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 244. 다리 치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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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위에 마지막 남은 세 번째 태양이 오늘의 이별을 고하려 하기 직전.
나는 삼 층 창문에 걸터앉아 평원의 해 질 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원의 해 질 녘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붉은 태양이 지평선에 걸리면,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데. 그 붉게 물든 세상 속 평원에 자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드넓은 대지. 그것이 남부 평원의 아름다운 저녁노을의 풍경이다.
모처럼 시간을 내, 내가 삼 층 창문 난간에 걸터앉아서 해 질 녘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해가 지려 하는데도 사냥을 나간 이실리엘, 리젤다, 로리엘이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열린 삼 층 복도 창문을 통해 평원 쪽을 한창 바라보고 있을 때. 목책 입구 저 멀리 늪지 쪽에서 무엇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바닷물이 갈라지듯 풀들이 양쪽으로 머리를 누이고 그 갈라진 풀들의 사이를 헤치고 빠르게 다가오는 형체.
평원에 자란 풀들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 때문에 언뜻언뜻 풀밭에 녹아드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녹색 머리의 날렵한 몸매. 로리엘이었다.
로리엘은 무슨 일인지 이실리엘과 리젤다는 두고 혼자 평원을 빠른 속도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아주아주 빠른 속도로….
그렇게 따른 속도로 평원의 풀을 홍해를 가르듯이 가르며 뛰어온 로리엘은 목책 문이 열리는 시간도 아까운지, 어린아이 줄넘기 넘듯 목책을 훌쩍 뛰어넘어 곧바로 여관 쪽으로 달려왔다.
로리엘의 다급한 모습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달려오는 로리엘을 향해 소리쳤다.
“로리엘! 이실리엘과 리젤다는?”
“아, 러셀 지금 잠시 바쁘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로리엘은 나를 본척만척하더니 목적지가 여관이 아니었던지. 곧바로 평원 엘프 구역으로 달려가 버렸다.
‘뭐지?’
말 한마디만 남기고 휑하니 사라져 버린 로리엘을 쫒아 여관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평원 엘프 구역에서 수인과 엘프들이 우글우글 달려 나오더니 헛간에서 말과 짐마차를 꺼내기 시작했다.
“뭐 뭔데? 무슨 일인데?”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짐마차를 꺼내는 엘프들. 그렇게 꺼낸 짐마차가 두 대.
‘무슨 고래라도 잡았나?’
뭘 잡았길래 수레도 끌고 갔는데 짐마차까지 끌고 나가나 싶어 짐마차에 오르려 하자. 어느새 다가온 로리엘이 나를 마차 밖으로 끌어 내렸다.
마차 뒤로 오르려는데 번쩍 들리는 내 몸.
“러셀은 기다려라. 환자는 돌아다니면 안된다.”
“야 내가 무슨 환자야.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인데?”
“이실리엘이님 좀 큰 걸 잡으셨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 다녀와서 보자.”
그렇게 로리엘은 엘프들을 끌고 다시 늪 쪽 평원으로 사라져버렸다.
“강 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평원 쪽도 딱히 보이는 동물이 없습니다.”
강변을 훑어보는 이실리엘과 수레 위에서 평원 쪽을 살펴보는 로리엘이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말했다.
“부족하네요.”
풀죽은 이실리엘의 목소리.
이실리엘의 말에 리젤다가 수레 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사냥의 성과가 보였다. 사슴 한 마리와 물새 몇 마리.
확실히 이실리엘의 말대로 부족했다.
이실리엘, 리젤다, 로리엘이 사냥에 나선 이유는 러셀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생명력이 풍부한 사냥감을 찾아 마을부터 평원을 샅샅이 훑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점심때 갑자기 사냥에 나서게 된 것은 다소 충동적인 이유였다.
아침에 러셀에게 상당히 다양한 음식을 해주었지만, 그것으로 뭔가 양이 차지 않은 이실리엘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아내 의회를 소집했다.
러셀의 다리를 치료하는 중대한 문제는 당연히 아내 모두가 상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렇게 아침 식사와 정리를 끝낸 아내들 사이에 아내 의회가 소집되었다는 다급한 소식이 여관 직원들을 통해 날아들고.
평원 엘프 구역의 빈집. 커튼까지 쳐 어둡게 만든 곳에 세계수의 활을 둘러싸고 러셀의 아내들이 모여들었다.
이실리엘을 필두로 최측근이자 오른팔 리젤다, 발레리, 플로라,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아내 의회의 참가자가 된 수리아와 시트라까지. 그란 폴에서 장사를 돕고 있는 애니를 제외한 아내 전원이 참가한 대의회였다.
먼저 의회의 시작 전 러셀의 아내들은 세계수의 생명력이 담긴 불빛을 손가락에 나눠 받았다. 리젤다나 발레리는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플로라를 비롯해 시트라, 수리아는 처음 받는 세계수의 생명력 담긴 불빛.
“오…. 이 실리엘님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세, 세계수의 빛이라니.”
북부 출신은 수리아는 그 과정에 감동해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의회. 오늘의 중요 안건은 러셀의 다리치료를 위해서 아내들이 합심해 무엇을 할 것인가?
회의가 시작되고 회의를 여는 이실리엘의 첫마디는 자책이었다.
“아무래도 아침에 저희 음식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실리엘이 침통한 표정과 목소리.
맹목적인 이실리엘과 수리아가 그 의견에 동조했지만, 러셀의 배와 소화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모습을 살펴본 발레리가 조심스럽게 이실리엘에게 발언을 요청했다.
손을 든 발레리의 손끝에 반짝이는 불빛을 본 이실리엘이 발레리에게 발언권을 허락했다.
“발레리 좋은 의견이 있나요? 말씀해 주세요.”
“예. 이실리엘님 아무래도 양을 더 이상 늘리긴 힘들 것 같아요. 아침에도 러셀을 보았지만, 러셀이 많은 음식을 한 번에 먹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발레리의 지적에 이실리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레리의 의견.
“아무래도 양보다는 질을 개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질이요?”
발레리의 말이 끝나고 이실리엘의 의문 어린 질문에, 시트라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손끝에 불을 반짝이는 모습이 이실리엘의 눈에 들어왔다.
러셀의 상태를 살피고 그의 치료를 맡은 시트라. 그녀의 의견이라면 꼭 들어야 했기에 이실리엘은 기쁜 얼굴로 시트라의 발언을 허락했다.
“시트라 어서 말씀해보세요.”
“예, 이실리엘님 발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발레리님의 의견에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아무래도 결손 신체를 재생시키는 데는 많은 육체의 기운이 필요하기에 생명력 풍부한 식사를 제공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명력이 풍부하다면 예를 들어 어떤 거죠?”
자연의 생명력과 가장 친근한 이들이 이실리엘 같은 높은 엘프였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인지 이실리엘이 다시 한번 시트라에게 확인했다.
“늪지에 나는 희귀한 약초나 거대한 짐승. 그런 것들 말이죠.”
확실히 이실리엘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수림 같으면 생명력 풍부한 약초 같은 것을 찾는 것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몇 번을 제외하고 늪에 들어가 본 적 없는 이실리엘은 늪지에 자라는 어떤 식물이 좋은지 알고 있지 못한 것.
“먼저 늪지 약초나 짐승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이실리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환한 웃음을 띠며 리젤다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실리엘의 의해 발언이 허락되자마자 리젤다가 기쁨에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실리엘님 드디어 제가 이실리엘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늪지에서 사냥과 채집을 이년 넘게 한 리젤다는 늪지의 반전문가. 검은 연꽃을 비롯해, 늪지 물망초, 달머금이, 흡혈난등 어떤 약초들이 귀한지 알고 있고, 어떤 생물들이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실리엘이 찾는 늪지 전문가가 리젤다였기 때문이었다.
“저는 늪지에서 이년 넘게 사냥했기에, 어떤 것이 귀한 약초고. 어떤 놈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 대략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실리엘님.”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벅찬 리젤다는 이실리엘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어서 빨리 증명하고 싶어 외쳤다.
“당장 가시지요. 이실리엘님!”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당장 가자는 리젤다의 말. 이실리엘은 의회를 폐회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렇게 화급히 리젤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이실리엘의 뒤로 플로라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로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해요! 이실리엘님.”
더 큰 문제가 있다는 플로라의 지적. 이실리엘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며 물었다. 러셀의 치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 순간에 큰 문제라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뭐, 뭔가요 그게?”
“저희 요리… 요리가 문제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저희가 만든 요리는….”
플로라의 말에 러셀의 아내들이 서로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플로라의 말대로 아침의 요리는 그냥 먹을만한 수준이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러셀의 아내들 중 요리를 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것이었다.
이실리엘은 할머니와 살 때는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었고, 대수림에 혼자 살 때는 과일을 따 먹거나 잡은 동물을 구워 먹는 정도가 전부였다. 더군다나 높은 엘프이니 다른 엘프들이 음식을 나눠주곤 했기에 부족함 없이 살았던 것.
수리아는 왕녀니 당연히 요리사가 해주는 음식만을 먹었지, 음식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시트라는 신전에서 생활했으니 당연히 신전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었을 뿐.
리젤다도 귀족이니 음식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용병 생활할 때는 사 먹거나 모닥불에 구워 먹는 정도가 전부.
플로라와 발레리도 대상인의 집안의 귀한 딸들이니 음식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야 러셀이 몇 번 보여준 쉬운 음식을, 한나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만들었지만. 매번 같은 요리만 낼 수는 없는 법. 확실히 아주 큰 문제였다.
이실리엘이 침통한 표정으로 발레리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복귀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확실히. 제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실리엘과 발레리만 뭔가 둘의 이야기를 하자 다른 아내들이 궁금함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실리엘님 그녀라면?”
이실리엘이 아내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 중 요리를 가장 잘하는 사람! 애니! 그녀입니다.”
이실리엘의 말에 다른 아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이 모르는 사이 아내들에 의해 애니의 복귀가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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