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260. 자발적 노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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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으로 플로라를 혼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고.
나의 부탁을 받고 멀어지는 사리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에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일단 사리나와 발레리에게 맡겨두었으니. 에밀을 만나고 와서 나중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니. 지금 찾아가 봐야 문 닫고 안 만나줄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싫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너무 감동? 감격한 느낌이랄까? 그간 너무 밀어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대성통곡은 정말 예상외인데….’
플로라에 대해 생각하며 그렇게 천천히 평원 엘프 구역으로 들어서자 나를 보고 인사를 해오는 엘프들.
“러셀! 어디 가세요?”
“아! 러셀님!”
“응 에밀을 좀 만나려고. 다들 건강해 보이네.”
엘프들이 심어놓은 작은 과수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드워프네 꼬맹이들이 엘프들에게 안겨 노는 것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에밀의 집.
노크하려고 손을 문 쪽으로 가져가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오늘도 힘내주세요. 자매님들.”
“네! 힘내자고요!”
벌컥
그리고 갑자기 열리는 문. 안쪽에서 걸어 나온 것은 네 명의 엘프. 그녀들은 나를 발견하더니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어? 러셀님?”
“어? 진짜 러셀님이시네?”
“여긴 어떻게?”
아마 안에서 경계 근무 투입 전 회의라도 했던 모양. 에밀은 대장 직책 하나 달아주고 난 후 상당히 의욕적으로 되었다. 역시 사람이나 엘프나 감투를 씌워줘야 하는 것. 자리가 사람을 아니, 엘프를 만드는 것이다.
엘프들에게 에밀을 찾아왔다고 방문 목적을 알렸다.
“다들 반가워. 아 오늘은 에밀 좀 만나러 왔어.”
“아 그렇군요. 에밀, 러셀 씨 오셨어!”
제일 앞쪽의 엘프가 뒤돌아 소리치자. 안쪽에서 엘프들을 비집고 나타나는 에밀. 역시 날 보고 강아지같이 반가워하는 녀석.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이다.
“러셀, 어서 와! 그런데 어쩐 일이야? 자매님들은 어서 준비하고 나가세요. ”
“아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응 들어와! 들어와!”
에밀의 초대에 오두막이 지어지고 처음으로 에밀의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엘프들의 오두막은 네 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게 지어진 공간이다. 모두 각자 집을 지어줄 수도 없고, 수용소처럼 대규모로 집단생활을 하게 할 수도 없어서 넷에서 여섯 정도 쓸 수 있게 만들어진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안쪽에 네 개의 침대가 나란히 배치되어있고, 테이블 하나와 의자 네 개 그리고 개인 사물함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낡은 오크통 네 개로 이루어진 단출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사병 막사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마음에 올라오는 불편함.
“러셀, 차줄까? 아니면 강변에서 딴 평원 딸기가 있는데 잠시만.”
“아니야 그냥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앉아봐.”
“그, 그래?”
뭐 좀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반대편에 앉는 에밀. 왠지 긴장하는 모습. 나는 에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최대한 친절하게 물었다.
“긴장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러 온 것뿐이니까. 아, 참. 그전에 혹시 뭐 필요한 것이나 불편한 점 없어? 에밀뿐만 아니고 평원 엘프 친구들 모두.”
나는 일단 물어보려던 것을 뒤로하고 근황과 애로사항을 물었다.
군대 막사 같은 에밀의 오두막을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자기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은 모든 동물의 기본적인 욕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보금자리를 꾸민다는 것은 단순히 예쁘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금자리에서만큼은 안락하고 보호받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맹수, 새, 심지어 물고기까지. 어떤 동물에게서도 우선 가는 욕구. 그런데 에밀의 집에는 안락함과 포근함이 없었다.
초기에 정착을 지원하고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은 이유도 조금씩 자신들의 물건을 자기들의 손으로 마련하고, 마을이나 집에 애착이 생기라는 의미도 조금은 있었는데, 이건 처음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 모습.
얘들이 돈이 없진 않다. 그동안 전투식량에 쓸 가죽을 무두질해주면 사례비를 주었고, 그녀들이 사냥해온 가죽은 팔아서 평원 엘프들의 몫으로 넘겨주고 있었으니.
생각해보니 그런데도 그걸로 뭘 사는 것 같지도 않고. 필요한 게 분명히 있을 텐데 딱히 부탁하는 예도 없었던 것. 그렇다고 엘프들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란 폴에 갈 때 따로 무언가를 부탁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것은 에밀의 집안에 들어서자 더욱 명확해졌다.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집안.
북부의 엘프 마을에서 접했던 엘프의 집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뭔가 자연과 어우러진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 에밀의 집은 어딜 봐도 군 막사. 아니 군 막사도 이렇게 삭막하진 않을 것이다.
말로는 마을에 정착하게 해줘 감사하다고 하지만 이건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아무래도 큰 사건의 영향 때문일까? 뭔가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마음에 평안을 얻으라고 따로 모아두었는데, 피해자들끼리만 모아두어서 그런지 사는 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 피, 필요한 거?”
말을 더듬는 에밀 뭔가 필요한 게 있는데 말을 못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간 지내오면서 느낀 건 에밀이나 평원 엘프들은 성격상 또는 종족 특성상 아니면 우리가 구해준 은혜 때문인지 우리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 한다는 것.
애밀은 무척이나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미, 미안한데. 러셀. 우, 우리 무, 물레랑 베틀 하나 얻을 수 있을까?”
“물레랑 베틀?”
물레라면 실을 만드는 것이고 베틀이라면 천을 만드는 것.
‘천을 만들려고 하나? 천이 왜 필요하지…. 어?’
생각해보니 처음에 마을로 왔을 때 평원 엘프들은 옷 한 벌도 없이 알몸으로 마을에 도착했었다. 기사들의 망토나 모포를 빌려 걸친 알몸이었던 것.
부랴부랴 그란 폴에서 입을 옷을 구해다가 입히고, 여벌로 한 벌씩 더 주긴 했는데 그 이후에는 신경을 못 썼던 것. 발레리에게 틈틈이 필요한 것을 확인해 구해주라고 했는데, 미안해서 아마도 여태 이야기 못하다가 직접 만들어 입을 생각인 것 같았다.
이쪽에서 평민들이 입는 옷은 대부분 양모나 리넨으로 짠 천으로 만든 것이다. 나일론 같은 합성 섬유가 없으니 잘 해질 수 있는 것.
아마 그때도 새 옷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급하게 중고 옷을 대량으로 사다 나누어 준 것이니. 아마 옷이 낡아 해지거나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엘프들이 가죽옷을 계속 입고 다닌 이유가 있었던 것. 가죽이야 엘프들이 직접 사냥해서 무두질까지 하고 가벼운 갑옷 느낌으로 만들어 입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상은 옷이 해지고 천이 없었기 때문.
“아! 옷이 낡았구나? 그렇지?”
“으, 응… 미, 미안해 러셀…”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에밀. 아무래도 확실한 관계 정립이 확실히 필요해 보였다.
예전에 에밀이 나무를 심고 싶다는 말에 생각 없이 허락했다가 엉겁결에 족장 비스름하게 돼버리고 말았는데, 그 후에 내 쪽에서 명확하게 엘프와 수인들을 모아두고 내가 족장이니 다 내 말을 따라라 한 것도 아니니 얘들도 내 눈치를 보고. 나도 어색해 마을 경계 외에는 얘들을 수족처럼 부리지 않으니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같았다.
그저 소소하게 여관주인이나 하다 늙어가긴 글렀으니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에밀, 에밀의 족장은 누구지?”
“그, 그야 러셀이지.”
더듬으면서도 내가 족장이라고 인정하는 에밀.
“엘프 마을에서는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해?”
“그야, 마을 회의를 열거나 족장님에게…”
이쪽 마을 공동체들은 엘프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대부분 느슨한 공동생활을 하는 편이다. 각자의 노력에 의한 농사, 채집이나 사냥물은 각자 가져갈 수 있지만, 일부는 자기 마음에 따라서 마을을 위해 내어놓기도 하는 그런 느슨한 공동생활 말이다.
특히 귀한 고기나 빵을 굽는 화덕, 물레방아 같은 것은, 공동으로 관리하고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걸 지휘할 존재인 촌장이 마을에 필요한 것이고 촌장의 권한이 큰 것이다.
엘프 마을의 족장은 결국 촌장.
“나는 인간 족장이라서 나에게 말 못하는 거야?”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우리는 목숨을 구해준 이실리엘님과 러셀에게 은혜를 갚을 거야! 러셀은 영원히 우리 족장이야!
화들짝 놀란 얼굴로 부인하는 에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다. 아마도 의심한 게 못내 속상한 표정. 그래도 조금 단단히 이야기해둘 필요가 있다.
내 부족원 내 엘프들인데 이런 식으로 사는 건 안 되니까 말이다.
“내가 이실리엘에게 말해서 확실히 평원 엘프들을 모두 부족으로 한 식구로 받아주자고 할 테니까 앞으로 이렇게 필요한 게 있으면 확실히 말해. 알았어?”
“으, 응”
에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근도 하나 물려줬다.
“그리고, 애밀은 이제 부족장이니까 사람들이 필요하거나 불편한 걸 다 파악하고 있다가 나에게 알려줘야 해 알았지?”
“내, 내가 부족장? 하 하지만 나는 순찰대장을…”
“둘 다 잘할 수 있지?”
“으, 응 무, 물론이지!”
에밀은 혼잣말로 ‘내가 부족장 내가 부족장’이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잘못하면 다른 엘프 시킬 거야. 잘해야 해!”
“응! 알았어!”
에밀이 부족장이라는 단어의 울림을 잔뜩 만끽하게 두었다가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찾아온 진짜 목적을 물었다.
“오늘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지. 여관에 손님으로 다른 엘프들이 왔는데, 걔들이 이실리엘한테 어쩔 줄 몰라 하더라고, 그거 이유를 알고 싶어서 왔는데. 북부에서는 그냥 엘프들도 마을 높은 분 느낌으로 대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걔들은 뭐랄까? 섬긴다고 해야 하나? 무슨 왕족 만난 느낌이라서 말이지.”
내 물음에 에밀이 뭔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이실리엘님은 높은 엘프님이잖아?”
‘아니, 그건 저도 아는 사실이고요.’
“아니, 높은 엘프라도 좀 과하달까? 너희들은 안 그러잖아?”
“그야 높은 엘프님인 이실리엘님에게서는 흘러나오는 정령력은 처음 대하면 자신도 모르게 이것이 어머니 나무의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 등에 메고 계신 활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랑 같으니 아마 맞을 거야. 우리가 어머니 나무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걸 대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행복한 느낌도 들고 그러거든.”
시트라가 평원 엘프들이 정신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었는데, 엘프들이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있었구먼?
여관에 손님으로 온 다섯 엘프의 행동과 에밀들이 행동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같이 지내 이실리엘의 기운에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고, 지옥 같은 상황에서 구해진 상황에 너무 감사해서 감히 이실리엘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 목숨까지 구해주셨는데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해서 최대한 이실리엘을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라나?
이어진 에밀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이실리엘이 근처에 오면 자연스럽게 이실리엘을 느낄 수 있고. 정령력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난다는 것.
마치 세계수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이실리엘을 거쳐서 나오는 느낌이라는 것.
오호라!
‘어머니 나무는 기지국, 높은 엘프는 와이파이 같은 거구나? 이거 잘하면?’
무료 와이파이 홍보를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식당이나 모텔은 와이파이 공짜니까. 그리고 평원 엘프들의 현 상황과 대충 잘 엮으면 뭔가 될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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