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253. 다리 치료 12
* * *
이실리엘이 애니를 데리러 직접 그란 폴에 온 것은, 애니를 안전하게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실리엘 자신과 리젤다가 러셀의 치료를 돕기 위한 사냥에 나서고, 시트라는 치료 담당. 수리아는 아직 요양이 더 필요했고, 플로라는 손이 필요한 곳을 돕기로 했었다. 그리고 애니는 발레리가 데려오기로 했었다.
러셀 여관의 물품 구매나 외부인들과의 거래는 발레리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익숙한 그란 폴에 직접 가서 애니를 데려오는 것도 발레리가 자처하고 나선 것.
하지만 아내 의회가 끝나고 보니 상황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암살자들의 습격 이후로 호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습격해온 암살자 대부분은 처리했고, 러셀이 다시 습격이 오지 못하게 조치해두었다고 했으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것.
그란 폴에 방문할 때 마리나나 여관에서 매일 쉬는 용병 친구들로도 충분했던 호위가 부지불식간에 습격해오는 암살자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러셀. 그는 앞으로 그란 폴에 갈 때는 무조건 수호자나 로리엘을 한 명 대동하라고 이야기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발레리 하나만을 지킨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갈 때는 무력이 없는 것이 발레리 하나이지만, 올 때는 애니까지 두 명이 되는 것.
수호자 둘을 보내면 충분할 일이지만. 자신은 첫째 아내. 다른 아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늑대의 무리도 첫째 암컷과 수컷이 무리를 지키니까.
이런 일에는 직접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실리엘은 자기가 직접 함께하겠다고 발레리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이실리엘이 나선다니 수호자 둘이 이실리엘을 따라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다소 과도한 호위가 되어버렸지만 부족한 것보다는 나은 일.
그렇게 애니를 데려오려는 일행은 병이나 침대에 늘어진 러셀을 뒤로하고 몰래 여관을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길드.
이실리엘은 테이블에 앉아 애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드 홀 한가운데 위치한 자리. 이실리엘은 애니와 발레리가 사라진 부엌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길드에 도착해서 애니를 찾고 그녀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자기 대신에 식당을 맡을 수인들에게 이것저것 일러줘야 한다면서, 애니가 발레리와 수인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사라진 것이다.
수호자 둘은 애니의 남동생과 마차를 지키는 중.
좀 전에 릴리아나 씨와 부 길드장이라는 늙은 인간이 인사를 위해 찾아와 위층으로 가기를 권했지만 이실리엘은 그것을 거절했다.
애니와 빨리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 남겨진 이실리엘은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였던, 길드 홀 중앙 테이블에 앉아 다소 지루한 기다림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실리엘의 지루함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엘프들이 하나둘 나타나 이실리엘에게 인사를 해오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말이다.
“아, 아라타 엘렌이 맞으십니까?”
애니와 발레리가 길드 식당에 대한 자잘한 주의점을 수인들에게 전달하고, 길드 홀에 나왔을 때는 뭔가 다소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길드 홀의 테이블 정중앙에 혼자 고고히 자리 잡은 이실리엘과 그녀의 주변을 호위하듯 퍼져 앉아있는 엘프들.
그 압도하는 분위기에 길드 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부엌에서 홀로 나오는 문에서 몸을 빼자마자 보이는 당황스러운 모습에, 둘은 멈칫하고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실리엘이 들이닥치고 식사 주문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애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발레리를 바라보자 발레리의 고개도 천천히 애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서로 시선을 마주하자 나오는 어색한 웃음.
“호호….”
“아하하…”
하지만 둘의 웃음은 고요한 길드 홀에 너무나도 큰 소리였다. 일순간 둘을 향하는 길드 홀의 모든 시선.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이슬처럼 맑은 목소리.
“애니! 발레리! 일은 다 끝난 것인가요?”
쏟아지는 시선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며 평민인 애니가 발레리 뒤로 숨자. 발레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꿀꺽
“예, 이실리엘님 이, 이만 가시죠.”
발레리의 대답에 이실리엘이 몸을 일으켜 둘에게로 향하려다. 갑자기 뭔가 잊을 뻔했다는 듯 몸을 돌려 주변에 앉아있던 엘프들에게 살짝 눈인사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엘프들.
그런 엘프들을 뒤로하고 셋은 길드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애니와 발레리 뒤로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시선과 발소리. 애니가 살짝 뒤돌아보자 이실리엘의 뒤로 엘프들이 졸졸 따라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레리가 다시 조심스레 이실리엘에게 물었다.
“저, 그런데 이실리엘님 뒤의 분들은 아시는 분들인가요? 저희를 따라오는 것 같은데?”
“네? 아뇨. 그냥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아닐까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이실리엘.
그러나 이실리엘이 틀렸고 발레리가 맞았다는 게 금방 드러났다.
엘프들이 길드 뒤편 우물가에 세워진 마차까지 그들을 따라왔으니 말이다.
이실리엘의 뒤를 졸졸 따르는 일곱의 엘프들. 마차 앞에 다다라 이실리엘이 수호자 하나에게 맡겨두었던 활을 넘겨받자. 갑자기 뒤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 살아있는 가지로 만든 활! 세, 세계수의 가지!”
“어머니의 가지라고?”
“어, 엄청난 정령력!”
엘프들이 참지 못하고 이실리엘에게 바짝 모여들었다. 하지만 감히 손대지는 못했다. 엘프에게 활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알고 있으니 말이다.
엘프들의 기세에 놀란 발레리와 애니가 이실리엘의 뒤로 숨자. 수호자 둘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엘프어로 말했다.
「이실리엘님에게 용건이 있나요? 무슨 일이지요? 세계수의 수호자는 동족이라도 높은 엘프님께 무례를 용서치 않습니다.」
「세, 세계수의 수호자!」
「저, 정말 수호자인가요?」
엘프들이 수호자라는 말에 아까보다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는 이실리엘과 두 수호자 리젤다와 발레리 그리고 거의 한 달 만에 복귀하는 두 수인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뒷자리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다섯의 엘프 용병도.
원래 일행은 엘프들의 광기 어린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이들을 두고 재빨리 출발하려고 했었다. 웬 엘프들이 이실리엘을 따라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수호자들에게도 높은 엘프인 이실리엘님이 나타나셨으니 좀 놀랄 수야 있지만, 저런 극적인 반응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엘프로 태어나 높은 엘프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 모습.
엘프들을 진정시키고 일행은 길을 떠나려 했지만, 마차를 출발시키자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마차를 쫓는 이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출발 후 길드 앞을 벗어나지도 못한 마차에서 발레리가 내려 엘프들에게 물었다.
“음… 혹시 묵을 곳을 찾으시면, 괜찮은 여관이 있는데…”
발레리의 말이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엘프들. 발레리는 그들이 이실리엘이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리고 설명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이실리엘님이 묵고 있는 여관인데….”
“예! 여관! 여관!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섯의 엘프가 마차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원래 따르던 엘프는 일곱이었지만, 둘은 다른 여관에서 짐이 있고 일행도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무척 따라가고 싶은데 못 가서 속상하고 서운한 얼굴.
울먹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본 착한 발레리는 그들에게 어디로 와야 하는지 어떻게 와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남부 대늪지 웜 포트의 엘프의 눈물 여관으로 오시면 됩니다.”
“하, 하지만 통행증이…”
“그냥 병사들의 야영지까지 가셔서 러셀님의 손님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무조건 통과시켜 줄 겁니다.”
“예! 러셀님의 손님, 러셀님의 손님…”
그렇게 두 엘프는 중얼거리며 자기들의 짐과 일행이 있다는 여관으로 향했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돌린 두 엘프를 돌려보내고 다섯의 엘프를 태우고 웜 포트로 향하는 길.
행동은 조금 이상했지만, 가슴에 은 등급 용병이라는 표시도 있었고. 엘프는 동족을 절대 배신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니 나쁜 사람 아니, 엘프는 아닌데. 다소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고 이실리엘과 수호자 그리고 발레리가 조심스레 다섯의 엘프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다른 뜻은 아니고 궁금해서 그런데 호, 혹시 이실리엘님 같은 높은 엘프를 처음 보시나요?”
발레리의 조심스러운 질문. 그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 봤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들려온 것은 황당한 대답.
“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높은 엘프는 어머니 나무에만 계신대, 저희는 어머니 나무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예?!”
놀란 발레리의 목소리. 발레리가 확인을 위해 이실리엘을 바라보자 이실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높은 엘프는 세계수를 지키는 존재.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엘프들은 서로 교류하지 않나요?”
“아주 오래전에는 교류했다고 들었지만, 중앙대륙에 인간 왕국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엘프를 노예로 탐내기 시작하면서 교류가 끊긴지 좀 오래되었다고 들었어요.”
이실리엘을 따라 남부로 온 두 수호자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이실리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얼마나?”
“천오 백년쯤?”
“네?!”
발레리의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 다른 일곱의 엘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높은 엘프들은 필수로 한 번쯤 그 부모를 통해 교육받는 이야기지만, 일반 엘프인 두 수호자와 다섯 엘프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이실리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수림에는 그런 농담이 있어요. 흩어진 엘프보다 다크 엘프들이 저희를 더 잘 알 거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