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256. 토라진 애니 1
* * *
애니가 심문하듯 던진 말이 귀와 고막을 거쳐 뇌로 직격 했다. 충격에 저릿한 뇌. 충격은 뇌를 정지시켜 버렸다.
새까맣게 물든 시야. 암담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말. 애니에게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실을 고하느냐? 그건 정말 최악의 수.
다른 많은 일들 때문에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나의 미래는 암울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아마 용서받더라도 분명 투정을 부릴 일이 생긴다면. 지금 이 일이 평생 발목을 잡으리라.
잊고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이건 절대 까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러셀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오점. 러셀 인생 최대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꿀꺽
‘생각해라 러셀! 너는 할 수 있어!’
하지만 전생한 나는 딱히 지능케가 아니었던 듯,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무런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활에 미쳐 민첩만 내리찍었으니 당연히 지능케가 아닌 것. 어쩌자고 지능의 위대함을 간과했단 말인가!
시간은 흐르고 애니의 심문하는 듯한 눈빛이 나를 점점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애니의 눈빛을 대하자 맹수 앞의 사냥감처럼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나의 동공.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 턱 끝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턱 끝에서 땀방울이 시트로 떨어지는 순간.
달칵
“애니 왔니?”
구원! 구원이 내려왔다!
한나 아주머니 아니, 장모님이 애니가 왔다는 이야기를 처제에게 들었던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
처제가 굴린 작은 공이 나를 구원한 것 같았다.
“어머, 러셀 씨?”
나를 부르는 장모님의 목소리. 나는 애니의 침대에 걸터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 장모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감사함과 간절함을 담아서 말이다.
“장모님!”
장모님을 손을 잡자 느껴지는 온기. 안도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살았구나…’
“응?!”
한나 아주머니는 내가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손을 붙잡자 깜짝 놀라 애니를 바라보셨고. 애니는 한나 아주머니의 대답을 요구하는 얼굴을 대하자. 심문하는 눈빛에서 바로 부끄러움의 눈빛이 되어버렸다. 결국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마는 애니.
‘휴우…. 내게 지능케는 아니더라도 민첩케는 확실하지.’
궁수 하면 민첩케이고 나는 꽤 상위 궁수. 고로 나는 민첩케가 확실했다. 순발력은 민첩케 최대의 장점. 나는 낮은 지능 대신 민첩을 살려 남은 위기 또한 돌파하기로 작정했다.
‘민첩 만렙 러셀. 장하다!’
순발력 있는 나의 행동을 속으로 한껏 칭찬하며 한나 장모님께 바로 애니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말씀드렸다.
“장모님, 애니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원래 이럴 때는 몰아치는 것이 중요한 것. 빠른 민첩성으로 잦은 데미지를 누적시키는 것이 민첩케의 진정한 운영방식.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몰아붙이는 것이다.
“어머! 지, 진짜? 하, 하지만 우리 애니 지참금이…”
“애니 자체가 지참금입니다. 장모님!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력 있고 멋진 모습으로 장모님께 말하자 반색하는 장모님. 그리고 나의 거침없는 청혼에 어쩔 줄 모르는 애니.
“애니를 정말 사랑합니다! 따님을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내 말이 이어질 때마다 애니는 점점 독한 술을 들이켠 것 같은 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머, 부족한 아이인데 그렇게까지…”
“제가 아내가 많아서 더 죄송하죠.”
“어머, 아니야 다들 대단한 분들이고. 거기에 애니를 넣어준다면, 고마운 일인데… 애니가 나이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고. 성격도 나쁘고 하지만 엉덩이는 커서 그래도 아이는… ”
“어, 엄마!”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던 애니는 장모님의 팩트 폭행에 조금 다른 부류의 부끄러움으로 다시 물들고 말았다.
“그런데 러셀님? 러셀씨? 아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지?”
“장모님 그냥 러셀이라고 부르시면 되죠.”
“그, 그럴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애니는 엄마한테 소리치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잘 있었던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날까? 둘도 오랜만에 볼 텐데… 눈치 없이 계속 있었네.”
장모님은 나에게 살짝 윙크하며 방문을 닫고 나가버리셨다.
뒤를 돌아보자 빨갛게 물들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던지. 애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상태.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애니를 불렀다.
“애니?”
“……”
씩씩대는 숨소리만 들려오는 이불속. 천천히 손을 뻗어 흰 껍질을 벗기듯 이불을 조심스럽게 내리자. 새빨간 과육이 드러나듯 잘 익은 과일 같은 애니의 얼굴이 그 안에서 드러났다.
알맹이가 다 드러나자. 들려오는 투정 섞인 목소리.
“비, 비겁해! 이런 상황에서 엄마에게…”
두고두고 갈굼을 당하며 사느니 잠깐 비겁한 놈 되는 게 훨씬 이득. 나는 이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레 애니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애니.
달칵
그때였다.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나타나는 장모님.
“애니야. 엄마가 그냥 가려고 했는데. 밖에서 들어보니 안 되겠어!”
가신 줄 알았는데 밖에서 듣고 있으셨던 듯한 말씀. 장모님은 애니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하셨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뭐 잘못했어도 너 남편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여자가 못 이기는 척 져주기도 해야지. 아까 엄마가 들어올 때도 남편 노려보고 있었지? 그러면 안 돼. 알았어? 엄마가 아까 모를 줄 알았지? 지금도 남편한테 비겁하다니! 엄마는 애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 엄마가 지켜볼 거야 알았어? 러셀도 애니가 잘못하면 나한테 알려줘 철없는 애 시집보내려니까 내가 마음이 안 놓여 정말.”
“어, 엄마! 자꾸 이럴 거야?!”
애니가 장모님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온 것은 더욱 많은 잔소리와 등짝 스매싱.
짝
찰진 손목 스냅과 함께 장모님은 애니의 투정에 복리 이자를 붙인 듯 잔소리를 쏟아내셨다.
“이러는 게 뭔데! 엄마가 딸 시집보내면 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야! 마님들 사이에서 혼자 밉살맞게 행동하면 어떻게 될 것 같니! 내가 정말! 러셀이 착하니까 다 받아주는 거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어! 도시의 배불뚝이 영감의 후처로 시집가면, 매일 두드려맞으면서 살 텐데. 러셀한테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남편한테 비겁? 비겁?”
애니는 길게 이어지는 장모님의 잔소리에 결국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한테만!”
글썽글썽한 눈으로 이불속으로 숨어드는 애니. 애니가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채 패배감 짙은 얼굴로 다시 껍질 속으로 숨어들자. 장모님이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셨다.
[러셀, 위로는 러셀이 해줘야 하는 거 알지?]
[예!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장모님의 작전이셨건 것 같은 느낌.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라더니.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셔서 너덜너덜하게 만든 다음.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내가 기워주라는 것인가?
어떻게 애니의 마음을 풀어줘야 하나 머릿속에 방법을 떠올릴 때. 장모님께서 아주 거친 방법을 제안하셨다.
[근데 애니는 삐지면 잘 안 풀리거든. 혹시 안될 것 같으면, 몽둥이로 패줘 알았지?]
[예!? 모, 몽둥이로 패, 패라고요?]
이쪽은 당연히 여자의 인권이 낮다. 그렇기에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재산 정도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고. 남편에게 두드려맞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다.
그래도 그렇지 본인 딸을 패라니. 그것도 몽둥이로? 믿을 수 없는 말에 장모님을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내 생각을 알아챈 장모님이 웃어버리셨다.
[어머, 놀래기는. 남자가 가진 몽둥이로 패라고…]
[예?!]
[저녁때까지 이쪽으로 아무도 못 오게 할게. 무슨 말인지 알았지?]
나는 장모님의 말씀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중년 여자의 조언은 온종일 끓인 사골국에서 우러난 진함 같은 아주 깊은 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수위 높은 장모님의 조언에 열이 오르는 머리.
달칵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장모님이 사라지시고. 잠시 후 나는 방문을 열고 혹시라도 장모님이 계신지 문밖의 좌우를 확인해보았다.
다행스럽게 아무도 없는 방 밖.
나는 다시 애니의 침대에 걸터앉아 흰 껍질 속으로 움츠러든 애니를 찾아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스르륵
이불자락이 천천히 내려가자. 아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저항감. 애니가 손으로 이불을 말아쥐고 저항했다. 아마도 단단히 토라진 모양.
“애니?”
애니의 이름을 부르자 움찔하고 떨리는 이불. 하지만 나의 부름에도 껍질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전생자. 이런 위기를 헤쳐 나갈 지식은 이미 알고 있다.
요구르트 뚜껑이 문제가 있으면 아래를 따면 되는 것.
나는 이불을 들추고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꺅!”
애니의 뾰족한 비명이 솟아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