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259. 자발적 노예 2
* * *
말도 안 되는 애니의 오해를 풀고.
오랜만에 애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었다. 그래봐야 미음이지만 말이다. 이틀이나 굶고 위와 장도 문제가 생긴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고작 미음.
그래도 이틀 만에 먹는 애니가 만든 미음은 꿀처럼 달고 고소했다.
‘아! 오전에 시트라가 먹던 죽 한입 하긴 했지.’
생각해보니 이틀만은 아니었다. 아침에 시트라가 먹는 죽을 한입 한 것이 기억 난 것.
미음을 다시 한입 입에 넣고 옆에 앉은 시트라를 바라보았다. 시트라의 무슨 일이냐는 표정. 나는 대답 대신 슬쩍 웃고 미음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트라.
시트라는 처음에는 내 행동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가 얼굴빛이 점점 끓어오르는 토마토 스튜처럼 변해버렸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말없이도 통하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이것이 진정한 부부!
죽을 꼭꼭 씹어 삼키고 시트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침에 죽 맛있었어.”
내가 아침에 저지른 만행에, 죄인을 잡으러 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옆에 차가운 얼굴로 앉아있던 시트라는 못 참겠는지 곧장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아침에 쌓은 원한이 하나 해결된 것.
그러나 아침에 쌓은 원한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사라지니 다시 하나가 등장했다. 어디선가 등장한 플로라가 시트라의 자리를 꿰차고 옆에 앉아 쫑알대기 시작한 것.
“자기, 아침의 그 남자답고 대범한 손길! 플로라 깜짝 놀라버린 거 알죠?”
밥 먹는 내내 옆에 쫑알대는 플로라. 딱히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쫑알대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저까지 빼앗아 죽까지 떠먹여 주고 말이다.
그렇게 플로라가 떠먹여 주는 미음을 든든하게 먹고, 가슴을 만졌다고 쫑알대는 플로라에게 데이트를 제안했다. 목적지는 에밀의 출근 준비가 한창일 평원 엘프 구역.
“플로라 안 바쁘면 같이 나갈래?”
“저, 저요?”
여기 플로라가 하나인데 정신 못 차리는 플로라. 플로라의 모습에 그간 내가 너무 쌀쌀맞게 대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플로라도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시집가라는 아빠의 말씀을 지키려고 했던 것뿐인 피해자니까 말이다. 물론 발레리의 증언으로 말 안 듣는 애물단지 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키려고 했던 아빠의 말씀이. 나랑 결혼하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듣긴 했지만 말이다.
플로라에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응? 응,”
“다, 단둘이?”
“싫어?”
“아, 아뇨!”
화들짝 놀라 팔짱을 껴오는 플로라. 플로라는 내 팔에 꼭 달라붙어서 물었다. 아마도 목적지가 궁금한 듯했다.
“자기, 근데 우리 어디 가요?”
“에밀한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흐응… 그렇구나…”
에밀에게 뭔가 물어보러 간다는 말에 조금 서운한 얼굴이 된 플로라. 단둘이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업무 관련 동행이라는 생각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은 모습.
여관 밖으로 나오자 날이 너무도 좋았다. 중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맑고 밝고 쾌청한 하늘.
목책을 끼고 바로 평원 엘프 구역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내 팔에 달라붙어 있지만 유난히 어색해하는 플로라.
단둘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어색한듯해 보였다.
“왜? 나랑 둘이 어디 가는 거 싫어?”
“아, 아뇨 그냥 자기가 어디 둘이 가자는 거 처음이라…”
플로라를 발끝으로 애먼 돌멩이를 발로 차 목책 쪽으로 날렸다. 첫 번째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가며 노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플로라와 붉은 노을 속에서 목책을 끼고 평원 엘프 구역으로 향하는데. 목책 아래 탐스럽게 피어있는 흰색의 아름다운 꽃 몇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냉큼 쪼그리고 앉아 꽃을 한 송이 꺾었다.
“예뻐라…”
꽃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플로라. 나는 꺾은 꽃을 그녀의 귀에 살며시 꽂아 주었다.
“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눈만 한없이 커지는 플로라. 부서지는 노을 속에 붉게 타오르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 희디흰 자기의 존재감을 뽐내는 하얀 꽃.
평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만져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늘의 노을과 함께 어우러졌다.
그녀의 뒤로 지는 태양. 부서지는 노을이 그녀를 내리비추고.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나는 그녀 앞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무엇보다 노을이 너무 좋았고.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단둘만의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숫자가 많다 보니.
그리고 나는 혼자 일곱을 상대해야 하지만, 저들에게는 내가 단 하나이기에 괜찮은 추억 하나쯤은 남기게 해줘도 좋지 않겠는가?
올려다보는 내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플로라의 눈빛.
나는 조용히 입을 열어 플로라를 향해 말했다.
“플로라 내가 살던 곳에는 남자가 결혼할 여자에게 이렇게 말해. 아름다운 플로라 나와 결혼해 주겠어? 그동안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 평생 내가 잘할게. 부디 나와 결혼해주겠어?.”
멍하니 벌어지는 플로라의 입. 플로라는 한 손으로 자기 아랫입술을 가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툭 툭툭
후두둑
노을을 등진 플로라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갑자기 소나기라도 오나 하늘을 바라봤지만, 하늘은 쾌청.
하늘에서 이 물방울이 오지 않았다면?
떨어진 물방울의 근원으로 생각되는 플로라를 불렀다.
“플로라?”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흑… 흐윽… 흐으윽… 흐아앙…”
“어?”
뭔가 내 예상과 달랐다.
분명 플로라의 대답은 “흥. 자기 제법 멋진 말도 할 줄 알고 이러면 내가 허락해줄 수밖에 없잖아요?” 이정도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대성통곡은 전혀 상상 못한 반응.
“플로라?”
“우아아아아앙… 히끅… 흐아아아앙…”
일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플로라가 내 손을 뿌리치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흔들리는 가슴.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플로라? 플로라?!”
플로라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뒤쫓자 갑자기 멈춰서는 플로라. 플로라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뒤돌아 말했다.
“러, 러셀. 흐으윽… 나 자, 잠깐만 끄흑… 혼자 있고 싶어요. 히끅…”
그리고 다시 여관으로 달려가 버렸다.
전생에 고백으로 혼내준다는 말이 있었는데. 마치 내가 고백으로 플로라를 흠씬 혼내준 것 같은 느낌. 그리고 혼쭐이 난 플로라는 엉엉 울며 달려가 버린 것 같은 상황.
난처한 상황이었다. 쫓아갈 수도 없고. 평소에는 자기라고만 부르다가 이름까지 부르면서 혼자 있고 싶다는 걸 봐서는, 무척 진지하게 말한 것 같은데. 그래서 따라가기가 참 애매했다. 그런데 혼자 두자니 뭔가 마음에 걸리고.
그렇게 여관과 목책 사이에 중간에 어중간하게 서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사리나가 여관과 장모님 댁 사이에서 젖은 시트가 든 바구니를 들고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급하게 사리나를 불렀다.
“사리나! 사리나!”
내 부름이 급한 것인지 눈치챈 사리나가 시트가 든 바구니를 급하게 내려두고 나에게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한쪽 팔을 절도있게 접으며 말하는 사리나.
나는 사리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리나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부탁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시면 미천한 노예는 행할 뿐입니다.”
믿음직하게 대답하는 사리나. 나는 다소 안심한 마음으로 사리나에게 부탁했다.
“사리나 내가 그, 음… 플로라를 울려버린 거 같거든? 그, 혹시 가서 어떤지 좀 봐줄 수 있을까?”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땅바닥을 쳐다보며 물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쪽도 여자를 울리면 쓰레기 취급일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하하… 아… 이런 부탁 좀 그런가…”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 섞인 목소리였다.
“프, 플로라 마님을 우, 울리셨단 마, 말씀이십니까?”
“으, 응 그, 그렇게 돼버렸어…”
“대체 어, 어떻게…?”
말도 안 되다는 목소리. 슬쩍 사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자 사리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왠지 쓰레기가 되어 버린 느낌. 나는 급하게 사리나에게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말 한마디 했는데 울어버리네…”
“하, 한마디 말씀이십니까?”
“으, 응 별말은 안 했는데…”
“하, 한마디만으로 울려버리시다니…”
뭔가 얼마나 독한 말을 했길래 한마디에 플로라가 우냐는 듯한 느낌이라서 기분이 아주 씁쓸했다.
평소라면 단박에 알겠다고 하고 달려갔을 텐데 왠지 주저하는 사리나. 창백하게 질린 사리나가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주, 주인님.”
“응?”
“죄송스러운데, 바, 발레리님에게 도움을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발레리가 있었다. 플로라의 동생인 발레리라면 믿을만하지.’
나는 급하게 사리나의 아이디어를 칭찬했다. 당황스러운 일에 머리가 굳어버려 생각하지 못했는데 친동생인 발레리가 가면 위로도 쉽긴 할 것 같았다. 아무렴 노예인 사리나가 위로하는 것보다야 동생이 좋겠지.
“그, 그래 그게 좋겠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럼 발레리 찾아서 플로라한테 가보라고 해줘. 내가 왜 발레리 생각을 못 했을까? 사리나 좋은 생각이야! 부탁할 게 알았지?”
“옛! 주인님!”
사리나가 전직의 능력을 활용하는 듯 민첩하게 여관으로 달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