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 264. 신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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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떠오르는 태양에서 흘러든 빛이 창문 틈으로 밀려들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지평선 위로 머리를 살짝 밀어 올리는 첫 태양.
매일 보는 태양이지만 오늘의 태양은 어제의 태양과 조금 다른 태양이다. 왜냐하면 새해 첫 태양이니까 말이다.
한 달 50일 일 년 10달이라는 이 세계의 신년이 시작되는 것이다. 전생이라면 어제 제야의 종소리도 듣고 샴페인에 아내들과 파티라도 벌였겠지만, 이쪽은 그런 문화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날의 연장일 뿐.
혼자 새해 첫 태양을 보면서 감회에 사로잡혔다.
지나 보낸 날들의 추억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내 지난 삶의 소회에 떠오른 것은 대부분 작년의 일.
내가 15년 동안 모험한 기간에 겪었던 일보다 작년 한 해에 겪었던 일들이 더 파란만장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일 년 사이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 년 동안 일곱 아내와 결혼한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해.’
그래 나는 작년에 무려 일곱이나 되는 아내와 결혼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한 배경을 가진 아가씨들과 말이다. 높은 엘프를 시작으로 북부 귀족의 딸, 거상의 막내딸과 그 언니, 전 이단심문관 현 성녀, 북부 다섯 왕국의 왕녀, 그리고 그냥 여관 여급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만큼 다양한 성격 다양한 외모 다양한 종족.
그녀들과 만나는 순간부터 결혼까지 작년에 정말 파란만장한 순간들을 보낸 것이다. 그래도 심각한 일들은 이미 작년에 다 처리했으니 올해는 일곱 아내와 평화로울 것이다.
물론 그 평화는 나의 손에 달려있지만 달이다.
남들은 부러운 투정이라 생각하겠지만 일곱에게 골고루 사랑(?)을 나눠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들에게 주는 사랑의 균형이 깨진다면 누군가는 서운해지니 말이다.
신년의 첫 태양을 바라보며 소회에 잠깐 잠겼다가 아침 시간이 다가와 얼른 준비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섰다.
아래층으로 내려서자 들려오는 행운의 일곱 럭키 세븐들의 목소리.
“러셀, 잘 잤어요?”
“자기, 어서 와요.”
“러셀, 오늘 아침은 뭐할까요?”
“러셀님, 잘 무주 셨습니까?”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인지. 새해 첫 태양을 바라보며 소회에 잠겨. 일곱의 아내로 작년에 일어났던 일에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지만, 정작 이렇게 아내들의 얼굴을 보면 얼굴에 자동 적으로 미소가 떠오르게 된다.
“응 다들 잘 잤어?”
내 인사에 미소 짓는 아내들. 여관 홀이 밝아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아내들과 인사를 하자 뒤에 있던 사리나가 재빠르게 다가와 인사를 해왔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부탁하신 것은 다 준비해두었습니다.”
사라나의 안내로 부엌에 들어서자 대형 솥 위에 올려진 찜기에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년이라는 말에 어제 물레방앗간에서 쌀을 두 포대나 빻아왔다.
두 포대라면 얼마 안 되네 생각하겠지만 이곳의 한 포대는 엄청난 크기. 전생으로 치면 50킬로도 넘는 양이다. 그러니 총 백 킬로 정도의 쌀을 빻아 준비했다.
쌀을 빻은 이유는 새해 음식을 해 먹기 위해서. 신년에 떡을 해 먹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러셀,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어제 한번 시범을 보이긴 했었는데, 뒤에서 애니가 잘된 건지 확인해보라고 재촉해왔다. 지금 대형 찜기에서 쪄지고 있는 떡은 백설기.
흰 쌀가루 사이사이에 말린 과일과 견과류를 넣고 찌는 중이다. 백설기 정도는 집에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떡이기에 아침 일찍 준비해달라고 사리나와 애니에게 부탁을 한 것.
요 며칠 애니와 사리나는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하고 붙어 다니면서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애니에게 사리나가 예전에 암살자였고 젖가슴 살인마라는 악명을 보유했던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이상하게 더욱 친해졌다.
가슴 큰 여자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겨 복수심에 시작된 살인이었다는 말에 애니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 뺏기면 죽이고 싶긴 하지…. 특히 가슴 큰 년한테는… 딱해라…”
뭔가 애니의 내면이 반영된 느낌.
‘애니 가슴도 작진 않은데 더 큰 여자라면 발레리?’
발레리에게 순서가 밀렸을 때 애니의 감정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말이었다.
아무튼 그 후로 애니가 사리나를 끼고 다니면서 여관 일도 이것저것 가르치고, 발레리를 통해 옷이나 필요한 것도 사다 주며 아주 동생처럼 아끼는 중이다.
오늘도 둘이 아침 일찍 일어나 같이 백설기를 준비했으니 말이다.
애니의 백설기를 확인해보라는 재촉에 찜기를 살짝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 이쪽에 전생하고 처음 맡아보는 백설기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
백설기가 찜기 안에서 맛있게 쪄지고 있었다.
“응 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맛있을 거야.”
백설기는 체에 곱게 친 쌀가루에 소금, 설탕으로 간하고, 물을 조금 섞어서 말린 과일과 견과류 조금 넣고 찌기만 하면 되는 음식이니. 나에게 그간 요리 전수를 틈틈이 받아왔던 애니에게는 아주 쉬운 음식.
그렇게 쪄지고 있는 찜기는 세 개. 두 개는 백설기가 아니라 그냥 쌀가루를 찌고 있다. 요건 그냥 떡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벨릭 이놈은 왜 안 보여?”
“좀 전에 에반님이랑 노르딕 씨의 집에 러셀이 부탁한 거 받으러 갔어요.”
벨릭과 에반, 마틴은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날 것을 명령했다. 매일 쇠질. 이곳에서는 돌로 만들었으니 돌질만 하는 녀석들의 근육을 써야 할 때가 왔기 때문.
언제쯤 오나 밖으로 나서자 멀리서 떡메와 나무판을 든 벨릭과 에반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로는 드워프 가족들도 따라오는 모습.
작은 드워프들은 너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고 있지만 뭘 하나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
“러셀님! 준비는 잘 되었습니다.”
노르딕 씨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제 아침 내일이 신년이라는 시트라의 말에 급하게 부탁했는데 준비가 잘된 것 같았다.
여관 앞마당에 큰 가죽을 한 장 깔았다. 그리고 위에 노르딕 씨가 만들어온 나무판자를 하나 올리고 큰 솥에 찌고 있던 쌀가루를 가져와 판자 위에 엎었다.
솟아오르는 뜨거운 증기와 고소한 냄새. 드워프 꼬맹이들의 군침 삼키는 소리.
나는 에반과 벨릭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너희들 손에든 그걸로 이 반죽을 번갈아 가면서 내려치는 거야 알았지? 그러면 내가 틈틈이 기름을 바를 테니까.”
참기름이 없는 게 아쉽지만 여기서 제일 고소한 너트류를 볶아 기름을 내놨으니. 참기름은 이걸로 대신하기로 했다.
뜨거운 반죽을 재빠르게 손으로 만지며 가운데로 모았다.
“아 뜨겁네! 이거! 자 빨리 내려쳐!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반죽을 뭉갠다는 느낌으로.”
그리고 첫 떡메가 내려쳐졌다.
떡
떡
처음 해보는 떡메질인지라 벨락과 에반이 서로 박자를 못 맞춰 좀 더디긴 한데 그래도 떡은 뭉쳐지고 있었다. 둘의 떡메가 내려치는 중간중간 기름 바른 손으로 떡을 잘 추스르는 것이 나의 일.
그렇게 에반과 벨릭이 몇 번이나 내리쳤을까.
노르딕 씨가 참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말했다.
“크흠… 그거 그렇게 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두 놈이 처음 해보는 떡메질이 서툴긴 했다. 떡메끼리 서로 부딪칠 뻔도 하고 말이다.
노르딕 씨의 중얼거림에 벨릭이 말했다.
“한번 해보시겠소? 이게 쉽지 않은데?”
그러자 노르딕 씨가 기다렸다는 듯 나서며 말했다.
“줘보시오. 내가 한번 해볼 테니.”
떡메를 받아든 노르딕 씨는 이런 일에는 손발이 맞아야 한다면서 에반의 떡메도 빼앗아 자기 아내 그리나 씨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손을 씻고 온 노르딕 씨의 딸인 스나졸린이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러셀님 제, 제가…”
활달한 성격의 드워프치고는 무척이나 조용한 스나졸린인데,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니 비켜줄 수밖에. 손 조심하라고 말하며 물러서자 스나졸린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작된 드워프의 떡메질.
처음 몇 번은 벨릭과 에반의 호흡과 비슷했다. 몇 번. 그러니까 세 번쯤?
떡 떡 떡 떡 떡 떡
그리고 뭔가 전문적인 손길이 느껴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이차!”
“어이차!”
딱딱 맞아떨어지는 박자. 그리고 추임새.
중간중간 스나졸린 양이 기름 바른 손으로 스피디하게 떡 반죽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떽메가 교차하는 게 빨라서 틈이 보이지 않는데 스나졸린은 그게 보이는지 아주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댔다.
순식간에 뭉쳐지기 시작하는 반죽. 찰진 느낌이 생겨나는 떡 반죽.
벨릭과 에반이 드워프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들도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재미나게 구경하는 모습.
노르딕 씨는 여유가 있는지 반죽을 보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단조작업이랑 비슷한 느낌이네요. 허허”
생각해보니 그랬다. 우리 드워프들은 쇠를 두드리는데 전문가. 생각해보니 단조작업도 박자를 맞춰가면서 두드리는 것이고 떡메도 비슷한 느낌.
단조작업이라면 한 명이 쇠를 붙잡고 둘이 두드리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러했던 것.
‘박자 맞춰 두드리는데 전문가들이 여기 있었네?’
쇠질만 해서 덩치만 커지고 쓸모없는 놈들은 부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드워프들의 전문적인 떡메질에 잘하면 새로운 사업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름은…
‘드워프 떡 방앗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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