 하지만 필사하다가 틀리면 그어서 쓰고 그러다 보니 책마다 좀 지저분한 부분도 생기고. 또 가끔 책이 영애들이 마시던 차나 비에 젖기도 해서, 파손된 책을 다시 만드는 것이 정말 일이구나.”

“그런데?”

“그러니까 현자인 네가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책을 늘어나게 하는 마법 같은 건 없는 것이냐?”

벨 이 새끼!

정말 얄밉기 그지없는 놈이다. 뭔가 맡겨놨다는 듯 요구하는 벨.

그런데 또 방법이 떠오르니 더 짜증이 난다. 이 새끼가 뭘 요구하면 왜 바로바로 떠오를까?

“하…. 그럼 뭐 방법이 없네! 활자를 만들어 찍어야지.”

“찍어? 활자? 그게 무슨 말이냐?”

벨이 처음 듣는 단어에 당황하듯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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