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266. 신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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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웜 포트에 누구에게는 반갑지만, 누구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것도 멀리 북부에서….
똑똑
새해 첫날 명절 기분에 취해 엘프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이실리엘의 품에서 달콤하게 자고 있던 나는, 새벽녘 로리엘이 다급하게 노크하는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잠에서 깨 로브 한 장을 급하게 걸치고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자 나타난 로리엘의 얼굴,
“무슨 일이야 로리엘? 하아음… 아직 새벽이잖아?”
졸림에 절로 나오는 하품.
“이실리엘님의 손님이 찾아오셨다.”
“이실리엘의?”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실리엘의 손님이라니. 이실리엘이 아는 인간이 있을 리 만무하니 이실리엘의 손님이 찾아올 곳은 한군데 대수림 뿐이었다.
‘혹시 대수림에서 엘프들이?’
로리엘의 손님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이실리엘과 로브를 걸쳐 입고 빠르게 일 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일 층 홀 입구에 다다르자 달려드는 키 작은 인영.
깜짝 놀라 옆으로 피하자 달려들던 인영은, 나를 지나쳐 내 뒤로 일 층에 내려선 이실리엘의 목에 매달렸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파란색 머리카락.
“이실리엘! 내가 왔어!”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실리엘에게 들소처럼 돌진해 그녀의 목에 매달린 파란 머리의 소녀는 이실리엘의 유일한 인간 친구 벨이었다.
잠깐 안 본 사이 조금 자란 것 같은 모습.
“벨?”
이실리엘의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벨의 대답.
“이실리엘! 보고 싶어서 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야, 넌 어떻게 온 거야 대체? 공작님이 보내주셨어?”
내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실리엘을 끌어안고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누는데 정신이 팔린 벨.
잠결에 벨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또?’ 또 가출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
그러나 다행히도 여관 입구, 벨과 동행한 것으로 보이는 네 명의 인영이 보였다.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자 둘은 익히 하는 얼굴, 북부에서 보았던 벨의 호위였다. 북부에서 보았던 여기사 둘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가출은 아닌 것 같은 느낌.
나는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네 기사가 예를 취해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한 기사의 예로 인사를 해오는 네 명의 기사.
“에삭스의 부마를 뵙습니다.”
처음 듣는 호칭에 움찔하는 순간. 넷의 인사에 내가 수리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수리아가 일단 지금은 공주의 신분이니 내게 부마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맞는 것.
“어, 그, 그래. 어서들 와요. 그런데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실 분?”
새벽같이 찾아온 벨과 네 여기사의 등장에 무슨 이유에서 찾아왔는지를 묻자. 처음 보는 여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부마께 전달하는, 네 왕국의 공식 서한과 축하 편지 그리고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수리아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북부 다섯 왕국에 알려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실리엘과 벨의 인사가 끝나고 우리는 일단 여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각종 서한과 선물을 전달받기 위해서.
처음에 전달받은 것은 네 왕국의 공식 외교 문서. 습격에 대한 사죄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형식적인 서한이었다.
정말 지극히 형식적인… 누가 봐도 형식적으로 느껴질 만한 문구와 내용. 그리고 에삭스의 인장만 쏙 빠진.
읽고 나자 다소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직접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런 형식적인 걸 좋아하는 분들이 아닌 것 같았는데?’
이런 형식적인 사과와는 거리가 먼 분들 같았는데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외교 문서를 읽고 나자 전달된 것은, 각 왕의 축하 편지였다.
두껍게 만 양피지가 네 장. 아무래도 각 왕이 전부 따로 쓴듯한 느낌. 첫 양피지를 펼치자 큰 양피에 나타난 것은.
‘깜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정말로 빽빽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천천히 읽어보자. 왜 그런 외교 문서를 보냈는지의 대한 내용과 진심 어린 결혼 축하. 그리고 하소연이 대부분의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하소연이 한 70 프로?
아주 정중한 말투로 쓰인 편지. 편지의 설명은 그랬다.
공식적 사과가 포함된 외교 문서는 에삭스의 현 왕인 헥터를 압박하기 위한 것.
‘너 때문에 우리가 이런 편지를 보낸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다만 헥터가 자신이 결코 암살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고 발뺌해 그의 인장이 빠진 것이라고 했다.
진짜 전달하고 싶었던 편지는, 아마 각 왕의 편지였던 듯했다.
다른 세 편지도 비슷했다. 다섯 왕국 연합에 똘아이가 하나 등장해 머리가 아프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내용과 진심 어린 결혼 축하 그리고 수리아와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자신들은 공식적으로 수리아를 지지하겠다는 내용.
고마운 말이긴 했지만 그것은 신혼을 즐긴 나중에나 생각해 볼일.
편지를 다 읽고 물었다.
“답장도 드려야 합니까?”
“아뇨, 저희가 수정구를 가지고 왔으니 내용만 전달해주시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짤막하게 답장을 전달했다.
“따듯한 축하에 감사하고, 제안은 감사하지만. 때가 아직 이르다고만 전달해주시길.”
“예, 알겠습니다!”
기사의 절도 있는 답변이 끝나고 이어진 것은 결혼 축하 선물 전달. 다섯이라는 다소 단출한 인원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
밖에 마차가 3대나 서 있었다.
북부산 특산물로 가득 찬 마차. 마법 문으로 옮기는 데만도 한참 걸렸을 것같은 양이었다.
목록을 받아보자 노르딕 씨가 보다가 기절할 것같은 재료들이 많았다. 오우거 힘줄이라든지. 특별한 몬스터의 가죽, 뿔 등등.
일국의 공주가 결혼하는 것이니. 아마 평소대로라면 에삭스에서 수리아에게 챙겨주어야 했을 선물이지만. 싸가지 없는 헥터가 선물 대신 암살자를 보낸 상황이니. 남은 네 명의 왕이 대신 십시일반 거들어 챙겨준 것같은 상황. 북부 왕국의 의리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네 왕국의 성의를 보니. 아까 답장을 전달했던 기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잘 전달해 달라고 거듭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물건을 여관 안으로 들이기 시작하자. 벨 덕분에 일찍 아침을 시작해버린 인원은 우리만이 아니었던지. 사람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 식당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여관에서 자던 사람 대부분이 깨버리고 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벨의 등장이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처남인 에반 이라던가 말이다.
“아니, 대체 왜?”
벨을 본 에반의 첫 반응.
한동안 벨의 가출로 인해 시달렸던 에반은 그녀를 보자마자 질색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에반을 더 경악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벨이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겠다는 통보를 해 온 것.
“공식 서한만 전달하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온 김에 푹 쉬다 가려고 말이지. 북부는 지금 겨울이 아닌가. 따듯한 남쪽에서 좀 쉬다 가려고.”
“예?”
남부로 피서를 왔다는 벨의 말에 에반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선물 확인이 끝나고 옆에서 이실리엘과 이야기만 하는 벨에게 물었다. 피서만 왔다기엔 녀석의 목적이 너무 희미했다. 호기심쟁이 벨이 고작 피서에 움직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내 물음은 녀석의 진짜 방문 목적을 확인하기 위한 것.
“근데 벨 너는 왜 온 건데?”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난 표정으로 외치는 벨.
“나는 4권 집필을 위해, 그러니까. 낭만 기사와 왕녀의 사랑 이야기의 결말을 직접 듣기 위해왔다!”
글을 쓰기 위해 취재를 왔다는 벨.
벨이 내 이야기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녀에게 들어 알고 있는데, 낭만 기사와 왕녀의 사랑 이야기 4권이라면, 아마 수리아와 내 이야기의 결말을 듣고 싶어서 온 모양이었다. 아마 아버지를 통해 내가 왕녀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듣고 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 정말 호기심이 왕성한 녀석이었다.
“그래 가출한 것만 아니면 되지….”
벨의 아버지인 공작님을 떠올리며 쓸쓸한 미소를 짓자 벨의 뒤에 시립 한 기사들이 나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기사들의 표정을 보니 아마 공작님이 그냥 보내주시진 않은 모양이었다.
‘벨이 단식투쟁이라도 했나?’
벨이 과연 어떻게 공작님께 승낙받았을까 궁금함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나와 수리아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기쁨에 참을 수 없었던지 갑자기 벨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암살자와의 전투도 벌어졌던 것이냐? 수리아 왕녀님의 목숨이 위험했다던데, 본인에게는 죄송하지만. 글 쓰는 처지에서는 가장 참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냐!”
“진정해! 나중에 틈을 내서 다 말해줄 테니까…”
나는 흥분에 어쩔 줄 모르는 벨을 급하게 진정시켰다. 그러자 혼자 도취해 부르르 떠는 벨.
“이제 나의 장대한 글이 4권으로 끝이 나겠군! 하하!”
아마 이 초보 작가는 4권으로 완결을 내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4권이면 딱 중간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가 아닌가.
나는 벨에게 웃으며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벨, 그거 7권까지 써야 결말이 날 것 같은데?”
“7권? 왜 7권이냐? 아내 한 명마다 한 권씩 쓰고 있으니. 네 권이면 끝이 날…. 서, 설마?”
벨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실리엘을 바라보자. 이실리엘이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에게 쏠리는 시선. 벨 그리고 벨과 동행했던 네 기사가 넋 나간 듯 나를 바라봤다.
‘아니 고작 4권으로 어떻게 밥 먹고 살려고. 작가면 모름지기 7권 정도는 내야….’
벨은 자신이 7권짜리 작가가 된다는 사실에 넋이 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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