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225. 해충 박멸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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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내가 진명이든 가명이든, 네 이름을 어디다 쓴다고…”
놈의 진명이라는 말에 가명이든 진명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당장 가계약 해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려는데, 내 말을 자르며 이실리엘과 로리엘이 놀란 얼굴로 내 양쪽 팔에 매달려왔다.
급기야 급한 마음에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둘.
“러, 러셀 잠시만요!”
“러셀 기, 기다려라!”
옆을 보니 다른 두 엘프도 모두 달려오는 상황. 나는 그들을 보며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 입을 막은 손을 확인하고 실리아 에게 질문하는 이실리엘.
“그 말, 틀림이 없는 거겠죠?”
이실리엘이 단호하게 물으니 실리아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무, 물론이지! 정령은 한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게 되어있잖아? 무, 물론 계약해 줄 때만이지만….”
조금씩 자신감이 줄어드는 것같은 실리아의 목소리. 실리아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자. 갑자기 이실리엘과 로리엘이 발작을 일으키듯 나를 재촉했다.
“러, 러셀, 무조건 계약한다고 하세요! 어서요!”
“그, 그래 빨리 무조건 대답해라! 어서!”
“아니, 갑자기 대답을 하라고 해도 진명이 대체 뭐길래…”
설명도 안 하고 무조건 대답부터 하라는 둘의 다급한 목소리. 그나저나 로리엘은 불의 정령과 계약 못하게 되어 실망하는 상황이었는데. 계약을 강요하다니 뭔가 있기는 한 것같은 느낌.
그때 옆에서 나디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쳤습니까? 실리아? 미친 정령이 되고 싶은 겁니까?”
“모, 몰라! 너도 몇백 년씩 세상 구경 못하고 갇혀있어 봐!”
“절대 안 됩니다! 정령왕께 분명 혼날걸요?!”
“호, 혼나는 건 나중일! 나는 지금 당장 계약할 거야!”
둘의 논쟁이 심화하자. 모여든 네 엘프가 나를 붙잡고 빨래 마냥 탈탈 흔들어대며 대답을 재촉했다.
“러셀 그냥 ‘한다.’ 한마디만 먼저 하세요. 바로 설명해드릴게요. 어서요!”
“그래! 러셀 불의 정령은 나중에 계약해도 된다. 내가 때 써서 미안했다! 어서 빨리 이실리엘님 말대로 한다고! 빨리 한마디만!”
“러셀 대답한다. 어서! 빨리!”
“대답 빨리한다요! 급하다요!”
네 엘프의 애원 담긴 간절한 외침과 빨래 마냥 나를 탈탈 흔들어대는 손길에 나는 그녀들의 조언대로 급하게 소리쳤다.
“계약한다. 한다고! 해줄게!”
나의 계약한다는 소리에 말싸움을 이어가던 정령들의 소란이 멈추고, 당황한 나디아를 뒤로한 채 실리아가 신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온몸에서 사방으로 작은 번개를 뿜어내며.
“이야호!”
밤하늘에 번쩍거리는 몸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소녀가 하늘 높이 솟았다 다시 내 옆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 아니 가슴? 그래, 마치 영혼에 울리듯. 촐싹대는 실리아의 목소리가 아닌, 엄청 진지한 실리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진명은 폭풍 속에서 춤추는 자. (Húro ëala liltië) 후로 에알라 ‘릴티에’ 입니다.]
그녀의 음성과 함께 손목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목을 바라보니. 손목에 실리아가 냈던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깜짝 놀라 손목을 바라보는데 무엇인가 매달리는 느낌. 고개를 들어보니. 투명한 몸의 실리아가 엘프들을 비집고 내게 매달려 있었다.
“뭐 뭐냐? 너 몸이?”
“러셀이 줬으니까. 몸을!”
북부에서 나를 내려줄 때도 바람 같은, 형체가 없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피부와 육체가 존재하는 것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실리아의 손을 만져보자 느껴지는 명백한 실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놀라 이실리엘을 바라보니 이실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러셀, 미안해요. 급해서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 진명이 뭐길래 그랬는지. 이제 설명해봐.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이실리엘이 그제야 설명을 시작했다.
이실리엘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정령과의 계약은 이름만 계약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계약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물질계에 머물고 싶어 하는 정령들의 열망과 물질계 존재들의 욕망이 어울려 만들어진 특이한 관계 정도로 정의하면 될 거라나?
정령을 계약한 자는 정령이 머물 수 없는 곳에서, 정령이 물질계에 머물 수 있게 해주는 대신 그 대가로 정령의 도움을 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정령을 계약한 인간이나 엘프나 이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러니 보통의 계약은 정령과 계약한 자가 정령을 물질계에 머무르게 해주는 데 필요한 것을 정령 대신 지불하고, 대신 정령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그런 관계.
그것이 정령과의 계약.
더군다나 언제라도 정령 쪽에서 일방적 해지가 가능하고. 원치 않으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다 보니 정령과 계약하는 자는 기본적으로 손해를 깔고 가는 것인데. 하지만 진명 계약의 경우는 다르다고 했다.
“진명은 정령의 진짜 이름. 정령의 숨겨진 힘의 근원 그것으로 계약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부탁을 절대 거절할 수도 없고, 거짓말도 안 되고. 그러니까 진짜 이름으로 계약하면 친구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하지…”
이실리엘이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한참을 고민할 때. 이야기를 듣던 로리엘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노예! 노예다!”
노예라고 외치는 로리엘. 그게 맞냐는 투로 다른 엘프들을 바라보자. 다른 엘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실리엘도 어색하게 웃으며 “그, 그래요. 노예라고 불러도 될지도…” 라며 어색하게 말을 끝냈다.
“이실리엘님 제가 추가로 조금 더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로리엘. 계약은 아무래도 일반 엘프들이 잘 아시겠죠.”
로리엘이 이실리엘에게 양해를 구하고 추가로 설명을 이어갔다.
로리엘의 설명을 찬찬히 들어보니. 진명 계약의 다른 점은 계약자의 부탁이 아닌 명령이 내려지면 정령이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수행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동등 아니, 정령이 우월한 관계가 아닌, 내가 절대적 갑이라는 이야기.
결국은 실리아는 내 노예를 자처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로리엘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이랑 몸이 생긴 것은 별개. 나는 실리아가 실체 하는 육체가 생긴 이유를 물었다.
“그럼 몸은? 왜 생긴 건데?”
“그건 실리아와 진명으로 계약해서, 둘 다 서로 정령계와 인간계에 반쯤 걸친 상태가 되어서 그렇다.”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뭐가 그렇게 기쁜지 활짝 웃은 표정으로 말하는 로리엘. 갑자기 말과 감정이 엄청나게 풍부해진 로리엘에 적응이 되지 않는 상황.
“음… 아마도… 엘프와 비슷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엥?”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멍한 표정을 짓는데 이실리엘이 팔짝팔짝 뛸 듯이 기뻐하며 품에 안겨 왔다.
“러셀! 잘됐어요!”
“뭐, 뭔데?”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들려오는 로리엘의 설명.
정령과 계약하면 정령이 물질계에서 머무는 데 필요한 것을, 계약자가 부담해야 하는데. 전생의 판타지 속에서와 같이 정령력을 소모하고 그런 개념은 아니라고 했다.
계약자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물질계 법칙에 벗어난 정령이 물질계에서 지어야 할 부담의 일부.
엘프들의 종족 특성처럼 일정 비율로 물질계에 주고받는 영향력 같은 것이 줄어들어, 육체를 단련해도 효과를 보려면 더욱 노력해야 하는 그런 것이라고 했다.
정령의 등급에 따라 비율이 다른데 상급인 실리아와 계약했고, 더군다나 진명 계약이니 노예 밥줄은 주인이 책임져야 하기에 내 부담 비율이 높을 거라고 했다.
아마도 절반은 넘을 거라는 게 로리엘의 의견.
“막 힘이 약해져?”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이미 있는 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후의 문제니까.”
“아니, 그럼 완전 손해 아냐?”
육체적 수련은 의미 없는 단계긴 했는데, 뭔가 좀 억울하네? 그렇게 뭔가 좀 억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로리엘에게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물질계의 영향을 덜 받으니 수명도 그만큼 늘어날 거다.”
목에 매달린 이실리엘을 바라보자. 이실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내 수명이 백 년이면 앞으로 70년 남았는데 그것이 두 배 정도로 늘어난다는 소리?
그래! 힘 그거 무슨 소용이냐!
사람이 오래 사는 게 제일이지!
진시황제도 마지막에 찾던 건 불로초 아니었던가!
아니, 이거 노예도 생기고 수명도 늘어나고, 일거양득, 일타쌍피, 도랑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한밤에 나와 엘프들 그리고 실리아의 웃음소리가 강변 부는 나디아의 쌀쌀한 바람에 실려 강을타고 평원과 바다로 흘러나갔다.
“시트라 씨 잠시만요.”
이미 온몸이 금빛으로 변해 뛰어나가려는 시트라 씨를 제지하며, 공중에 떠 있는 두 정령에게 말했다.
“너희들 ‘그거’ 해봐!”
“그게 뭔데?”
“뭘 말하는 것이지?”
뭘 말하는지. 못 알아듣는 두 정령. 그렇게나 자랑해놓고 이제 와 눈치도 못 채는 실리아 녀석.
“왜 너희들이 나한테 둘만 있으면 그거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거’?”
마음을 읽었는지 실리아가 나디아의 손을 잡아채고 하늘로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울리는 천둥소리.
우르르릉 우릉
툭 툭툭 후두둑
우리를 중심으로 길게 회전하던 회오리가 강에서 물을 빨아올리고 하늘에서 천천히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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