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06화 (206/352)

〈 206화 〉 204. 대장간 7

* * *

아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이 떠지지 않아 머리를 움켜쥐고 한참을 끙끙대자 옆에서 이실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러셀,”

손에 쥐어지는 물컵. 이실리엘이 찬물을 따라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사랑스럽고 고마운 아내. 이실리엘이 준 찬물을 한잔 마시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말했다.

“고마워 이실리엘. 아우… 어제 너무 마셨나?”

노르딕 씨가 전속 대장장이가 되어주겠다고 해서 너무 기분을 낸 것 같았다. 숙취에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등골에 싸한 기분이 느껴졌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더군다나 내 고맙다는 말에 아무 대답도 없는 이실리엘.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이실리엘, 리젤다, 발레리, 플로라까지 침대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 대체 왜 아침부터 몰려와서 침대 근처에 서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그녀들의 실망감 가득한 눈빛이라니. 맙소사.

‘뭐? 뭐지? 무슨 상황이지?’

“무, 무슨 일이야?”

아무리 봐도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취는 어느새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뭐 뭐지? 왜 다 몰려와서? 서, 설마! 아내 의회인가?’

“러셀, 정직하게 이야기해줘야 해요.”

“뭐, 뭘? 대체?”

나직이 깔린 이실리엘의 압박하는 음성.

‘어제 술김에 뭐 잘못했나?’

나는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뭘까? 대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오지 않는 기억.

그때 이실리엘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믿을 수 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러셀, 혹시 나, 남자도 좋아하나요?!”

“뭣!?”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실리엘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어젯밤의 일들이 뚝뚝 끊기며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신나게 맥주잔을 부딪치며 노르딕 씨와 거한 술판.

발로나님을 찾으며 신나게 술을 들이켜고…

“발로나님 만세!”

“발로나님의 은혜! 우하핫!”

그렇게 신이 나서 술을 먹다가?

“내 드워프다! 드워프가 생겼다!”

­쪽

얼굴에 느껴졌던 풍성한 수염의 감촉. 맙소사!

“으아아아악!”

‘내, 내 얼굴!’

미친놈이 술을 처먹다가 뭔 짓을 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내 끔찍한 비명에 아내들이 나를 둘러싸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대공황!

“러, 러셀, 왜 그래요!”

“끄아아악! 수, 수염이!”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노르딕 씨가 우리 보호구역 전속 대장장이를 해준다고 해서, 너무 신이 났던 것뿐이라고…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냐…’

“아하하 뭐, 술에 취하면 그럴 수 있지. 나는 이실리엘님이 심각하게 모이라고 하셔서 무슨 일인가 했네. 자기 앞으로 실수 하지 않게 아니지, 앞으로 실수 할 거면 날 불러요. 내가 옆에 앉아 있을 테니까. 알았지?”

그래, 최소한 플로라는 이상한 오해는 안 했네, 무희 출신이라 술 취한 사람을 많이 봐서 그런가? 이런 걸로 안심되는 내가 슬퍼졌다.

“저, 저희는 노, 놀라서…”

다른 아내들은 죄를 지은 표정.

그래, 남편이 갑자기 남자 끌어안고 뽀뽀하면 놀랄 수 있지. 미친놈도 아니고.

이쪽 세계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지식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내들이 저렇게 모인 걸 보면 사소한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정말 조심해야지. 앞으로 내가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면 개, 아니, 고블린이다. 고블린!’

나는 무희 사건 때처럼 외치고 싶었다. 나는 정말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러나 참아야 했다. 피는 피를, 복수는 복수를, 오해는 오해를 낳는 법. 여자 좋아한다는 소리를 했다가 또 아내가 늘어나면 곤란하니.

지금도 아주 충분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만행에 놀랐을 아내들을 달랜 후, 끔찍한 기운을 씻어내고 싶어 목욕이나 하기로 했다.

“술이 너무 취했나 봐. 미안해 놀라게 해서. 발레리 미안한데, 한나 아주머니한테 아침은 그냥 스튜로 해달라고 부탁해줘.”

“알겠어요. 러셀.”

발레리가 사라지고 나는 지친 몸을 끌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푹 목욕하고 해장하면 괜찮겠지?’

해장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곳은 해장할 것이라고는 스튜뿐인 세상. 토마토 잔뜩 들어간 스튜는 해장에 아주 좋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얼큰하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에밀에게 평원에서 야생고추라도 찾아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지친 몸을 끌어안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자 선객이 있었다. 가슴까지 잠기는 탕에 목까지 잠긴 채 젖은 수염이 둥둥 뜬 그 모습.

“러셀님! 어서 오세요! 아… 어제 너무 마신 것 같아서 좀 깨려고 목욕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노르딕 씨였다. 그를 보자 간밤의 수염의 악몽이 떠올라 자동으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러, 러셀님?!”

여관은 목욕탕에서는 아침부터 나의 비명과 어쩔 줄 모르는 노르딕 씨의 음성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어젯밤의 흑역사와 아침의 소란이 사라진 웜 포트의 점심.

­탕탕 탕, 슥슥

여전히 여관은 망치질과 톱질이 한창이었다.

내 눈앞에는 노르딕 씨의 지시로, 보다 본격적으로 여관 수리에 임하고 있는 세 드워프가 있었다.

대장간을 만들어줄 때까지 할 일이 없으니, 이런 것이라도 해야 한다며.

덕분에 발레리는 로리엘과 수인 몇 명을 데리고 그란 폴로 향했다.

필요한 도구나 자재들을 주문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드워프들은 자기 공구는 자기가 만들어 쓰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으니 기본 도구는 필요했고, 노르딕 씨는 얼마나 의욕이 넘치는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셨다.

“자 이쪽을 잡아주거라.”

“네, 아버지.”

노르딕 씨의 딸 스나졸린 양도 성인이라 그런지, 일을 곧잘 돕는 걸로 봐서는 수습 정도는 되어 보이는 실력.

노르딕 씨말로는 자신은 수습을 떼고 대장장이가 되어 다른 곳으로 가던 중. 납치당하고 25년 정도 동굴에서 생활했다고 하셨고, 그의 아내는 잡혀 온 지 22년. 딸은 이제 스무 살.

아내도 20년 넘게 대장간 일을 거들어서 수습 이상은 된다고 하셨는데.

또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쪼꼬미들도 있고,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대장간 걱정은 끝이었다.

드워프 하나가 필요하다 했더니. 드워프 종합선물 세트를 보내주는 여신에게는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까?

아니, 이런 유능한 여신이 고작 드워프의 담당 종족 신이라니. 세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 우리 여관에서 유일하게 불이 항상 피어오르는 부엌 화로로 가서, 제일 고급스러운 잔에 제일 비싼 포도주를 한잔 따라 앞에 놓고. 두 손을 착 모으고 여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제가 여기 태어나서 감사라는 거 드려본 적이 없는데, 발로나님 한 테는 할 수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아궁이의 불꽃이 기묘하게 일렁거리는 듯 보였다.

­­­­­­­­­­­­­­­­­­­­­­­­­­­­­­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북부는 이제 겨울로 접어들 시기. 북부의 긴 성벽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조용한 산맥 아래 긴 성벽 앞에는, 전투의 뜨거운 열기 때문인지 내린 눈이 쌓이지도 못하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 시기는 가장 몬스터들이 날뛰는 시기. 겨울잠에 들어갈 녀석들과 식량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녀석들이 성벽으로 몰려들 시기이기 때문이다.

­촤아악

녹아내린 진창 위로 붉은 피가 뿌려졌다.

“끄아아악!”

“물러서지 말아라! 막아야 한다!”

병사들은 몰려오는 산맥의 검은 오크 무리를 성벽에서 막아 내는 중이었다. 성벽 아래에서, 성벽 위까지 날아드는 단창에 몸이 꿰뚫려 병사들이 하나둘 아래로 떨어지고, 성벽 위에서도 화살이 쏘아져 몰려드는 오크의 목숨을 빼앗는다.

검은 오크들은 이맘때가 되면 겨울을 대비해 북부에 추수한 곡식이나 인간을 잡아가기 위해서 성벽으로 몰려든다.

그렇기에 북부의 전선에서는 오늘도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용맹하게 싸우는 병사들을 전투에서 이끌어야 할 그들의 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왕은 지금 자신의 궁 안에서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며 기분 좋게 웃는 중이었다.

북부 다섯 왕국 중 북부 산맥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에삭스 왕국의 성안에서는, 모처럼 새 왕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즉위하고 하루도 그의 고성과 욕설이 떠난 날이 없던 궁성이었건만, 어째선지 그는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미소를 띠고 부하들의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그래, 그곳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고?”

“예, 얼마 전 성국의 추기경을 통해 알게 된 위치로 간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눈꽃 기사단의 에반이 장기 임무로 기사단을 떠나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의심 많은 왕인 헥터는 수리아가 현자와 같이 있다는 추기경의 말에도, 혹시나 다른 네 명의 국왕이 자기의 눈을 가리기 위해 성국을 이용. 장난질을 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부하들을 시켜 수리아의 행방을 현자를 중심으로 은밀히 확인하라 시켰고. 그 결과가 오늘 도착한 것이었다.

“그년, 현자의 품에서 그렇게나 사랑에 빠진 것처럼, 현자에게 키스까지 하더니. 결국 간 곳이 그곳이었군. 크흐흐”

“그런데 전하. 현자 옆에는 높은 엘프가 있습니다.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왕녀를 잡기가…”

“뭐라 왕녀? 그년이 언제까지 너희의 왕녀란 말이냐! 이놈을 끌어내라!”

헥터가 발작하듯 돌변해 외치자 경비병들이 몰려와 남자를 끌어냈다. 그러자 다른 신하 중 하나가 눈치를 보다 말을 이었다.

“그년이 높은 엘프 옆에 있기에 아무래도 저희가 직접 움직이기에는…”

“멍청한 놈들! 너희가 그래서 나의 신하이고, 내가 그래서 너희의 국왕인 것이다!”

말을 마친 헥터가 비릿하게 웃으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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