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26화 (226/352)

〈 226화 〉 223. 해충 박멸팀 4

* * *

‘나와 친구가 되어줘.’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친 도마뱀은 잠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뭔가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불 속으로 꽁무니가 빠지라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이실리엘을 바라보니 당황한 모습. 로리엘도 마찬가지인 얼굴이었다.

“거, 겁이 많은 친구인가? 다른 친구한테 부탁해봐요. 러셀.”

하지만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 다들 내가 마음속으로 부탁하자마자. 다들 허겁지겁 놀란 얼굴로 사라지는 모습.

‘뭐지? 세계수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아무와도 계약하지 못하고 장작이 모두 타버리자 로리엘은 망연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왜 이러는 거지?”

로리엘의 망연한 모습을 본 이실리엘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어, 러셀이 불의 정령과의 감화력이 낮을지도…”

“그냥 중급이상이랑 계약하면 안 되나? 세계수님도 상급 정도는 계약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세계수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보통은 하위 정령부터 차근차근 계약하는 게 순서라는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한 것이다.

“보통은 하급부터 계약하는데 그럼 주, 중급을 불러볼까요?”

“나, 나무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로리엘이 어느새 일어서서는 장작을 가지고 오겠다며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장작을 한 아름 든 로리엘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녀의 뒤로 다른 수호자 둘이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실리엘님!”

“어머, 에이리, 시리엘.”

“러셀 나쁘다. 우리만 뺀다. 좋은 일에!”

“맞다요. 러셀은 나쁘다요!”

아직도 중부어에 익숙하지 않은 둘은 이상한 말투로 투정을 부렸다. 대여섯 살짜리 꼬맹이들이 처음 말 배우는 것 같은 말투.

내가 갑작스럽게 시작된 일이라며 둘을 달래고 이실리엘이 자신이 데려고 나왔다고 하자. 둘의 투정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소환.

강변에 쌓은 장작에서 작은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몸집 큰 도마뱀과 작은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중급을 불러서 그런지 숫자가 확실히 줄어든 모습.

내가 조심스레 이실리엘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번에는 정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정령들에게 친구가 되어달라, 계약해달라 부탁했지만, 정령들은 재빠르게 머리를 도리도리 저은 후. 하나, 둘 재빨리 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이상하세요. 왜 이러지?”

이실리엘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

풀죽은 로리엘이 타다남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세상 끝난 표정을 지었다. 개껌 빼앗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잦아드는 애먼 불만 계속 쑤시는 로리엘.

그 모습이 처량하기가 그지없었다.

“불의 정령과 감화력이 확실히 낮은 것 같아요. 다, 다른 정령을 시도해보죠.”

이실리엘의 다른 제안에 다들 자신과 감화력 높은 정령을 부른다며 난리가 났지만, 로리엘은 모닥불 앞에서 애꿎게 잦아드는 불만 뒤적거릴 뿐.

그러나 에이리, 시리엘까지 나서 땅의 정령과 물의 정령까지 불러 계약을 시도해봤지만, 모두 불의 정령과 비슷하게 놀란 아니, 뭔가가 두려운 얼굴로 도망치는 것이 반복될 뿐.

“이상하네요. 불의 정령에 정말로 친밀도가 없다면 반대인 물에 정령에 친밀도가 높아야 하는데 물의 정령도 이상한 행동을 하고.”

“왜 그러지? 세계수님이 한 말이니 틀림없어야 하잖아?”

‘거짓말할 사람 아니, 신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원인을 몰라 답답해하고 있을 때. 이실리엘이 나와 사는 영향인지 아주 화끈한 생각을 내어놓았다.

화끈한 여자 이실리엘.

“세계수님이 상급 정령과 계약할 수 있다고 했으면 상급을 부르면 되죠!”

‘지금 이 자리에서? 상급을?’

실리아가 생각나서 이실리엘을 화급히 말렸다. 갑자기 한밤중에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 불고 난리가 날지도 모르는데, 걔를 불렀다간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 마을도 너무 가깝고 상급은 아무래도…. 좀….”

“아! 좀 조용한 친구를 부르면 돼요!”

“아니, 조용한 친구라고 해도 아무래도 상급이면….”

그러나 나의 만류에도 이실리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대 엘프어.

아마도 자신과 가장 친한 바람의 상급 정령을 부르려는 것 같았다. 다른 정령은 이실리엘도 중급 정도가 한계라고 했으니 말이다.

셀데 바 안다 베일 엘로 이데. (Seldë va Anda Vailë Ello Idë.)

긴 바람의 딸이 당신을 부릅니다.

툴 니 노드 스루. (Tul Ni Nod Súru)

북풍이여 이곳으로 오라.

이실리엘의 마지막 말이 마치 속삭이듯 귀를 간질이며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그란 폴이 있는 북쪽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부르르 몸서리가 쳐지는 차가운 바람. 그 차가운 바람에 급하게 로브 깃을 여미자. 이실리엘의 발아래 풀들에 서리가 맺히는 듯싶더니.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인상을 한 여성형의 정령이 이실리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서 이실리엘 앞의 풀 위로 살짝 올라섰다. 그러자 얇게 서리가 깔리는 소리 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등이 깊숙이 파인 긴 드레스. 파격적 패션 감각을 소유한 정령이었다.

“나는 상급 정령 북풍의 진 (Jinn of North Wind) 나디아. 롱 윈드여 나를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북풍의 진은 목소리도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전생 드라마 차도녀가 생각나는 이미지.

“계약을 부탁하려고 해요.”

“하아? 롱 윈드여 우리는 계약이 필요치 않음을 알 텐데 계약이라니?”

롱 윈드 핏줄은 바람의 정령과 계약이 아닌, 친구 관계라는 것을 바로 지적하는 북풍의 정령.

“아, 내가 아니고 제 반려 여기 러셀을 부탁하려고…”

“아, 네 수컷 말인가? 그런데 아기 롱 윈드는 아직인가?”

아마 우리의 첫날밤 관람객 중 한 분이셨던 듯한 반응의 질문. 갑작스러운 애청자의 등장에 당황하는 이실리엘.

“아, 아기는 아, 아직이고 일단 러, 러셀과 계약을….”

“계약은 하겠지만, 아기는 중요하다.”

아기라는 말이 부끄러웠던지. 이실리엘이 부끄럽고 놀란 표정으로 급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꿨지만. 꿈쩍 않고 아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북풍의 진.

롱 윈드가 많아져야 세상 구경 자주 한다고. 아주 압박이 장난 아닌 분들이었다.

이실리엘이 당황해 새빨간 얼굴로 침묵하자.

나디아는 곧 고개를 돌려 나를 향했다. 아기라는 말에 잠시 뒷전으로 밀렸던 내 계약을 진행하려는지.나를 바라보며 그대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나디아. 정령이라 그런지 마치 유령같이 다가오는 모습. 찬바람과 그녀의 싸늘한 표정이 왠지 어울린다고나 할까.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이미 내 앞에 당도한 나디아가 흡족한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바람에 나도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인상을 확 쓰며 이실리엘에게 말했다.

“너의 반려와는 계약할 수 없겠는데?”

북풍의 정령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놀란 표정. 엄한 불꽃을 쑤시던 로리엘 조차 이유를 듣기 위해 다급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왜죠?”

“가계약이 걸려있다. 이미 다른 정령에게 말이다.”

‘무, 무슨 계약? 아니, 이 세계도 계약 사기가 있나? 아니, 당사자 모르는 계약이 걸려있다고?’

당사자도 모르는 가계약이 걸려있다는 황당한 소리에 이실리엘을 바라보자. 이실리엘도 당황한 표정으로 나디아에게 말했다.

“예? 하지만 러셀은 누구와도 계약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맞죠. 러셀?”

“당연하지! 내가 누구랑 계약한다고.”

누가 내 카드를 나도 모르게 긁은 것도 아니고, 명의를 도용한 것도 아닐 텐데 당사자가 모르는 계약이 있다는 황당한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계약이라는 게 쌍방 합의인데 나도 모르는 계약이 걸려있다니.

“아. 너희들은 모를 수 있다. 가계약은 인간계를 돌아다니던, 정령이 정말 마음에 드는 정령사 감을 발견하면 점찍어 놓는 행위인데, 당사자는 좀 당황할 수 있다.”

내가 만나본 정령이라고는 실리아가 다인데. 어떤 새끼가 침을 발라놨단 말인가? 누군가 제 맘대로 나를 선점했다는 소리에 짜증이 솟아올랐다.

“아니, 제 맘대로 침 발라 놓는다고? 그 새끼 누군지 얼굴 좀 봐야겠는데? 그 새끼가 대체 누구지?”

내 옆에 바짝 붙어있던 로리엘도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두둔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중하급이 정령들이 도망간 것도 다 그것 때문인가 싶어 확인해보자.

“아니, 그러고 보니 중, 하급 정령들이 계약을 거절하고 도망간 것도?”

“맞다.”

역시 맞는다는 나디아의 긍정.

“그 새끼 어떻게 찾지?”

“네 손에 있는 가계약의 증표에 정령력을 불어 넣는다고 생각하고 힘을 움직여봐라.”

“아니, 그런 게 내 손에 있다고?”

깜짝 놀라 왼손 손목을 바라보자.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북부에 나타났던 늑대인간을 잡을 때. 성벽 위에서 실리아가 나를 땅바닥에 내려두며 실수로 만들었던 번개로 인한 손목의 상처. 마치 하늘에 내려치는 번개나 거미줄처럼 생긴 이 상처가 실리아가 제 마음대로 만들어둔 가계약 증거였던 것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