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205. 벚꽃 수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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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아베느 왕국의 암흑가에는 세 개의 암살자 길드가 존재한다. 검은 형제단, 뱀의 독니, 어둠의 그림자. 귀족들의 더러운 일을 대신해주고 돈을 받는 이들 세 길드에 어느 날 이상한 의뢰가 던져졌다.
의뢰인 불명. 일단 의뢰는 평범한 암살 의뢰였다.
의뢰의 내용과 의뢰인의 요구로 인해 결정된 의뢰 명은 ‘벚꽃 수확’
아베느 왕국 최남단 웜 포트라는 작은 마을 여관에 묵고 있는, 분홍 머리 여자의 멱을 따오는 것이었다.
아주 쉽고 간단한 문제. 여자 멱을 따오는 것이야 이들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다만 특이한 조항이 붙었다.
마을에 사는 주민이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할 것. 표적 이외에 다른 인명을 건드리지 말 것. 만약에 크게 일을 크게 벌였다 일어나는 일들은 당사자들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뜻 모를 조항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각 길드에 잠입해있는 밀정들을 통해 길드들은 모두 같은 의뢰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뢰주도 당연히 이 정도는 예상했을 테니 대놓고 경쟁시키겠다는 소리.
항상 서로에게 적대적인 세 길드는 그 사실에 더욱 기뻐하며 서슴없이 의뢰를 받아들었다.
의뢰 금액이 500골드라는 요 몇 년 암흑가 의뢰 중에 가장 큰 금액이었기도 했고 이번 기회에 경쟁 상대를 찍어누를 수 있는 기회이기에 세 길드는 망설임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이종족 보호구역이라는 것으로 지정된 곳이었지만, 보호구역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별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세 길드였다.
그곳이 엘프와 이종족 보호구역이라는 곳이 되긴 했지만, 대대로 그란 폴의 영지였기에 소유권을 포기하고 한참이 흐른 얼마 전까지도 암묵적으로 그란 폴의 영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 아베느 국왕이 돈벌이가 되는 그곳을 탐내 보호구역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붙여, 대늪지에서 나는 이익을 독식하려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왕의 직영지로 선포하면 그란 폴이나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 성국과 북부왕국에 뇌물을 조금 주고 벌린 치사한 짓 정도가 해당 지역과 보호구역에 대한 평가였다.
어둠의 그림자 소속 동급 암살자 사리나는 길드에서 붙여준 동료와 함께 웜 포트라는 마을에 잠입하기 위해 평원의 풀숲을 아주 조금씩 기어가는 중이었다.
머리 위에서는 태양이 작열하고 있지만,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오며 간간이 땀을 식혀주고, 땅바닥을 기는 개미와 굴에서 나와 풀을 뜯던 평원 쥐들이 사리나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 자기들의 동굴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렇게 평원을 기는 그녀의 옆으로는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료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
풀잎과 비슷한 초록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땀에 절어 반나절. 결국 마을을 목전에 둔 사리나는 그 자리에서 밤을 기다리기로 했다.
목표는 여관의 투숙객인 분홍 머리의 여자.
길드의 이름인 어둠의 그림자답게 자신들은 잠입과 은신을 전문으로 하는 암살 길드. 시골 마을에 잠입해서 목표물의 멱을 따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 사리나가 이번 일을 마치면 자신도 은 등급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기다림을 즐거운 마음으로 참아냈다.
같은 여자의 목덜미에 단검을 꽂아 넣고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평상시같이 가슴이나 주물러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언제나 목덜미에 단검이 꽂힌 여자는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때 가슴을 주무르면, 여자는 수치감보다 살기 위해 목덜미에 꽂힌 단검만을 부여잡는데, 그 점이 사리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정조나 수치심은 목숨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아주 재미있는 결과이니, 강간하겠다면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는 년들은 다 위선자라는 말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리나는 같은 여자를 상대로 한 이 변태 같은 짓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젖가슴 살인마. 그녀가 암살자가 되기 전 그녀의 별명.
죽인 여자의 가슴을 드러낸다고 해서 생겨난 별명이었다.
그렇게 마을 근처 풀숲에 누워 행복한 상상에 한참을 기다리자. 평원 너머로 마지막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리나와 동료는 전문가답게 풀숲에서 천천히 손가락부터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해가 완벽히 지고 한밤중이 되자 천천히 마을을 향하기 시작했다.
사리나가 동료와 함께 풀숲에서 일어나 마을로 조심히 접근할 때였다.
시이익
“크헉”
바람에 실린 이상한 소리를 알아채고 바로 엎드린 사리나는 살았지만, 그의 동료는 미간에 화살이 꽂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무슨!’
사리나가 기겁했다. 마을과는 아직 이백 보 정도 떨어진 상태. 한밤중에 우리보고 쏘아 맞힌다고? 더군다나 자신들은 녹색 로브를 뒤집어 검은색으로 바꾼 상태였다. 달도 구름에 가려 어두운 지금. 엘프가 아니고서는 자신들을 볼 수가 없는데?
엎드려 사방을 경계할 때. 멀찌감치 마을에서 조용한 한밤중의 적막을 뚫고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에밀! 갑자기 뭘 쏜 거야?”
“아, 풀숲에 뭔가 어른거려서요. 혹시나 몬스터인가 해서요.”
“엘프들은 그게 보이나 보지? 우린 하나도 안 보이니 허허”
“밤에는 저희만 믿으세요!”
지금 저 해맑은 목소리가 자기 동료의 이마를 화살로 쏘아 꿰뚫은 엘프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에, 엘프들이 있다고?!’
엘프들이 있다는 말에 사리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늪지 시골 마을에 엘프들이 있다는 말인가?
‘아뿔싸.’
그러고 보니 이곳이 대외적으로는 엘프와 이종족 보호구역이라는 것이었다.
엘프들이 있다면 야간에 이런 식의 침투는 불가능했다. 결국 사리나는 동료의 시체를 끌고 임시 집결지인 늑대 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 집결지에는 자신 말고도 동료를 잃은 암살자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자신과 다른 조인 듯했다.
“마을에 엘프들이 바글거린다!”
“미친! 엘프 마을이었나? 길드에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셋은 화급히 길드에 엘프들이 마을에 바글거리는 것을 보고했으나 길드에서는 남은 셋에게 임무 강행을 지시했다. 동 등급 암살자 셋이면 충분히 가능한 목표라는 길드의 지시.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일어난 일이니 남은 셋이 신중히 처리하라는 말과 함께.
아마도 아베느 국왕이 대외적으로 이종족 보호구역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엘프 몇 마리 데려다 둔 것이라는, 길드 내부의 회의 결과였다.
이틀 동안 엘프들의 경계 루트를 파악하고, 사리나는 다른 동료 둘과 함께 엘프들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기어서 목책으로 접근. 엘프들의 경계를 피해 마을 안으로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엘프들이 많기는 했지만, 실제 밤에 돌아다니는 건 네댓 명. 시골 마을인지라 경계망이 느슨한 편이라서, 역시나 침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같이 온 녀석들이 임무에 경쟁심이 심한 편인지 목책을 넘자마자 같이 움직여야 함에도 먼저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미 한번 피를 보았는데 이런 느슨한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사리나는 짜증을 내며 혼자 목책 위로 올랐다.
그리고 집 그늘에 숨어 달빛을 피하며 조금씩 여관으로 접근했다.
엘프들 때문에 바싹 긴장하며, 여관 근처 민가까지 은밀히. 앞서 사라진 동료의 뒤를 바싹 쫓았다. 그렇게 조심스레 이동하다 보니. 여관 바로 옆 건물에 멈춰선 동료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움직이지 않는 동료.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
사리나가 짜증을 내며 앞에 멈춘 놈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끄륵….”
갑자기 피가래 끓는 소리가 나며 동료가 그 자리에서 뒤로 털썩 넘어갔다.
그리고 놈이 서 있던 자리에는 달빛에 반짝이는 붉은 단검을 양손에 든. 녹색 머리의 엘프가 자신을 서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인마에서 암살자까지 사리나는 무엇인가를 죽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상대의 죽이고자 하는 감정을 느끼고 숨기는 것이 익숙한데, 저 엘프에게서는 죽이고자 하는 그 어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미 자기의 동료 하나를 죽였음에도.
그래, 마치 죽인다는 감정조차 자신과 자신들의 동료에게는 사치라는 듯.
굳이 말하자면 처리, 도축 당한 느낌이랄까?
그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오로지 한 감정. 자신을 같은 생명으로 보지 않는 무심함.
사리나는 엘프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주, 죽는다!’
꿀꺽
‘기, 길드 마스터를 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
그리고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일까? 좀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그녀가 지나쳐온 오두막 그늘에 동료 하나가 잠자는 것처럼 엎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 미친. 동 등급 암살자 둘을 나조차도 모르게!’
자신을 빼고 이미 모두 다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관 제일 위층의 창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벌컥
“거기 누구?”
“나, 나다 러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삭막한 분위기가 풋풋함으로 물들고, 사리나는 급변한 분위기를 이해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로리엘, 순찰하느라고 고생 많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냥 벌레가 몇 마리…”
풀린 분위기. 사리나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그늘에 몸을 웅크렸다.
[하악, 하악, 하악]
벌레. 그래, 자신은 저 엘프 앞에 그저 한 마리 벌레. 그늘에서 자신의 최후를 기다리며 사리나는 몸을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