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212. 벚꽃 수확 9
* *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와, 왕녀님!”
‘왜? 어째서? 분명히 전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히 몇 번이나 확인했고, 정령력으로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하지만 우리 뒤에서 나타난 놈.
나는 급한 마음에 왕녀를 던지듯 내려놓고, 왕녀의 능력 때문인지 바닥을 구르는 놈의 머리통을 쏘아 맞혔다.
시잉
“크헉”
그리고 놈의 죽음을 확인할 새 없이 어깨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왕녀를 안아 들었다. 떨리는 왕녀의 몸.
“아니, 왕녀를 내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윽… 활 맞은 것 보다 그게 더 아파! 아주아주 무엄해요!”
파들파들 떨리는 몸으로 내가 걱정할까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 떨리는 입꼬리.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내 눈빛에 불안감을 읽은 그녀는 그 상황에서도 나를 챙기려는 듯 말했다.
“괘, 괜찮아요. 이 정도쯤. 북부에서는 이 정도 다친 건 다친 거로 치지도 않으니까요. 윽…”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식은땀 한 방울이 턱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거칠게 그녀의 윗옷의 어깨 부분을 손으로 벌려 찢었다.
촤아악
“아읏… 러, 러셀님 부, 부끄러운데…”
화살이 파고든 그녀의 어깨를, 옷을 찢어 드러내자. 그녀의 뽀얀 어깨에 깊숙이 파고든 화살이 드러났다. 화살촉을 묶은 끈까지 그녀의 흰 살결 속으로 모두 사라진 상황.
그리고 화살을 맞은 피부가 천천히 퍼렇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독이었다.
“아픈 것 보다 부, 부끄럽네요. 하… 하하… 아윽…”
“아플 수도 있어요. 참아요!”
푹
“크으흑…”
소독이고 뭐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즉효성 독인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빨리 행동을 취해야 했으니까.
곧바로 단검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세로로 찢어 벌려 화살을 뽑아냈다. 그녀의 흰 살결을 가르는 칼날. 솟아오르는 검붉은 피.
수리아 왕녀의 몸이 파고드는 칼날에 파들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흰 목덜미 아래 핑크빛 머리카락을 헤치고 어깨 위로 거칠게 입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왕녀의 살결과 달콤한 체향이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입에는 그녀의 붉은 피와 입안을 화끈거리게 하는 맹독이 울컥 밀려 들어왔다.
퉷
몇 번을 빨았을까? 입 안이 얼얼할 정도의 독이었다. 나와 그녀의 주변에는 내가 뱉어낸 독기를 머금은 검붉은 피가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왕녀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독이 발린 화살인데 맞은 위치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이나 다리라면 묶어서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을 테지만, 어깨에 맞아 견갑골에 상처를 낸 화살은 뼛속까지 그 독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제기랄!’
일단 왕녀의 치마를 찢어 그녀의 상처를 최대한 싸맸다.
“끄흐응…”
상처를 동여매자 신음하는 왕녀.
“조금만 기다려요. 시트라 씨한테 가야겠어요.”
어서 빨리 사제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암담했다. 세계수에게 받은 부츠는 걷는 것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기에 왕녀까지 업은 나는 다시 절름발이일 뿐이었다.
절룩거리는 내 걸음. 내 위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왕녀.
더군다나 찢어 벌린 상처가 컸던지. 아니면 어깨라 동여맨 것이 약했는지. 왕녀의 어깨에서 흐른 피는 금방 그녀의 몸을 적시고 그녀를 둘러업은 내 손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왕녀님? 말 좀 해보세요.”
“네, 러, 러셀님…”
독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말이 어눌해지기 시작한 왕녀.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말을 끌고 그녀와 하류 쪽으로 한참을 내려온 상황.
빨리 뛰어도 시간에 맞출지 있을지 없을지 모를 지경인데 다리 또한 이 지경.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아셨죠? 헉… 헉…”
“하아… 하아… 러셀님 나, 나도 하고 싶었는데…”
왕녀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무엇인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한 걸음을 더 내디딜 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뭐 뭘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면 되지. 후우… 후우…”
“러, 러셀님 신부요… 나도 러셀님이랑 부족한 두 조각… 하아…”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나랑 고작 춤 한번 춘 것이 추억 전부인데, 그 먼 북부에서 이곳까지 날 찾아오다니.
공주라 그런지 아니면, 머리가 분홍색이라 머릿속도 꽃밭인지 고작 춤 한 번에 사랑에 빠져서는…
‘자기가 금사빠야 뭐야…’
“아니, 무슨 죽을 사람처럼. 괜찮아요. 안 죽어. 내가 살려버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알았죠?”
“러, 러셀님. 무서워요. 하아… 전장에서 주, 죽어야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텐데… 나 죽으면 우리 가족들의 묘 말고. 러, 러셀님 여관이 보이는 평원에 부, 부탁해요. 하아… 여기 마음에 들어요. 춥지도 않고… 하아…”
바보 같은 분이었다. 이분이 아직 우기를 안 겪어 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두 달 넘게 비만 오는데, 좋긴. 얼마나 살아봤다고 남부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가 나오는가?
나는 다시 그녀를 다시 추슬러 업었다.
“아니, 왜 자꾸 그런 소릴 해! 안 죽는다니까?! 후욱… 후욱… 정말! 개 같은 다리!”
다리 때문에 화가 났다. 급해 죽겠는데 빌어먹을 다리! 세계수도 부츠를 주려면 좀 뛸 수도 있는 것으로 줄 것이지 고작 걷는 정도라니.
화가 났다. 모든 것에게 화가 났다.
다 때려 부수고 다 찢어발기고 싶어졌다.
“혀, 현자님… 하아…”
“현자 아니고 러셀! 그리고 말 아껴요. 헉헉… 말할 기운 있으면 마을 도착할 때까지 버텨!”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말을 후회했다. 말이 없어지니 불안해진 건 나였으니까. 나는 잠시 후 그녀에게 참지 못하고 말을 걸고 있었다.
“왕녀님? 왕녀님?”
하지만 대답 없는 그녀.
전생에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 설마 이후의 장면이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부정하며 걷고 또 걸었다.
불안과 공포, 절망과 좌절 그리고 타오르는 분노. 다양한 감정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죽어가는 여자를 등에 업고 그녀를 살리기 위한 발버둥. 하물며 그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라는 사실은 나에게 최악의 기분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래 아, 알았어요. 헉헉… 어? 많이 아픈 척하면 내가 결혼해 줄 거 같으니까 일부러 그런 거죠? 알았어요. 해줄게! 해주면 되잖아. 후우… 다리 병신 둘이 반씩 해서 한쪽 하면 되잖아? 수리아? 수리아?”
“그래, 어차피 부인이 셋이나, 넷이나, 다섯이나, 여섯이나 사람 하나 죽인 놈도 살인자고 다섯 죽인 놈도 살인자인데, 까짓거 그래 합시다. 해! 생각해보니 하나가 넘는 순간 어차피 쓰레기 확정이었어! 허억 허억…”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내뱉는 절규.
“그래, 이 세계 왔으면 핑크 머리 공주 아내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하잖아? 후우후우… 아까 그거 무엄하다 아주 괜찮았어요. 이래서 전생에 공주, 공주 했나 봐요. 허윽… 그렇죠? 수리아? 수리아? 허억… 허억…”
비 오듯 쏟아지는 땀. 팔뚝에 흘러내려 손을 적시는 피. 왕녀님과의 핑크빛 데이트는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핏빛이 암흑으로 물들기 전 나는 그녀를 시트라 씨에게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도 마을은 시야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헉… 헉…”
왕녀를 업은 채 정신없이 강가를 따라 웜 포트로 향하고 또 향했다.
이 정도에 체력이 부족하지 않을 텐데 절룩거리는 다리로 걷는 것은 그냥 걷는 것보다 훨씬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늘어진 수리아 왕녀까지 업은 상태.
상황이 이쯤 되면 보통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협박하기로 했다.
“아무튼 수리아가 이런 식으로 죽으면. 서, 성국이고 뭐고 다 알아서들 하쇼! 헉헉… 세상에 제일 나쁜 새끼들이 줬다 뺏는 새끼들이야! 후욱 후욱…”
왕녀는 이제 완벽히 침묵한 상태였다. 내 등과 맞닿은 그녀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고동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미세한 고동이 끊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들을 협박하며, 나는 앞으로 또 앞으로 향할 뿐이었다.
혹시나 나타날지 모르는 다른 암살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정령력을 계속 끌어올린 채로 말이다.
장시간 정령력을 끌어올려 탈력감은 더욱 심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행운.
늦어진 나를 마중 나온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강가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웃다, 시력 좋은 엘프의 눈에 들어온 이상함에 이실리엘이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내 앞에 나타났다.
“러셀! 어떻게 된 거예요! 피!”
“이실리엘, 와, 왕녀님이! 빨리 시, 신전으로.”
“알았어요!”
이실리엘은 내 말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왕녀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왕녀님을 넘겨받자 그야말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왕녀를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날 듯이. 그렇게 목책을 뛰어넘어 마을을 가로질러 신전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순식간에 점처럼 사라지는 이실리엘.
그리고 뒤이어 리젤다가 달려 나타나 나를 품에 안았다.
“러셀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리, 리젤다! 흑… 내, 내가 실수한 것 같아.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리젤다가 나를 자신의 품 안에 넣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러셀 천천히 이야기해봐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땀 봐.”
나는 리젤다의 품에서 한참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리아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