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237. 교단의 위기 9
* * *
그란 올을 떠난 헬로나는 하루빨리 시트라를 만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행을 재촉했다. 쉬지 않고 들리는 도시와 마을에서 말을 바꿔가며 간단한 빵, 육포와 물 탄 포도주만을 보급하며 강행군으로 며칠.
마차를 모는 성기사들도 교대로 휴식을 취하며 멈추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잠은 마차 안에서 구겨져서 자고. 식사는 오로지 딱딱한 빵과 포도주, 육포. 볼일도 말 한 마리를 같이 끌고 가다, 볼일을 보려면 말을 가지고 마차에 내려 볼일을 보고, 볼일이 끝나면 다시 뒤따라와 복귀하는 극한의 여정.
그렇게 강행군을 이어가던 헬로나의 일행은 오늘 조금 이른 저녁 웜 포트로 가는 관문인 그란 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목표로 한, 웜 포트가 바로 코 앞이었다.
목적지가 가까워 이제 한번 쉬고 갈 법도 했지만, 헬로나는 그란 폴에 도착했다고 여정의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말을 바꾸고 보급품을 보충하고, 그란 폴 용병, 모험가 길드에서 통행 허가증을 받자마자 다시 웜 포트를 향해 출발한 것이었다.
인사를 하겠다며 달려 나온 성주와 용병 모험가 길드의 부 길드장과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성문이 닫히기 직전 그란 폴을 빠져나온 헬로나 일행.
그들은 성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쉬지 않고 다시금 웜 포트로 마차를 몰았다.
“서두릅시다!”
“예! 알겠습니다! 이럇!”
마차는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지만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헬로나의 마음. 거리가 얼마 남지 않자 더욱 조바심이 나 성기사들을 더욱 재촉했으나 더 빨리 가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것은, 그란 폴과 웜 포트 사이의 평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 풀밭이라는 사실이었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풀들이 내는 파도 소리만 들려오는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진 풀밭.
쏴아아
주변에 비슷한 경관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한참을 이동하는데도 제자리에만 서 있는 듯한 기분. 미칠 것 같은 초조함과 불안감이 헬로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초조함 속에 얼마나 이동했던가. 그란 폴과 웜 포트 사이에 있다는 병사들의 야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출입을 통제하고 출입증을 확인하는 곳. 이곳에 도착해서야 계속 이어지는 풍경 속에서도 꾸준히 웜 포트와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출입증을 확인시켜주면서 헬로나가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남은 것인가?”
“예! 예하! 이제 앞으로 반나절입니다.”
야영지의 책임자에게 남은 거리를 듣자마자. 헬로나는 마부석 옆에 앉았다. 그리고 추기경이 가진 막대한 신성력으로 미물인 말이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막대한 축복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자신의 축복은 너무 강력해 축복이 끝날 때쯤 말들이 모두 쓰러져 버릴 수도 있지만, 조바심에 더 이상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마차 주변이 번쩍이며 빛줄기가 흘러나오고, 네 마리 말에게 막대한 축복의 빛이 뿌려지기 시작하자.
히이이잉
말들이 거칠게 날뛰고 마차 바퀴가 풀밭을 갈아엎으며 웜 포트를 향해 말들이 마지막 질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웜 포트 목책 문.
에밀은 평원을 노려보며 혹시 모를 위협에 마을을 지키는 중이었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는 에밀.
그때 에밀에게 걱정 어린 마을 주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 피곤하지 않아? 매일같이”
“괜찮아요. 저는 야간순찰 ‘대장’이니까요.”
요즘 에밀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야간 경계와 순찰 임무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에밀이 이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야간 경계와 순찰 임무에 참여하는 이유. 그것은 에밀이 러셀에게 야간순찰 대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암살자들이 들이닥쳐 수리아 왕녀를 상처입힌 후부터 경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생긴 조치 중 하로 러셀은 에밀을 야간순찰 대장으로 임명했다.
러셀이 자신을 야간순찰 대장에 임명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가득했다.
“에밀 경계는 아주 중요한 거야. 내가 살던 곳에는 이런 말이 있어.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알았지? 그러니까 에밀의 책임이 막중해. 무엇보다 에밀을 믿고 있으니까 맡기는 거라고 알았지?”
‘대장’이라는 말은 아주 좋은 말이었다.
처음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러셀이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같이 야간순찰 조원들의 우두머리라는 말에 에밀은 뛸 듯이 기뻤다.
야간에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북쪽 어머니의 숲에서 오신 진짜 수호자들이 있긴 했지만, 러셀이 마을을 지키는 일에는 자신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러셀의 말로는 경계조를 짜고 관리하는 일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경계의 실패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막중한 책임에, 에밀은 러셀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아예 자신이 직접 매일 밤 목책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지옥 끝에서 구원해준 것은 이실리엘 님이지만, 모든 인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다시 살아갈 기회와 힘을 준 것은 러셀이었으니 믿음을 져버리면 안 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이렇게 매일 밤 직접 경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에밀이 무거운 책임감에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때 저 멀리 말 한 마리가 뛰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신성력으로 보이는 밝은 빛을 뿌리며 달려오는 말.
“기사 같은데? 러셀에게 보고해야 하나?”
주민들이 러셀에게 보고해야 하나 물었지만, 에밀은 ‘대장’ 이런 사소한 일은 직접 판단해야 하는 것.
“아뇨, 늦은 밤이고 무슨 용건인지 확인하고 보고해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건 이제 ‘대장’인 제가 처리해야죠.”
“뭐 대장인 에밀 말이 맞는 거겠지? 흐흐 우리 귀여운 대장님!”
에밀은 자신을 귀엽다고 말하는 턱수염 난 마을 아저씨의 말에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마흔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귀엽게도 턱수염이 자란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여운 모습인데, 나이도 많은 자신을 귀엽다고 하니 재미가 있는 것.
그렇게 턱수염 난 마을 아저씨의 귀여움에 속으로 미소를 지을 때, 목책 앞에 도착한 성기사가 목책 위를 향해 소리쳤다.
“성국에서 각지의 신전을 시찰 중입니다. 곧 마차가 당도할 터인데 마을의 출입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이번 시찰에는 추기경 예하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 예하? 예하라면? 신전에 높은 분 아닌가?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바보같이 예하라는 말에 목책 아래로 달려내려 가는 마을 주민. 에밀은 마일 주민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확인해야죠. 그냥 말만 믿고 열어주면 어떡해요!”
“아 참!”
에밀은 가슴을 치며 이래서 러셀이 딱 부러진 자신을 대장으로 삼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성국에서 온 높은 사람이라는 말에 대뜸 문을 열려는 마을 주민. 대장으로서 이따가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밀이 목책 밖으로 쏙 하고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저희가 성국에서 찾아온 걸 어떻게 믿죠?”
에밀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하자. 기사가 출입증을 꺼내 내밀며 말했다.
“여기 그란폴의 용병, 모험가 길드에서 발행한 출입증이 있습니다.”
그때였다. 에밀의 눈에 저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차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엄청난 신성력의 빛에 휘감겨 달려오는 것이 마치 성국이 아니면 어디서 왔겠냐고 되묻는 것 같은 모습.
그 모습에 에밀이 어색하게 웃으며 기사에게 말했다.
“어, 어서 오세요. 웜 포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밀도 딱히 딱 부러진 성격은 아니었다.
목책 문이 열리자마자 헬로나를 태운 마차는 엘프의 안내를 받아 신전으로 향했다. 마차가 도착하기 전부터 반쯤 열린 마차 문에 매달려 있던 헬로나는 마차가 신전 앞에 멈춰 서자마자 날 듯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차에서 날 듯이 뛰어내린 헬로나는 신전의 양개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시트라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신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트라! “시트라!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헬로나가 시트라의 이름을 부르며 신전 안에 뛰어 들어가 신전 중앙에 서자마자.
갑자기 헬로나가 열고 들어왔던 신전의 문 쪽에서 돌풍이 몰아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바람. 이곳으로 오는 내내 평원에서 바람이 불긴 했지만, 신전 안으로 몰아치는 맹렬한 바람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분노한 것 같은 느낌.
“이, 이 무슨. ”
‘이미 늦었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곳을 찾아와 어머님이 노하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성기사들과 헬로나가 그 자리에 엎드려 팔로 얼굴을 가릴 때 들려오는 소리.
무엇인가가 찢어지는 소리였다.
찌이익
눈을 뜰 수 없는 돌풍이 끝나고 고개를 들자. 그 엄청난 돌풍에도 신전 내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딱 하나 변한 것이 있긴 했다.
작은 신전은 모든 신의 성상을 제작해 가져다 둘 수 없기에, 작은 성상이나 각 신의 엠블렘을 깃발로 만들어 신전 내부 벽에 차례대로 걸어두는데, 그중 하나의 깃발이 바람에 떨어져 제단 모서리에 찢겨나간 것이었다.
헬로나는 깜짝 놀라 달려가 찢어진 깃발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깃발을 주워 든 헬로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떨어져 제단 모서리에 찢겨나간 깃발은 자신들 자애와 순결 교단의 깃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엠블렘 중앙이 뻥 뚫려 기묘한 모양으로 찢어진 깃발.
교단의 엠블렘을 여성을 상징하고, 빚긴 십자 표시는 처녀를 뜻한다. 그런데 그 처녀를 뜻하는 부분이 찢어져 뚫린 듯한 황망한 모양.
헬로나는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