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67. 신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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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은 아침 일찍 잠에서 깨 일 층으로 내려온 나의 아내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미 알고 있는 리젤다와 발레리 새로 추가된(?) 시트라, 수리아, 그리고 애니와 플로라까지.
“여긴 이실리엘과 나의 친구. 북부 에삭스 왕국의 윈터 폴 공작 가의 막내딸.”
“안녕하세요. 우리 자기 친구면 제 친구기도 하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귀족 그게 뭔데? 라는 반응의 플로라. 확실히 암살자든 귀족이든 플로라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마이페이스. 벨도 그것을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내 아내라 그럴까?
하지만 이어진 설명에는 반응했다.
“여기는 서부 무희 출신 발레리의 언니 플로라.”
“바, 발레리의 언니라고? 언니와 동생을 한 번에?”
발레리의 언니라는 부분에서 경악하는 벨과 그의 일행. 북부에서는 자매 동시에 아내로 맞는 경우가 드문 것 같았다. 서부에서는 그렇게 드문 것도 아니라던데.
벨이 놀라던 말던 다음으로 인사한 것은 시트라.
“여긴 시트라. 얼굴은 알지?”
“근데 이분은 자애와 수, 순결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니었느냐? 러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벨. 그러나 시트라는 이미 전직한 상황. 쪼금 높은 직책으로.
“안녕하십니다. 자애와 순결 교단 자애의 성녀 시트랍니다.”
“예?! 서, 성녀!”
벨이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재차 물었다.
“서, 성녀님?”
시트라는 말로 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벨의 놀란 물음에 행동으로 대답했다. 멀리서 여행해 온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준다고 시트라가 뭔가 버프를 뿌려대자 번쩍거리는 빛과 뿌려지는 신성력. 그 모습에 벨은 신성 모독이라도 저지른 건 아닌지 황망히 고개를 조아렸다.
시트라가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벨의 눈은 찢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애니.
“아, 애니는 알지?”
“서, 설마 애니 양까지?”
벨은 이제 더 이상 놀랄 게 없다는 듯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이, 내가 제목을 짓는데 실수를 저지르고 말다니! 낭만 기사가 아니라 난봉기사였단 말인가!”
벨의 말에 기사 둘이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리고는 여관 밖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아니, 이 새끼가 7권까지 쓸 수 있게 해줬더니!’
벨은 은혜를 모르는 짐승이었다.
신년 벽두 갑자기 등장한 벨과 여덟 명의 기사로 여관은 활기가 넘쳤다.
왜 이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왔나 했더니. 여덟의 기사 중 여섯은 수리아의 호위를 위해 파견된 것이라는 설명.
둘은 원래 벨의 호위였고. 나머지는 네 왕이 직접 뽑아 보낸 것이라고 했다.
헥터의 개짓거리가 이어져 혹시라도 이쪽에 문제가 생길까 안절부절못한 나머지 네 왕의 고육지책이라고 벨과 동행한 기사가 말했다. 수리아의 호위를 위해서 눈꽃 기사 중에 여자로만 뽑아왔다고 했는데, 수리아가 걷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인선.
눈꽃 기사라기에 에반에게 아는 사이인가 물었더니. 책임자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동료라기보다는 후배 같은 느낌인 것 같았다. 책임자도 에반과 비슷한 위치라기에 일단 전부 에반의 휘하로 넣었다.
에반도 일단 명목은 수리아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것이고, 일단은 내 처남이니 책임자로 에반을 뽑을 수밖에….
내가 혈연, 지연, 학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처남이 엮이니 이게 참….
이들의 주둔에 들어가는 비용도 북부에서 부담한다니 조금 과한 선물이긴 했는데, 무력이 필수인 세상에서 무력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일단 감사하게 받았다.
신전으로 물러간 추기경도 성녀를 지킬 병력을 요청했다고 했는데, 마을 주민보다 병력이 많아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상주 병력이 늘어나면 거기에 따라 마을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할 테니 나쁘진 않았다.
원래 기사들이 오면 견습 기사나 몸종 같은 애들도 따라오니까 상주인구는 금방 늘어날 것이다. 북부에서 온 기사들이야 마법 문을 이용해야 하니 본인들만 온 것이지만, 성국에서는 분명 기사가 온다면 견습 기사나 몸종 같은 인원들도 따라올 게 확실하니 말이다.
벨 덕분에 조금 이른 아침이 시작된 바람에 문제가 된 것은 식사였다. 다들 일찍 일어나서 배고픔을 호소해오니 빨리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
더군다나 아홉의 인원이 늘어나서 어제 자기 전에 준비해둔 재료로는 부족해 다른 음식을 급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준비된 아침은 우리 여관의 상징과도 같은 전투식량.
급하게 준비하느라 전투식량을 몇 봉 뜯었지만, 오랜만에 먹는 맛에 다들 별미라는 평가였다.
“밖에서 이런 걸 먹는단 말이죠?”
“죽이 무척 고소하고 맛있어요!”
야전에 나가지 않거나 처음 전투식량을 처음 먹어보는 플로라 같은 아내들은 처음 먹는 맛에 맛있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조금 이른 아침을 먹고 다 같이 홀에 모여서 다음으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선물 확인.
수리아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라는 말에 다들 좋아했지만,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아내들은 모두 실망했다. 심지어 장본인인 수리아조차.
선물을 가져온 기사의 리더도 당황하는 얼굴.
그도 그럴 것이 북부는 아무래도 실리를 중시하다 보니 그런지 선물을 고를 때 남부의 왕 같은 센스가 부족했다.
오우거 힘줄이나 북부 산양의 가죽 북부 대산맥 들소의 뿔 같은 걸 아내들이 어디다 쓴단 말인가. 남부의 왕이 선물해주었던 향유 물들인 천 같은 것을 기대했던 아내들의 떨떠름한 표정.
둘둘 말린 가죽, 힘줄, 뿔 따위를 보고 기대감에 차올랐던 아내들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나 실리를 중시한 북부 왕의 선물을 좋아한 사람은 아니, 드워프는 따로 있었다.
“오오! 이것 보거라 이것이 북부 대산맥에서만 산다는 들소의 뿔이란다. 이걸 불에 달궈 활의 탄성을 늘릴 수 있단다.”
“여보, 강철 늑대 가죽이에요!”
“오오! 이 귀한걸! 아주 상급품이군!”
다시 한번 신이 난 드워프 가족들.
보기만 해도 영감이 떠오르는 재료가 많은 것 같았다. 더군다나 선물에는 북부에서 난다는 특수한 광석을 제련한 금속 주괴도 섞여 있었는데, 노르딕 씨는 저번처럼 주괴를 얼굴에 문지르며 좋아했다.
그 모습에 더욱 떨떠름해진 아내들. 누구의 선물인지 헷갈리는 모습.
그 후에 벌어진 상황은 신이 난 드워프들이 엘프들을 동원해 선물 대부분을 자기들의 집으로 옮겨 버렸고. 그렇게 다 옮기고 나니 더 누구의 선물인지 웃기는 상황이 되었다.
선물 확인에 기뻐 모였다가 어색해진 상황.
그런 분위기를 살린 것은 의외로 벨이었다.
분위기를 살리는데 기여한 것은 벨이 집필한 책 3권. 낭만 기사 시리즈였다.
북부에서 워낙 인기가 좋아서, 필사해서 복사본도 많이 만들었다는데 벨이 가져온 것은 엘프의 책에 자기가 직접 한자씩 적은 필사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토리의 장본인인 나는 받을 자격이 충분한 선물이었다.
원래 원작자에게 나온 책을 선물하는 건 이쪽 업계의 상식 같은 거니 말이다.
제법 도리를 아는지 벨은 책의 첫 장에 나의 친구 이실리엘과 그의 남편 러셀과 그의 다른 두 아내에게 드립니다. 라는 문구까지 써서 가지고 왔다. 물론 문구는 수정되어야 했지만 여섯 아내로….
그렇게 벨의 선물을 받고 여관에서 벌어진 것은 벨의 소설 낭독회.
북부 말은 할 줄 알지만, 글은 모르는 이실리엘과 애니 같은 아내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대표로 리젤다가 벨이 쓴 책을 여관 홀에서 낭독했다.
1권 높은 엘프와 낭만 기사의 사랑.
몇백 페이지씩 되는 긴 책은 아니었고. 벨이 글 쓰는 제주가 좀 있는지. 듣기에 나쁘진 않았다. 이쪽의 미사여구 가득한 그런 느낌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느낌의 글.
전생으로 치자면 조선시대 여염집 여인들이 보는 언문 소설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1권의 내용이 낭독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탄식과 눈에서 흐르는 눈물. 나야 뭐 워낙 벨이 작품에서 미화를 해놔서 좀 부끄럽긴 했어도 그러려니 하고 듣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이실리엘은 공개 능욕당하는 느낌인지, 읽는 내내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벨의 이야기를 통해 두 번째로 부들부들 떨게 된 것은 다음 순번인 리젤다. 리젤다는 자기 이야기에 부끄러움에 떨다 중간에 읽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부 어를 아는 수리아가 대신 넘겨받아 낭독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리아를 통해 리젤다의 이야기가 낭독되다가.
“저, 저도 이정도 권리는 있거든요?”
리젤다가 나에게 첫 키스를 할 때 말했던 멘트가 수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리젤다.
벨의 인터뷰에 너무 성실하게 임했던 것 같았다. 배신과 불신의 눈빛의 리젤다. 나는 최대한 리젤다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소설 낭독회라 말하고 공개 능욕 회라 느끼는 여관 홀의 작은 소설 낭독회는 발레리에 이르러 절정이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알몸으로 운명을 찾아 그곳에 온 것이었다. 그의 것이 되기 위하여”
수리아의 입에서 3권 마지막 내용이 흘러나오자. 들려오는 경악의 목소리.
“바, 발레리야 너 정말 그랬어? 너,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아니, 우리 발레리가 정말?”
플로라의 물음에 배신당한 얼굴로 벨을 바라보는 발레리.
낭독회는 그렇게 두 피해자와 두 가해자를 낳은 채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리젤다 내가 잘못했어. 우리 예쁜 사랑 이야기라서 들려주고 싶었거든.”
“몰라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러셀 바보 멍청이!”
나에게 토라진 리젤다가 위층으로 가버리고.
“바, 발레리양, 내가 최대한 미화해서 쓰긴 했는데 말이지….”
“벨님, 너무해요! 알몸으로 찾아간 이야기를 쓰시면 어째요! 이걸 북부 귀족 여식들이 다 안단 말이죠? 난 몰라! 시집은 다 갔어!”
이미 시집간 발레리가 시집은 다 갔다며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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