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263. 자발적 노예 6
* * *
놓친 고기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쟁반에 음식 몇 가지를 챙겼다.
저녁을 도우러 온 발레리에게 물어보니 플로라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것. 아까 울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온종일 울었다고…
발레리가 식사하고 씻으러 간 사이 플로라의 식사를 챙겨서 삼 층으로 향했다. 발레리가 씻으러 간 틈을 노린 것은 플로라와 발레리가 같은 방을 쓰고 있기 때문. 아무래도 동생이 있으면 불편해서 할 말도 못 할 것 같아서 발레리가 없는 때를 고른 것이다.
끼이익
삼 층 발레리와 플로라가 같이 쓰는 방.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노크하면 또 못 들어오게 할지도 모르니 조용히 들어간 것.
방안은 어두웠다. 이미 해는지고 달이 조금씩 떠올라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만이 가득한 방안.
방안 가득 발레리와 플로라의 향이 섞여 어우러져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큰 가슴 때문인지 왠지 달콤한 우유의 향 비슷한 것으로 가득한 방안.
벽을 보고 돌아누운 플로라.
테이블에 식사를 내려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걸터앉자 움찔하는 모습. 아마 내가 발레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
스륵
이불이 끌어 올려져 플로라의 얼굴이 가려진다. 어두운 밤에도 명확하게 보이는, 흰 시트 사이에 물결치듯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
한 손을 조용히 그녀의 머리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창밖에 달이 하나 더 떠올라 방안이 조금 더 밝아올 때까지.
플로라는 애니처럼 내 손을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어떤 말을 해오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있을 뿐.
다행스럽게 울음은 이미 그친 것 같았다. 훌쩍이는 소리도 서러움에 찬 흐느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 머리만 쓰다듬고 있을 때.
달칵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언니, 아직도 기분이 별로야? 어? 러셀? 언제 와있었어요?”
발레리가 목욕을 끝냈는지 발그레한 얼굴로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가 침대에 걸터앉은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아 플로라 밥 좀 먹이려고 가지고 올라왔는데, 아직 기분이 별로인 것 같네.”
“아직도요? 흐응….”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된다는 발레리의 음성. 아까 부엌에서 이야기했을 때도 ‘좋은데 왜 울지?’라는 반응이었으니까.
“언니, 식사하지 않을래? 배고프지 않아? 러셀님 보고 먹여 달라고 할까?”
“…”
아직도 예전 무급 노예일 적 버릇을 못 버리고 가끔 러셀님 이라고 부르는 발레리. 그냥 러셀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버릇이 들어 힘들다나?
발레리가 등불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방은 더한층 밝아졌다.
“언니?”
발레리가 몇 번 등을 흔들어보지만 반응 없는 플로라.
발레리는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것같은 표정을 짓더니. 테이블에 놓아둔 등불을 다시 주워 들고는, 비치는 등불 위에서 암흑가 보스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러셀님, 그럼 제가 오늘은 러셀님 방에서 잘 테니. 러셀님이 언니랑 자요.”
발레리의 말에 파르르 떨리는 플로라. 발레리가 동생이라지만 이미 발레리는 유경험자. 그녀는 과감하게 자기 침대로 가 베개를 끌어안더니 등을 들고 그래도 사라져 버렸다.
삐걱
그대로 닫히는 문.
등을 가지고 가버린 발레리로 인하여 다시 방 안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조용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 소리는?!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지는 정체불명의 소리. 규칙적으로 울리는 이 소리의 정체는 뭔가를 기대한 처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분명했다. 조용한 방에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이러다 심장마비 걸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소리.
플로라가 덮은 이불 사이로도 기묘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위로하러 왔는데 장난이 치고 싶어지는 상황. 혼자 기대하고 혼자 놀라서 심장을 어쩌지 못하는 플로라를 대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무척 선수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연애 한 번 못해본 처녀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크흠…. 자야 하니. 옷을 벗을까?”
파르르 떨리는 이불.
옷을 벗는 척 부스럭거리고 침대 옆에 눕자 플로라의 반응은 극에 달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이불. 천천히 이불을 들추니 들려오는 목소리.
“오!”
“오?”
“오늘은 안 돼요!”
‘오늘은 안되면 나중에는 된다는 거네?’
“뭐가?”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플로라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나는 그녀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난 플로라.
플로라가 팔을 뻗어 나를 밀어낸다.
아까 고백하고 나서 간신히 다시 대하는 얼굴. 달빛 속에 플로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데 플로라는 어디 가고 나타난 것은, 그러니까 붕어? 여태 낚시하다 와서 그런지 다 붕어로 보이나? 그러나 눈을 비비고 아무리 봐도 붕어.
아까 낚시에 너무 심취했나? 다시 눈을 비벼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붕어였다.
참을 수 없는 모습. 그 얼굴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온종일 울었다더니 평소의 고양이상의 미녀는 어디 가고, 웬 붕어 한 마리가 앉아있는 모습.
“풉…. 프하하”
“흐응?”
내 폭 속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내가 끅끅거리며 계속 웃자. 잽싸게 침대 아래로 뛰어 내려간 플로라가 상자에서 구리로 된 거울을 꺼내더니. 자기 얼굴을 비춰보고는 절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붕어지.’
“우, 웃지 마요!”
얼굴을 가리고 울상을 짓다가 내가 하도 웃으니, 내 위에 올라타 내 입을 막는 플로라. 인상 쓴 플로라의 얼굴이 계속 눈에 들어와 끅끅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으니 진정되는 마음.
“끄흡. 하아… 하아…”
“자기는 정말…”
웃다 지쳐 침대에 널브러지자 들려오는 심술 난 플로라의 목소리. 내 위에 걸터앉아 씩씩대는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어… 이게… 그게…”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던 듯.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목소리를 내는 플로라. 나는 그녀를 조용히 품에 끌어안았다.
가슴이 크면 딱 하나 단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안을 때 밀착할 수 없다는 것. 가슴이 자꾸 밀어내는 통에 중간에 공간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끌어안아 밀착하려 해도 플로라의 가슴이 나를 밀어내는 상황.
그녀의 가슴이 나와 그녀 사이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살려달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왜 울었는지를 물었다.
“아까 왜 울었어? 깜짝 놀랐단 말이야.”
그녀를 품 안에 넣고 달래자. 플로라가 아까 울었던 이유를 천천히 알려주었다.
둘째 부인이었던 플로라와 발레리의 친엄마 암살 사건. 엄마의 발레리를 부탁한다는 유언. 엄마가 돌아가신 후 따듯하게 대해주는 사람 하나 없던 집. 무희가 되기 위해 잦은 가출로 싸늘한 식구들의 시선 같은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말이다.
내 아내가 되겠다는 것도 엄마의 유언을, 발레리를 지키기 위함이 많은 이유를 차지했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각오했던 바였는데, 예상 못한 나의 배려와 따듯한 말에 마음이 갑자기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
나는 형제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언니의 무게가 그녀에게는 큰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발레리 지키는 건 플로라가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앞으로는 내가 지킬 거니까. 알았지? 여긴 남부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니까.”
용이라도 오면 모를까 군대를 끌고 와도 걱정 없는 곳이 이곳이니까 말이다. 내 말에 플로라가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렁그렁한 눈물 맺은 눈으로 말했다.
“아까 대답은 ‘좋아요.’ 에요.”
나는 붕어의 주둥이에 조용히 입을 맞추어 주었다.
어젯밤에는 플로라와 손만 꼭 잡고 잤다. 씻지도 않았고 얼굴도 엉망이라 안된다나? 플로라도 애니와 같은 말을 했다.
“나, 나도 예쁜 모습으로 안기고 싶단 말이에요!”
안 씻어도 씻어도 둘 다 예쁜데 말이다. 붕어는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긴 하지만. 결국 다음을 기약한 플로라를 안고 잠만 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새벽잠에 빠져있을 때. 새벽의 안개를 헤치고 에밀이 일찌감치 나를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나 아주머니가 부엌 화로에 불을 넣기도 전, 정말 이른 아침.
여관 불침번인 로리엘이 방문을 두드려 나를 깨운 것이다. 내방으로 찾으러 갔다가 발레리와 함께 나를 찾아온 모습.
플로라의 품에서 깨. 부스스한 얼굴로 홀로 내려갔다.
여관 입구에는 에밀이 밤새 경계 근무를 지휘하고 바로 뛰어온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깨며 옷이 새벽이슬을 잔뜩 머금은 모습.
“러셀, 헉헉….”
숨을 몰아쉬는 에밀. 뭔가 엄청 다급한 얼굴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 부족원이 되고 싶다는 엘프들이 있어서….”
‘아하! 그리로 찾아가셨구나?’
어제 마지막에 반응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내가 아니라 에밀을 찾아갔던 모양이었다.
낚시에 걸리지 않고 살림망에 직접 뛰어든 녀석들.
웃으며 숨을 헐떡이는 에밀이 있는 여관 밖으로 걸어 나가자 에밀의 뒤에서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다섯 엘프. 저 표정은 아마도 족장이 이실리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
어젯밤에 낚아 올려오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침부터 에밀을 찾아가 부탁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인간인 내가 족장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테고 이실리엘에게 직접 말하기는 부담스러우니 평원 엘프이고 부족장이라는 에밀이 만만하긴 하겠지.
“어이쿠 부족 가입을 희망하는 엘프들이라…. 반갑습니다. 족장인 러셀입니다.”
다섯 엘프가 자기들의 입을 가리고 경악했다.
자발적 노예는 언제나 환영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