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14화 (214/352)

〈 214화 〉 211. 벚꽃 수확 8

* * *

‘성의가 없었나?’

데이트의 어색함에 성의가 없다며 왕녀가 볼을 부풀리며 투정할 때였다. 하류 쪽 물가 풀숲에 고개를 처박고 뭔가를 맛있게 먹고 있는 물새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색한 상황의 호재.

이 어색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탈출할 적절한 상황.

나는 재빨리 활을 겨누며 왕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쉿!”

내 말에 투정하던 왕녀도 지금까지처럼 말을 멈춰 세우고 말 위에 몸을 엎드렸다. 사전에 약속된 행동. 그러나 말은 왕녀님의 움직임에 조금 놀랐던지 멈춰 서며 투레질을 해버렸다.

­푸르릉

말의 투레질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려 몸을 웅크리며 회를 치기 시작하자. 나는 들고 있던 활에 재빨리 정령의 힘을 끌어냈다. 평소라면 그냥 쏘았겠지만 좀 더 확실하게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날아오르려 푸덕거리는 새들의 위치가 정확하게 머릿속에 그려지고, 당겨져 있던 화살은 풀숲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추가로 두 발의 화살을 더 뽑아 풀숲으로 날렸다.

­퍼드득 푸드득

하지만 화살은 빠르게 날아갔으나 새는 전부 날아가 버린 상황.

“러셀님, 전부 이상한 곳으로 날아…”

그러나 물새가 아닌 다른 곳으로 날아간 내 화살에 의문을 품은 왕녀님과 내 귓가에, 거친 죽음의 비명이 들려왔다.

“커흑! 크억! 허윽…”

내가 정령력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이상한 곳으로 화살을 날린 이유.

잠시 정령력을 끌어올린 순간 물새와 함께 주변에 나타난 암살자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었다. 명백하게 왕녀를 노리며 활과 단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

재빨리 선공을 넣었지만 잠깐 머릿속에 떠오른 녀석들만 해도 십여 명.

등 뒤에 들려오는 비명을 뒤로하고 나는 수리아 왕녀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 말 너머로 굴러떨어졌다.

우리가 말 너머로 굴러떨어지자마자 들려 오는 날카로운 소리.

­시이잉 시잉 시이잉

곧바로 화살과 단검이 날아들었다. 머리 위로 단검과 화살이 날고, 그중 몇 발이 말의 몸에 박혀 들었다.

“히히이이잉”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렸으나 말의 행동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이 말의 마지막 단말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살이나 단검의 날에 독이라도 있었던지. 말은 곧 쓰러져 거품을 물고 바닥에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수리아 왕녀를 끌고 말을 엄폐물 삼아 단검과 화살이 날아오는 쪽으로 화살 두 발을 더 날렸다.

한발 한발에 정령력을 담아 적들의 면 전으로.

­씨잉 싱

“크어억… 흑…”

“뭐, 뭔가요?”

놀란 왕녀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이기에, 나는 기겁하며 나는 그녀의 머리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새 에삭스의 왕께서 즉위를 축하해달라는 건지, 저희 데이트를 방해하시려는 건지 사절을 보내신 듯하네요.”

“네? 데이뭐요?”

어떻게 왕녀가 이곳에 있는지를 알아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부의 사절이 우리의 첫 데이트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나타난 것 같았다. 하지만 눈치 없이 단둘만의 데이트에 난입한 축하객들은 퇴장시키는 것이 진리. 나는 천천히 축하객들의 퇴장을 준비했다.

이실리엘에게 선물로 받은 내 결혼 예물을 손에 들고, 위아래로 솟아오르는 말의 배를 엄폐물 삼아 정령력을 끌어올린다.

물가를 등진 우리의 반대편 수풀에 숨어있는 남은 암살자는 아홉.

대지의 정령들이 놈들이 누르고 서 있는 풀과 땅 위에 엎드리거나 몸을 숙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준다. 그렇게 놈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머릿속에 떠오른 놈들의 정수리를 향해. 전통에서 재빠르게 화살을 뽑아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시시시시시잉

마치 기관총처럼 하늘로 쏘아지는 화살. 옆에 놀란 얼굴의 왕녀님도 느껴진다.

하늘로 쏘아진 화살을 잡아챈. 이번에 나타난 바람의 정령은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인 것 같았다.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을 가슴에 한아름 안더니. 녀석들의 머리 위로 재빠르게 이동하며 마치 꽃꽂이하듯. 하나씩 부끄럽다는 듯 조심스레 녀석들의 정수리에 꽂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해진 사방.

데이트 축하객들은 빠르게 입장했다 빠르게 퇴장해버린 것 같았다. 조용한 데이트 장소에 남겨진 우리 둘.

“이, 이건…”

말을 엄폐물 삼아 엎드린 채. 놀란 얼굴의 왕녀님. 아마도 북부 출신이니 무엇인지 들어는 보신 듯했다.

“혀, 현자님 아니, 러, 러셀님 에, 엘프였나요?”

엘프의 궁술을 쓰는 내가 신기했는지. 놀란 눈으로 왕녀님께서 물어오셨다. 예전 리젤다의 모습이 생각나는 상황.

“제가 어딜 봐서 엘프로…”

“하지만 그건…”

“그냥, 어쩌다 보니 쓸 수 있게 되어서 저도 뭐라고는 설명은 못 하겠네요.”

“뭐에요 아까부터! 다 그런 식이야!”

아니, 저도 억울해요. 영혼이 원종이라서 아무 능력이나 다 된다는데, 그냥 쓸 수 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엘프들도 모른다는데…

억울한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뭔가 비밀이 많은 남자가 되어버린 기분.

토라진 왕녀님과 말의 육체를 모래주머니 삼아 한참을 엎드려 주변을 경계하길 한참. 혹시 근처에 남은 암살자가 있는지 정령력으로 확인까지 한 우리는 먼저 말을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말은 미약하게 숨만 쉬는 상황.

아마도 곧 죽을 것 같았다.

“말은 죽겠죠?”

왕녀의 말에 대한 걱정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했다.

“아마도요. 이대로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자, 업히세요.”

“예?!”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당황하는 왕녀.

왕녀는 걷지 못한다. 특이한 권능으로 인해서. 적들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업혀야 하는 것.

당황한 왕녀. 얼굴이 붉게 물든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는 것. 등을 내민 나에게 몸을 의지해 온다.

왕녀를 업자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저, 참 꼴불견이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러셀님에게 아내로 삼아달라고 하기나 하고 뻔뻔하게… 북부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여자는 부끄러운 건데…”

하지만 왕녀의 그런 말은 내가 몇 걸음을 내딛자 놀람과 걱정으로 바뀌었다.

“러, 러셀님. 언제 다, 다치신 건가요? 다, 다리가.”

그녀는 내가 절름발이라는 걸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신발을 얻은 뒤에는 거의 벗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세계수에게 받은 신발은 걷는 것 이상을 허락하지 않기에, 무리가 가는 행동이나 달리기 같은 건 할 수 없는데, 아마도 왕녀를 업으니 디딤발에 무리가 가는 모양이었다.

아마 복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말에 그녀를 태우지도 못하고 걸어서 복귀해야 하는데, 내 다리까지 온전치 못한 상황.

나뭇가지라도 하나 잘라 임시 지팡이라도 만들면 좋을 텐데, 이쪽에는 그럴만한 나무가 없다. 그러니 왕녀를 업고 천천히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실리엘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죠?”

“예, 북부에서 들어본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니까요.”

‘부끄럽게 무슨 북부에서 가장까지나.’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왕녀에게 다리를 저는 이유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걷지 못한다는 사실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어차피 나도 절름발이니까.

“그때 다친 거예요. 세계수님에게 받은 신발로 걸을 수는 있는데, 그 이상의 행동이나, 이게 없으면 저도 절름발이. 그러니까 왕녀님이 그런 사실로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 말을 듣고 왕녀님은 한참 생각에 잠겨 든 것 같았다.

“이상한 활도 쏘고 다리도 절름발이고 실망하셨나요?”

“아, 아뇨! 더! 더 좋아요!”

의심하지 말라는 듯 내 목을 더욱 꽉 휘감는 수리아 왕녀. 생각보다 증상이 심각하셨다. 나 그렇게 별로 대단한 놈도 멋진 놈도 아닌데. 왜 나 같은 놈을 좋아해서는.

왕녀의 핑크빛 머리카락이 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있다가 바람이 불어오니 시야를 가리며 얼굴을 간질였다.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왕녀의 엉덩이를 덥석 잡을 수는 없어, 양손으로 잡은 활대에 그녀의 엉덩이를 걸치고 한참을 걷는 도중. 아무 말 없는 왕녀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수리아 왕녀님. 제가 살던 곳에는 그런 말이 있었어요. 부부는 완벽한 두 조각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두 조각이 만나서 완벽한 하나가 되는 거라고요. 뭐 우리는 어찌 될지 더 겪어봐야겠지만. 왕녀님이 걷지 못하는 걸로 왕녀님을 평가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왕녀님은 그 후로 더욱더 아무런 말이 없으셨지만, 매달린 팔에서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놓고 싶지 않은 놓치기 싫다는 그런 마음 말이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가득한 핑크빛. 그 시야 속에서 왕녀를 업고 절룩거리며 천천히 웜 포트로 향했다.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그렇게 웜 포트로 향해가던 그때.

­시이잉

“윽…”

등에 업힌 왕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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