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209. 벚꽃 수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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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침묵은 죽음뿐이다.’
암살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문장.
대륙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암살 길드가 존재한다. 인간의 더럽고 추악하고 음습한 욕망을 이루어주는 이들.
귀족들의 후계경쟁이나 가문의 혈통 문제에서부터 경쟁 상회의 습격 등 피를 통한 침묵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나는 이들이니 말이다.
그런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암살 길드 중에도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세를 치르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유명세가 그들 중 최고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 중 최고는 누구인가? 그들의 정점은 누구인가?
고위 귀족부터 뒷골목의 부랑아, 빈민굴 빈민에 이르기까지. 대륙 최고의 암살자, 암살 길드를 꼽으면 누구라도 서슴없이 말할 것이다.
‘죽음의 연꽃’
암살 길드임에도 특이하게 정당하지 않은 살인은 하지 않으며, 그 어떤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전설에 가까운 암살 길드.
그들이 길드라는 것도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들이 다녀간 곳에는 연꽃잎 같은 칼자국이 남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뿐.
그러니 그들이 여인 서넛 정도로만 이루어진 길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그들이 원치 않는 제자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플로라!
사람을 화나고, 열나고, 당황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데 가장 큰 재주가 있는 아이.
선대 큰언니의 딸.
죽음의 연꽃은 항상 여인 셋으로 구성된다. 하나가 혹시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거나 결혼, 사망 등의 이유로 떠나면, 남은 둘이 새로 하나를 제자이자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구조.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 그들의 암살 능력의 근원이 되는 숨겨진 그림자의 여신이. 딱 세 명의 무녀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정확히 말하면 암살자가 아닌 춤으로 자기의 신을 섬기는 무녀인 것이다.
다만 수많은 숭배자에게 능력을 적당히 나눠주는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딱 셋에게만 능력을 집중해주는 신의 특성상 말도 못 하게 강하다는 것뿐이지…
그리고 여신이 정체성인 그림자라는 영역이 암살에 너무나도 어울린다는 것뿐.
그런 그림자 교단의 죽음의 연꽃의 역사에도 예외가 등장했으니.
그것이 플로라였다.
예외적으로 여신이 허락한 특별한 무녀. 맹약과 서약으로 나이를 많이 먹거나 결혼하거나 순결을 잃으면 능력을 잃은 자신들과는 다르게 제약과 서약 없이도 어린 나이부터 훈련받아 세 스승이자 이모를 뛰어넘은 아이.
그 플로라가 갑자기 한밤에 찾아와 당장 내일 멀리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필리나, 필리파, 필리사 여신이 준 이름으로 불리는 세 이모이자 스승은, 그렇기에 한밤중 잠에서 깨어 졸린 표정으로 애증으로 똘똘 뭉친 플로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동생이 바보같이 물품 대금 보증을 위해서 남부에 혼자 남았다나 봐요. 이래서 따라갔어야 했는데!”
분노한 표정의 플로라.
플로라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며 강해지고 싶다며 필리나를 따라온 지 십 년이 넘었다. 플로라의 생떼에 동생인 발레리를 노래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이곳에서 생활하게 한 적도 있고, 신도들을 이용해서 발레리를 항상 감시하고 있었지만.
상행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
신도 몇을 상행에 위장시켜 따라 보냈으나. 예상 못한 결과가 도착한 것이다.
플로라의 모든 것은 동생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그런데 그 동생이 아버지의 명으로 상행을 따라갔다가 남부에 남겨졌다는 것.
“그래서 남부로 간다고?”
“네! 아버지가 발레를 끔찍하게 아끼니.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남부로 가신다고 난리네요. 며칠 전부터 저를 찾았던 이유가 저를 데려가기 위함이라는데. 늙은이 속내가 뻔히 보이지만, 어쩔 수 없죠. 늙은이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정말! 앞으로 제가 없어도 발레리를 잘 부탁해요.”
담담하게 말하는 플로라였지만, 플로라의 말을 들어보면 늙은이가 플로라를 강제로 팔아먹으려는 것 같은데. 십 년 넘게 소중하게 키운 애증의 딸 같은 녀석이, 남부에 이름 모를 남자에게 팔려 간다니 그래도 슬플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예상했던 이별이었지만, 남부라니. 그곳으로 떠나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세 이모이자 스승은 눈물을 터드렸다.
하지만 자신들의 그런 슬픈 감정을 와장창 깨트리는 플로라의 한마디.
“저도 시집갈 거 같으니까. 이모들도 늦기 전에 시집이나 가요.”
막내 이모인 필리나도 이제 삼십 대, 첫째 이모도 이제 삼십 대 중반이니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나이에 예민한 이모들을 화나게 하기 충분했다.
역시나 사람을 화나고 열받게 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플로라였다.
“얘 너는 이렇게 슬픈 이별을 앞두고 그런 말을 해야겠니!”
“정말 플로라는 끝까지 플로라라니까…”
결국 이모들의 분노에 찬 배웅을 받고 플로라는 남부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리고 긴 여행 끝에 도착한 남부.
플로라는 거기서 물속에서 남자에게 안긴 동생을 보았다. 행복한 표정.
어머니를 잃고 어두워졌던 동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가 많은 술집에서 항상 생활해온 플로라가 둘의 표정에서 읽은 것은 사랑. 늙은이가 기함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미 저런 표정이면 볼 장 다 본 사이.
‘이모들과 이별에 눈물을 뽑지 않기 위해 모진 말을 하고 왔는데, 괜히 하고 왔나?’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별로 잘나 보일 것도 없는 남자가 아내가 셋이나? 더군다나 자신의 소중한 동생이 셋째?
하지만 그의 첫째 부인을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이나 플로라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외모인데, 저건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일단 그냥 엘프도 아니고 높은 엘프,
이모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누구라도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절대 피해야 하는 게 하나 있어.”
“뭐 용이라도 돼요?”
“아니, ‘높은 엘프’ 그것만은 피해야 해 무조건!”
‘높은 엘프에게는 절대 대적하지 마라.’
이모들이 자주 했던 말이었다.
뭐가 높은지 모르겠지만, 직접 보니 하나는 확실했다. 미모가 높다는 말이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냥 높은 도 아닌, 드높은 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미모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동생과 남자와의 이야기에서 플로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순종적이고 순진한 동생이 아버지 몰래 결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이건 볼 장 다 본 사이 정도가 아니었다.
포도주를 담근 사이가 아니라 이미 시간이 지나 포도주가 맛까지 든 사이랄까?
‘저 남자가 그렇게 좋은가?’
늙은이가 동생이 허락도 받지 않고 결혼했다는 사실에 기절까지 했지만, 동생은 결국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깨어난 늙은이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자신까지 덤으로 남자에게 준다는 말.
자신의 평가가 박한 것 같았지만, 플로라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수련한다는 핑계로 이모들에게 맡기고 발레리를 방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옆에서 이제 평생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젠 힘이 있으니.
동생을 지켜달라는 어머니의 유언.
‘못 지킬 줄 알았는데…’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을 밀어내는 남자. 플로라는 처음에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높은 엘프가 첫째 아내라서 눈이 높아서 그런가?’
처음에는 어차피 서부 여자들의 결정된 운명에 순응하려고 했고, 거기에 발레리와 같이 있을 수 있었기에 좋았는데.
서부 최고의 무희인 자신을 밀어낸다고? 이렇게 일관되게?
웃음 한번, 손짓 한 번에 가지고 놀던 남자들이랑은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었다. 자기가 알던 남자라는 생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인간과 엘프의 차이같이 자신의 알던 남자와 러셀이라는 남자의 차이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플로라는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남자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러셀을 괴롭히며 재미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여관에 벌레가 꼬이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여관에 도착한 후. 매일매일 버릇처럼 여관 내부를 순찰할 때 느껴진 벌레들의 기척.
하지만 놈들은 여관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로리엘이라는 엘프에게 정리되었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압도적 무력. 세상에 저 멍한 얼굴의 첫째 부인, 이실리엘의 부하가 저 정도라니. 플로라는 그제야 높은 엘프에 대한 이모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하가 저런데 하물며 높은 엘프 자신은 어떠하겠나.
그렇게 몇 번이나 침입을 시도하다 싹 쓸려나간 벌레들이 방법을 바꾸기로 했는지. 며칠 후 여관 안으로 벌레들이 꼬여 들기 시작했다. 위장한 모습으로 갑자기 몰려든 벌레들. 여관 내부가 전부 벌레였다.
‘누구를 노리는 거지?’
자신 말고는 놈들이 암살자인 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은 상황.
동업자이기에 놈들의 행동과 시선을 자신은 모를 수 없는 상황. 놈들을 일단 살폈다. 놈들이 누구를 노리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잠시 놈들을 주시하자 플로라는 놈들이 누구를 노리는지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은밀한 시야에서 느껴지는 표적은 분홍이.
자신을 질투하며 러셀의 아내가 되고 싶다던 북부의 공주.
‘그냥 가져가게 둘까?’
이참에 경쟁자를 하나 치울까 하다가 플로라는 웃어버렸다. 경쟁자가 많아야 더 많은 사랑을 차지했을 때 보람이 있는 것.
그날. 그렇게 음식에 독을 타는 두 놈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놈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제일 약한 놈, 두 놈을 손봐 시체 하나를 몰래 지고 여관 밖으로 나왔을 때.
플로라는 로리엘이라는 엘프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분명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는데, 자신이 여관 밖으로 나서자마자 유령같이 나타난 로리엘.
“저, 이, 이건 그러니까…”
뭐라고 변명을 하기 전에 들려오는 당황스러운 말.
“무겁지 않나?”
“에?”
로리엘이라는 엘프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갑자기 정령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맨발과 잠옷 바람의 두 다크 엘프가 허겁지겁 여관 밖으로 달려 나와 로리엘이라는 엘프 앞에 엎드렸다.
“부, 부르셨습니까?”
“저걸 도와주거라.”
“예, 로리엘님.”
다크 엘프가 엘프를 무슨 주인처럼 모시는 것도 신기한데. 로리엘과 다크 엘프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크 엘프의 안개에 휩싸여 시체들이 사라지고 플로라가 물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죠?”
“이실리엘님과 러셀을 위한 것 아닌가?”
“네? 그야 당연히…”
“그럼 됐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여관 안은 너에게 맡기지. 너희들도 러셀의 넷째 아내의 말을 잘 듣도록.”
“예, 로리엘님!”
플로라는 아무래도 자신이 시집온 곳이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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