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249. 다리 치료 8
* * *
줄이 부족했는지 여기저기 밧줄을 걸어 매달아 둔 고기도 많았다.
와이번이 좀 크긴 했는데 고기양이 상당했던 모양.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침에 수프를 끓였던 초대형 솥에 와이번의 고기가 잔뜩 삶아지고 있었다. 원래 신선한 고기는 별로 다른 양념을 할 필요 없이 푹 삶아서 소금만 찍어 먹어도 맛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
누군가 떠다 둔 세숫물로 세수하고 바로 여관 밖으로 향했다.
여관 밖에 도착하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부스스한 모습이 많았다. 그런 부스스한 마을 주민과 엘프의 공통점은, 모두 손에 접시를 하나씩 들고 입과 손에 기름을 잔뜩 바른 채 고기를 뜯고 있다는 것.
와이번 한 마리에 즐거움과 풍족함이 넘치는 마을.
내가 잡은 것은 아니지만 흐뭇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먹는 걸 지켜보는데, 어느새 이실리엘을 선두로 아내들이 살코기가 아닌 좀 특이하게 생긴 고기들을 솥에서 건져, 잘라서 가져오기 시작했다.
“러셀, 딱 시간 맞춰서 도착하셨어요. 심장과 간이 아주 알맞게 익었거든요.”
“응? 뭐랑 뭐?”
“심장이랑 간이요. 심장은 생명력이 제일 풍부한 부위니, 다리 회복에 아주 좋을 거예요.”
이실리엘이 양손 가득히든 쟁반에는 와이번의 심장과 간이 고소한 향기와 김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전생의 민간요법 중에 아픈 부위를 먹는 것과 컬러푸드 요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심장병 환자가 소나 돼지의 심장을 먹는다든지. 간이 좋지 않은 사람이 간을 먹는다든지. 또 피를 맑게 한다며 붉은 음식을 먹고. 머리카락을 검게 한다고 검은콩을 먹는다든지 하는 그런 행위 말이다.
비슷한 것을 먹음으로써 자기의 몸에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믿음은, 종족이나 세계가 달라도 인간형 생명체들에게 보편적인 믿음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내게 생명력이 가득 담긴 음식을 대접한다고 이실리엘이 가져온 것이 심장인 것을 보면 말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던 독일어 선생님께서 어느 날 학생들에게 ‘폭풍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연히 고전 명작이고 우리 나이대라면 한 번쯤은 명절에라도 본 적이 있으니 당연하게 다들 본적이 있다는 대답이 흘러나왔지만, 선생님의 다음 질문에 우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영화가 유명한 명화가 맞냐?”
“네, 상도 많이 받았고….”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 시골 아가씨의 이야기일 뿐인데, 왜 전 세계 사람들이 그걸 명화라고 할까?”
그래 그런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어진 선생님의 설명은 우리 나이대의 학생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야기 자체는 다른 나라 시골 아가씨의 삶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고통, 웃음 등 인간의 감정이 가진 본질. 그러니까 인간의 감정을 호수로 표현한다면, 호수 그 밑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쌓여있는 진흙 같은 것의 본질이 다 같기 때문은 아닐까?”
전생에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와서는 나는 그 말을 아주 사무치게 이해하는 중이다.
사는 세계가 달라도 인간이 가지는 감정, 종족이 달라도 인간형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실리엘이 가지고 온 삶은 심장(염통)만 보아도 예전에 들었던 그 이야기가 다시 생각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생명의 근원이 피나 심장이라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전생의 잉카, 마야 문명이 생명의 근원인 심장을 산 제물로 바친 것과 모 종교의 성서에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다는 말처럼, 이곳에서의 인간형 종족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생명력 가득 담긴 음식을 먹게 하고 싶지만, 하지만 피를 먹는 것은 마족들이나 할법한 일.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기에 아마도 심장으로 타협을 본 것 같은 느낌.
이실리엘이 쟁반에 가득 올린 삶은 염통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에게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뭐, 와이번의 심장이라고 해봐야 잘 발달 된 근육의 쫄깃한 고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러셀, 어서 앉으세요. 잔뜩 드시고 얼른 다리가 나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실리엘과 뒤에 늘어선 아내들의 얼굴에서, 그녀들의 이런 과도한 행동을 끌어낸 나와 다르지 않은 그 어떤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따듯한 마음을 느끼며 나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러셀, 인마 난 할 수 있어! 그래, 먹고 죽더라도 이 순간은 먹자!’
러셀이 아내들의 정성에 즐거운 표정으로, 삶은 와이번의 심장 고기를 잔뜩 먹고 과식으로 앓아누운 그다음 날.
평원 엘프 구역에서는 발레리의 지휘하에 수인들의 요리 실력 확인이 한창이었다. 애니를 복귀시켜야 했기에 요리에 소질 있는 인원을 골라내고, 애니 대신 투입하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다.
아홉의 수인 중 애니와 그란 폴에 한동안 묶여있는 둘을 제외하고는 일곱이 남아있는 수인. 그들에게 간단한 칼 쓰는 방법이나 기본적 요리의 소양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 한나 아주머니와 발레리의 임무였다.
그렇게 시작된 수인들의 요리실력 확인.
발레리는 한나 아주머니와 확인한 수인들의 요리실력 확인에서 다소 놀라고 말았다. 수인들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어도 기본적으로 러셀의 아내들보다는 다들 요리에 대한 소양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평민 출신의 용병이나 마을 아낙 등의 출신 성분을 가진 수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먹을만한 요리 정도는 다들 할 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평민 여자들이 기본적인 요리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러셀이 이들을 위탁운영 식당의 조리장을 삼지 않은 것은, 러셀의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 하지만 솔직히 요리실력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위탁운영을 하는 식당의 음식은 준비된 재료를 기준대로 넣고 끓이면 되는 일이니.
“딱히 큰 능력은 필요 없어요. 어차피 이쪽에서 준비해주는 재료를 알맞게 넣고 충분히 끓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도 저희가 러셀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수인들은 걱정했지만, 위탁운영 전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발레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애니가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위탁운영 하는 길드의 식당은 솔직히 러셀의 아내 누구를 데려다 놔도 잘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러셀 모르게 애니를 빼 온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 일.
발레리는 어제 삶은 심장을 잔뜩 먹고 쓰러진 러셀을 위해서도 애니를 하루빨리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들 러셀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한결같으나, 아무래도 발레리가 보기엔 좀 과한 면도 있었다.
러셀의 아내들은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들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 상황이라 그 과한 면이 어제처럼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발레리는 러셀의 아내 중 제일 평범한 애니가 옆에 붙어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수인들이 돌아가며 위탁운영 식당의 조리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러셀이 과식으로 앓아누운 사이에 말이다.
러셀이 웜 포트에 암살자들이 나타나 수리아 공주를 습격했기에 길드에서 안전하게 있으라고 릴리아나를 통해 연락하고 벌써 한 달.
‘바보! 멍청이!’
애니는 서운함과 걱정에 분노하는 중이었다.
직접 연락도 아니고 릴리아나를 통한 연락인지라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전달받지 못하고. 간단한 전달 사항만 들은 상황.
위탁운영 식당에 웜 포트에서 보내온 재료가 떨어진 지는 벌써 몇 주가 지났고.
러셀이 사전에 일러둔 대로 혹시라도 재료가 도착하지 않을 때 해야 하는 행동 요령대로, 급한 대로 번 돈에서 시장이나 근처 농가에서 재료를 사들여, 러셀과 같이 만들었던 스튜나 죽을 최대한 흉내를 내 임기응변으로 식당을 운영한 지 삼 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워낙 눈썰미가 좋은 애니였던지라. 그리고 이쪽의 음식이 워낙 최악이었던지라. 러셀의 음식을 보아왔던 애니의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애니의 음식은 호평이었고, 그렇기에 식당은 무리 없이 운영은 할 수 있었지만. 한 달 가까이 식당만 운영하는 나날은 결국 애니를 지치게 했다.
아니, 힘들어도 러셀을 생각하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을 처리하고 곧 온다던 러셀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랜 기다림과 지침이 분노가 된 것이다.
이해는 해도 걱정되는 마음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 애니는 걱정과 분노를 꾹꾹 가슴에 눌러 담고 길드 식당의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주인님식 스튜입니다.”
“맛있겠네요. 애니씨.”
현지 새댁들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아침을 이곳에서 해결하는 새댁들은 러셀이 가르쳐준 스튜를 아주 좋아했다. 아니, 길드에서 식사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풍부한 고기와 채소가 들어간 러셀식 스튜는 솔직히 스튜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였다. 다른 영원의 스튜와는 질적으로 다른 음식이니까 말이다.
스튜를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풍부한 맛이 깊어지기에 이미 어제 자기 전에 한번 끓여두었고, 다시 데워 위에 자른 빵만 잘라 올린 후 나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
애니는 새댁들에게 스튜가 늘어 붙지 않게 확인을 부탁한 후. 길드 사무원인 릴리아나가 근무하는 곳으로 향했다.
러셀의 소식이 도착했나 물어보기 위한 것.
애니가 부엌에서 나와 길드 접수처로 향하자 멀리서 자기를 본 릴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매일 같은 시간 릴리아나를 찾아가니, 아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인 듯했다.
‘러셀, 바보 멍청이 좀 연락을 줄 것이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애니는 릴리아나의 미안한 표정을 뒤로하고 다시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애니가 길드의 홀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서려 할 때.
아직 길드의 용병들이 얼굴을 내밀기 이른 시간임에도 길드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엘프 하나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애니! 어디 있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