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205. 벚꽃 수확 2
* * *
사리나는 진정으로 자신이 벌레만도 못한 미물이 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이제 저 남자와의 대화가 끝나면 저 무심한 눈의 엘프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짓누르겠지? 그러면 자신은 그야말로 벌레처럼 땅바닥에 짓눌려 체액을 토해내며 다리를 떨어댈 것이다.
머리에서 비가 오듯 땀이 쏟아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둑놈만 잡아. 벌레까지 잡으라 애쓰지 말고. 벌레는, 해만 끼치지 않으면 그냥 살려줘.”
“알았다. 러셀.”
“그래, 로리엘 수고해.”
달칵
창문이 닫히자 녹색 머리의 엘프가 단검을 천천히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단검이 자신을 가리키는 순간 사리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엘프는 그 단검으로 두 개의 시체를 가리키더니 마지막으로 목책 밖을 가리켰다.
사리나는 그 행동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의 벌레를 살려주라는 말은 자신을 살려주라는 말은 아닐 것인데, 엘프는 남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풀어 벌레만도 못한 자신을 살려주려 하고 있었다.
이마가 깨지라 땅에 박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사리나는 동료의 시체를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에서 떠났다.
그리고 엘프들의 경계를 피해 동료들의 시체를 끌고 한참을 달려. 집결지에 도착한 사리나는 태어나서 처음 마주했던 끔찍한 공포를 떠올리며 길드에 보고를 넣었다.
“금…. 금 등급 이상의 엘프 암살자가 여, 여관 외부에서 경계 중. 임무 불가능.”
사리나의 보고가 다크 엘프 암살자였다면, 아마도 길드에서는 사리나의 보고를 믿고 암살자 투입을 다시 생각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 암살자? 다크 엘프 정령 술사와 비슷한 조합의 단어였다.
무슨 소리냐 하면, 한마디로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소리.
엘프들은 활을 목숨만큼 사랑한다. 자신들의 머리카락으로 시위를 만들고, 부모자 자식에게, 연인이 연인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 활을 만들고 그 활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데 활을 놓고 단검을 든다고?
어둠 속에 다크 엘프를 엘프로 착각했던지, 사리나가 무엇인가에 겁은 먹어 기억이 혼란스러운 것.
말도 안 되는 사리나의 보고에 암살 길드 수뇌부는 은 등급 암살자 셋을 파견하는 것으로 진위를 파악하려 했다. 말도 안 되긴 했지만, 일단 동 등급 암살자 둘이 손도 못 써보고 죽었다니 상위 인원을 투입한 것.
다크 엘프를 잘못 본 것은 아니냐 물었지만, 사리나가 엘프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니 엘프를 잡기 위한 인원이었다.
엘프라면 대부분 궁수이고 근접해서 동시에 친다면 반드시 잡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이 궁수를 잡아내는 아주 기본적인 방법.
며칠 후 사리나는 원치 않았지만, 웜 포트의 목책 너머에서 몸을 숨기고 길드가 선택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웜 포트의 목책.
나무로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든 목책이 사리나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어떤 기준으로 보였다. 저 너머는 그래, 전설에나 등장하는 죽음의 땅.
은 등급 암살자들이 웃으며 그녀에게 따라 들어오라 했으나. 사리나는 결코 목책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서늘하고 무심한 눈빛.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경험에 양쪽 어깨를 끌어안고 슬픈 결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가 도착했다. 목책을 넘어 사리나 앞에, 세 개의 머리통에 던져진 것이다. 그 순간 사리나는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은 등급 셋이 담을 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각자 웃거나 미소를 지으며 떨어진 세 얼굴은 자신들이 죽는지도 몰랐다는 것을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사리나는 다시금 목책을 향해 한참을 조아리며 엎드려있다가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집결지에서 사리나는 어둠의 그림자 암살 길드의 최고의 암살자인 길드 마스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죽었다고?”
“동료가 뒤로 넘어가고 그 자리에 그녀가 서 있던 것뿐.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속도와 관련된 권능인가? 그렇게 빠르다니….”
은 등급 암살자가 셋이나 웃는 모습으로 죽었다는 보고에 달려온 길드 마스터와 금 등급 암살자 하나. 길드 최대 전력. 하지만 사리나는 둘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 엘프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리 둘이 같이 덤벼든다면? 직접 본 네가 보기에는 어떤데?”
길드 마스터가 웃으며 사리나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사리나는 고개를 처박고 조아렸다. 자존심 강한 금 등급 암살자들에게 ‘너희 가봐야 죽어’라고는 말할 수는 없는 일.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네? 그래도 눈여겨보고 있는 네가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너도 실력으로 치면, 은 등급 중간쯤은 될 텐데…”
살인자에서 길드 마스터에게 권유받아 길드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돼, 동 등급에 머무르고 있는 사리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길드 마스터가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이런 식으로는 물러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는데.”
목표는 보지도 못하고 길드 전력을 상당히 손실한 길드의 입장에서는 이제 자존심의 문제이리라. 사리나는 이후 일어질 결과를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덜덜
다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사리나는 사람이 죽으면 건넌다는 죽음의 강 너머의 땅에 들어선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길드의 마스터와 금 등급 암살자의 압박에 목책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여관 근처도 가지 않았는데, 목책을 넘자마자 그녀를 마주했다. 사리나는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웅크렸다.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리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셋은 마주하자마자 격돌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틱 틱틱
단검이 부딪치면 검날이 부딪치는 챙챙거리는 소리를 내야 했지만, 무엇인가가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를 먹어 치워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그림자를 넘나들던 셋이 뭉쳤다 떨어졌을 때. 어깨와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길드 마스터와 금 등급 암살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엘프는 처음 나타난 그 자리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 평온하게 선 상태였다.
[자, 잠깐!]
길드 마스터가 급하게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사리나의 생각대로라면 아마 첫 격돌에서 저 둘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노, 높은 분을 몰라뵙고, 이, 이대로 물러날 테니 모, 목숨을 살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엘프가 길드 마스터의 간절한 애원에 무엇인가 입을 열려 할 때.
화아악
길드 마스터가 쓴 능력인지. 갑자기 사방이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곧 바람에 날려 안개는 사라졌지만, 걷힌 안개 속에 드러난 것은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엘프의 등과 심장에 단검을 박고 있는, 길드 마스터와 금 등급 암살자의 모습이 사리나에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비릿하게 미소 짖는 길드 마스터와 금 등급 암살자.
‘이, 이렇게 허무하게? 저런 얕은 수작에 당할 리가 없는데?’
마음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엘프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던 사리나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사리나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때.
푸화아아악
엘프가 갑자기 불꽃이 되었다. 알몸의 불타는 아니, 불로 이루어진 엘프.
‘맙소사!’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프의 심장과 가슴에 깊숙하게 단검을 찔러 넣었던 길드 마스터와 금 등급 암살자는, 그 자리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숯 더미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사리나의 어깨에 느껴지는 감촉.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그 엘프가 자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쉬이이이
사리나는 그제야 죽기 직전 자신의 목표들이 어떤 마음, 어떤 상태로 자신을 보며 오줌을 지렸는지 알 수 있었다.
풀려버린 근육.
다리 사이에서 올라오는 오줌 냄새 속에 사리나는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살고 싶었다.
그렇게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 살기 위해 지껄였다.
[죄, 죄송합니다. 오, 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바, 바보 같은 놈들이. 아, 앞으로는 오,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 살려주세요.]
혹시라도 다른 곳에 들려 입막음을 당할까, 아주 작은 소리로 울부짖는 사리나의 귓가에 들려오는 이해 못할 목소리.
[어? 이제 안 오는 겁니까?]
[예, 다, 당연히 안 와야죠! 제가 못 오게 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못 오게 하겠습니다.]
사리나는 엘프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때 그녀가 물어왔다. 감정의 고저가 없는 특이한 목소리로.
[그러면, 당신을 죽이면 더 옵니까?]
[예?]
아마 그 누구라도 그대로 넘어갔을 물음이었다. 살인마 출신인 사리나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두 가지 행운이 사리나에게 따라줬다. 극적으로 몰린 혼란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과 살인마 출신이라는 그녀의 과거가 엘프의 말속에 숨겨져 있는 묘한 기대감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저 목소리의 의미를 알아챈 사리나는 급하게 말을 수정했다.
[사, 살려만 주신다면 더 오게도, 오지 않게도 원하시는 대로…]
아베느 왕국 삼대 암살 길드 어둠의 그림자의 남은 인원들의 운명은 그렇게 사리나에 의해 엘프의 손에 넘겨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