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213. 벚꽃 수확 10
* * *
쾅
때려 부술 듯 신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신전 입구부터 점점이 이어진 핏방울은 그녀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 같았다. 그 이정표를 따라 안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얼마나 급했던지 신전 중앙, 침대도 아닌 싸늘한 바닥에 몸을 누인 수리아가 있었다.
마치 잠들 듯 눈을 감은 왕녀.
전생의 동화 속에 잠든 공주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장면, 하지만 그녀는 잠든 것이 아니었다.
왕녀의 머리끝은 자기의 피로 검붉게 물들어있었고, 그녀의 아래 깔린 신전의 흰 돌바닥은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피를 찍어 휘갈긴 것처럼. 온 사방 그녀가 흘린 피와 그 피에 찍힌 사제들의 손이나 발자국들로 신전 중앙이 온통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근처 지쳐 나동그라져 숨을 몰아쉬는 사제 한 명과 그 사제를 대신하는 것인지. 또 다른 사제가 손에서 엄청난 빛을 뿜으며, 신성력을 수리아 왕녀에게 쏟아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신성력을 쏟아붓고 있는 사제도 온몸에서 땀을 흠뻑 흘리며 지친 모습. 곧 나가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시트라 씨!”
시트라 씨를 다급하게 찾자 내가 보이지 않는 쪽의 신전 돌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던지. 시트라 씨가 지친 모습으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모든 신성력을 쏟아붓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러셀 씨 어떻게 된 일이죠?”
“와, 왕녀님은요? 살 수 있습니까?”
“간신히 목숨은 붙여놨습니다. 피도 많이 흘리고 독도 한둘이 아니었어요.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살려야 합니다. 반드시!”
내 눈빛을 마주한 시트라 씨는 놀란 눈빛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수리아 왕녀가 없어지면 저도 심심해서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려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생에서 배운 바로는 분노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다. 인간이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 결과라고 했던가?
부정, 분노, 타협, 우울증, 수용.
전생의 그 연구와 학자의 그 말이 옳다면 지금 내 심리는 분노이리라. 내 안에 무엇인가가 끝도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지금 내 몸은 분노를 에너지로 타오르며 움직이는 것 같은 상태. 온몸은 비명을 지르지만 멈춰지지 않는 상태였다.
이실리엘과 리젤다에게 부축받아 여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로리엘! 시리엘! 에이리!”
쩌렁쩌렁 여관 내부를 흔드는 내 분노한 목소리.
즐거운 여관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변하고, 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피에 젖은 내 모습에 모두 놀란 모습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러, 러셀 무슨 일이에요? 피 봐! 피!”
“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 피 뭐야 어디야! 무슨 일에요! 다친 거 아니죠?”
발레리가 놀래 달려들고 플로라까지 달려들어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호들갑을 떨어대다 각자 이실리엘과 리젤다에게 제지당하며 끌려갔다.
지금 상황에 모두에게 각자 말을 해줄 수가 없었기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잘 들어, 수리아 왕녀와 사냥을 나갔다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와, 왕녀는 사,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어….”
내 말에 장내는 탄식과 함께 분노로 타올랐다.
“어떤 새끼들이 감히!”
“누굽니까 형님! 이 개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벨릭과 안톤이 분노를 토해내고 여기저기 분노를 참지 못하는 인원들이 끌어올린 기세가 여관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이실리엘 로리엘과 다른 수호자들을 데리고 마을 주변에 수상한 건 싹 다 잡아들여! 분명 암살자가 있을 거야. 쓸데가 있으니까 무조건 살려서 데려와야 해!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가 보면 내가 해치운 녀석들도 있으니까. 사람들을 데려가서 그놈들을 수습해 오는 것도 부탁할게, 마차와 수인들을 데려가야 할 거야.”
“알겠어요. 러셀!”
이실리엘이 로리엘과 수호자를 데리고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로리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관을 나가며 나를 잠깐 되돌아봤지만, 곧 이실리엘과 함께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실리엘과 수호자들이 사라지고 곧 천둥소리가 하늘에서 울리는 것으로 봐서, 이실리엘이 누구를 불렀는지 뻔했다.
우르르릉
오래간만에 풀려난 실리아의 천둥소리가. 마치 분노한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이실리엘과 수호자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엠마와 아우로라를 찾았다.
“아우로라 엠마는 지금 신전으로 가줘! 시트라 씨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부탁할게.”
“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시트라 씨와 헤어질 때 마지막 남아 치료를 이어가던 사제도, 모든 신성력을 쏟아부었는지 지쳐 숨을 헐떡거리며 나가떨어졌다. 상급 사제 둘과 시트라 씨가 달라붙어 치유와 정화를 쏟아 부었는데 간신히 목숨만 붙여둔 상태. 창백한 수리아의 모습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시트라 씨가 수리아 왕녀가 살 수 있는 확률을 올릴 수 있는 치료법을 제안했다.
“내키진 않지만, 여관에 계신 다크 엘프 죽음의 사제를 신전으로 보내주세요.”
“아우로라를요? 왜?”
“죽음의 사제는 생명력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을 근처에 흩어져 있을지 모르는 암살자들을 잡아들이라는 말에 그녀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다크 엘프 죽음의 사제. 희생물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치료하는 독특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아마 잡아들인 암살자들의 생명력을 배터리처럼 사용하려는 모양,
이실리엘이 잡아 온 놈들에게서 정보를 얻은 뒤 전부 생명력으로 전환해 수리아에게 쏟아부을 심산으로 아우로라를 불러달라 한 것 같았다.
엠마와 아우로라는 나의 부탁에 당연히 자신들의 일이라는 듯 간단히 대답하고 성전으로 달려 사라졌다.
“에밀은 평원 엘프들을 두 무리로 나눠서, 교대로 목책을 철저하게 경계해줘. 마을에서 아무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
“벨릭 너는 안톤이랑 사람들을 데리고 신전을 지켜줘라.”
“리젤다는 마을 자경대에 경계하라고 전해주고.”
그렇게 모두에게 임무를 전달하고 여관 안을 한번 둘러보고는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리고 제발, 다들 절대 다치지 마….”
“아, 알았어요. 러셀”
“알겠습니다. 형님.”
“알겠어요!”
내 말이 끝나자 모두 각자의 임무를 위해 달려 사라지고 여관 안에 남은 인원은 들은 내 눈치만 보고 있는 상태. 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마을로 향하는 내내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정령력을 끌어올리고 있었고,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을 쥐어짜 낸 것 때문이지. 몸에 탈력감이 쏟아졌다.
털썩
“러셀!”
“어머 어떡해! 자기! 자기!”
“괘, 괜찮아 자, 잠깐만 쉴게.”
그리고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에반을 찾았다. 수리아 왕녀의 호위로 온 처남.
“처남….”
“여기 있습니다. 형님.”
에반을 찾자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먼저 처남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에도 따라 나온다는 걸 무슨 일이 있겠냐며 거절한 건 나였으니까.
둘만의 데이트라 거절했지만 에반이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미, 미안해 왕녀님을 못 지켰어…”
“형님이라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헥터 이 개새끼!”
왕녀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처남인지라. 당연히 흉수가 누구인지 예상할 수 있었던지. 에반은 입술을 짓씹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벨릭, 안톤과 신전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나는 처남에게 신전 호위를 부탁한 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 장시간 끌어올린 정령력으로 인해 탈진하고 만 것이었다.
발레리와 플로라의 품이 주는 안락함이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따뜻함과 안락함 속에 정신을 차린 것은 욕조 안. 아무래도 땀과 피 때문에 목욕탕으로 옮긴듯했다.
“정신이 들어요. 러셀?”
발레리의 다정한 목소리.
내가 쓰러지자 화들짝 놀란 발레리와 플로라가 달려들어,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 간신히 버티며 목욕탕으로 끌고 왔다고 했다. 몸에 눌어붙은 수리아의 피를 씻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발레리의 말대로 수면 위로 끈적하게 달라붙은 피들이 뜨거운 물에 스멀스멀 녹아 올라오고 있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여 상태을 확인하자. 어느새 몸은 다 벗겨져 욕조 안에 밀어 넣어져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발레리도 흠뻑 젖은 상태로 보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자기, 이제 좀 괜찮아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욕조 안에서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는 플로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응, 괜찮아. 고마워. 수고했어.”
플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나보다 플로라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들짝 놀라면서 질색하기라도 바란 모양인데. 어차피 이미 하나를 넘어가는 순간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진리를 깨달은 나는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했을 플로라를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주저하다 잃을 뻔한 것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