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197. 위탁 운영 11
* * *
그리고 잠시 후.
“어? 러셀? 이야기는 그것이 끝인가요?”
이실리엘의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이딴 한마디로 끝내기에는 사안이 좀 큰데, 사과 한마디로 뭉개려 한 것에 대한 지적인 것 같았다.
‘사과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 같은 놈’
“어?! 좀 더 잘못을 비, 빌어야겠지? 하, 한마디로 하기에는 내가 너무 했지? 그렇지?”
“아뇨, 할 내용이 그것이 끝이냐고요.”
“어? 내, 내용은 끝이긴 한데.”
혹시라도 사고 친 다른 내용이 없는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애니 말고 다른 여자는 없냐는 물음인지? 다른 내용은 없냐는 이실리엘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갑자기 단호한 이실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러셀이 한 이야기를 들었죠?”
“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아내들. 그리고 갑자기 폐회를 외치는 이실리엘.
“자, 용건이 끝났으니 그럼. 아내 의회를 끝냅니다! 시트라 씨!”
“뭐? 뭣?! 누구?”
이실리엘의 시트라 씨를 부르는 외침과 거의 동시에 내 방문이 벌컥 열리고, 시트라 씨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난입했다.
“러, 러셀 씨 대체! 이렇게 아플 때까지 고집을 부리다니!”
시트라 씨의 눈에서 눈물에 몇 방울 침대 시트로 떨어져 내렸다.
“시, 시트라 씨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시트라 씨와 갑자기 종료된 아내 의회에, 상황을 이해 못하고 나는 발작하듯 외쳤다.
“자, 잠시만요. 이, 이실리엘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하, 하지만 애니를 그냥 둘 수가 없었어! 애니는 그러니까… 파, 판결은…?”
“네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저희 전부 충분히 이해했어요. 러셀, 잠깐만 자고 일어나요. 알았죠?”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는 나를 시트라 씨와 리젤다가 붙잡고, 작은 요정이 반짝이는 가루를 뿌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멀어져가는 정신.머릿속에든 한 가지 생각.
‘사, 사형인가…?’
이실리엘의 샌드맨에 잠든 러셀에게 시트라가 고위 질병 치료를 몇 번이나 시도하고, 시트라가 부여한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축복을 떡칠하듯 두른 러셀의 몸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침대에 곤히 잠든 러셀.
러셀을 바라보며 이실리엘이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러셀이 하고 싶은 말은 애니가 고백해서 받아줬다는 말이었던 것 같네요. 무슨 큰일인가 했는데. 이렇게 아픈데 그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끌다니. 허탈하지만 한편으로 다행입니다.”
러셀을 잠재운 이실리엘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됐네요. 저도 발레리도 항상 뭔가 가로챈 기분이었는데 말이죠.”
리젤다의 말에 발레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 번 애니가 자신이 먼저라며 협박하듯 한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애니다운 귀여운 협박이었지만.
“러셀은 아마 저희가 애니가 러셀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발레리 물음에 플로라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을 시작했다.
“아니, 그걸 모를 수가 있나? 며칠 있지 않았던내가 봐도, 나 당신에게 상처받았어! 라는 눈빛이 가득했는데? 그런 눈빛은 러셀을 너무도 사랑하니 나올 수밖에 없는 건데. 그렇죠?”
플로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에서 묵었던 여자라면 애니가 러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러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존경의 눈빛으로 집중하며, 러셀의 부탁이라면 사소한 잡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 그리고 러셀이 부탁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미소를 떠올리는 그녀.
가끔은 아내인 자신들 보다도 더 러셀을, 사랑을 넘어 신봉하는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하는데,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벨릭 같은 사람만 아니라면, 남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여관에 적응하는데 헌신적으로 도운 사람도 애니 그녀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끼어든 연적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여자들인 자신들에게는 평소에 결코 어떠한 것도 내색하려 하지 않는 그녀는 그들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시골 처녀의 순박하고 풋풋한 사랑은 같은 여자들인 러셀 아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마음 같아서는 발레리처럼 러셀 몰래 방으로 집어넣어 강제로라도 한식구로 만들거나 러셀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러셀의 마음이 어떤지를 몰라서 안타까워도 마음속으로 애니가 용기를 내주기를 응원했었는데.
아마 길드에 둘만을 위해 만든 방에서 애니가 고백했던 것 같다.
자신들의 눈치를 보며 침대를 방에 밀어 넣던 애니의 모습. 발레리와 리젤다가 그것을 다시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푸훗 너, 너무 귀엽다! 아니, 하렘의 주인이! 아내가 하나 더 늘었소! 한마디면 되는 것인데. 어젯밤의 그 표정이 정말 바람피운 자책의 표정이었다니! 프흐흣! 이렇게 사과까지 하고, 아내 의회? 풋…. 이실리엘 님!”
플로라가 뭔가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이실리엘을 불렀다.
“네? 왜 그러죠. 플로라?”
“잠든 러셀이 너무 귀여워서 그런데, 키스 한번 괜찮을까요? 허락을 부탁드립니다!”
이전 아내 회의 때 리젤다가 남편을 기분 좋게 하는 행위는 이실리엘에게 허락받으라고 했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직접적으로 말하는 플로라의 대담함에 이실리엘과 나머지 아내들은 경악했다.
“넷?! 무, 물론이죠. 다, 당연히 됩니다. 그, 아, 앞으로는 언제든지 허, 허락받지 않고도 하셔도 됩니다.”
새빨개진 이실리엘이 대답하자 플로라는 냉큼 대답하고 러셀의 입으로 돌진했다.
“감사합니다. 이실리엘 님!”
츕
러셀이 잠든 틈 플로라가 참지 못하고 다른 아내들의 시선도 잊은 채 러셀에게 키스하자. 다른 아내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앞다투어 잠든 러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플로라처럼 대담하게는 못하고 살짝 입을 대는 정도로 말이다.
새빨간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트라도 러셀 아내들의 허락과 시선하에 부끄럽게 러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오늘 치료를 도운 일종의 상(?) 이었다.
러셀은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뭐지?’
“어? 몸이?”
“시트라 씨가 가만 놔두면 자기가 또 움직일 거라고, 하루 푹 쉬라고 탈력인지 뭔지 걸고 갔어요.”
‘아니, 무슨? 치료하러 온 것으로 보였는데, 저주를 걸고 갔다고?’
사제의 축복인 스트랭스를 반대로 쓰는 것이다. 힘이 강력한 몬스터들을 잡을 때 거는, 사제들만의 일종의 디 버프인데. 그걸 나에게 걸고 갔다니.
더군다나 이렇게 몸이 안 움직일 정도면 대체 얼마나 신성력을 때려 박고 간 것인가? 보통은 힘이 어느 정도 줄어드는 정도인데, 손가락 들어 올릴 힘도 없으니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침대 옆에 다리를 꼰. 미소 띤 얼굴의 플로라가 보였다.
“아니, 다른 아내들은?”
“저녁 시간이라 전부 거기 도우러 갔어요. 치료는 다 되었으니 하루 푹 쉬면 된대요.”
“사과해야 하는데…”
엉겁결에 끝나버린 사과. 강제 수면. 이야기는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고민 중에 플로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기는 참 신기해요.”
“뭐가요?”
나는 플로라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랄까? 아내가 넷인데, 자유 만남 한 번도 안 해본 숙맥같이 행동한다랄까?”
아내는 셋이라고 정정해주고 싶었고, 자유 만남이란 연애를 말하는 것 같은데, 뭐 안 해보긴 했지. 이실리엘도 리젤다도 연애보다는 결혼부터 한 느낌이니까.
“그리고 러셀은 여자를 모른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래,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같다니까요? 후후.”
생각 없이 내뱉는 플로라의 비수 같은 말에 어색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자, 플로라가 조용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애니 문제는 걱정하지 말아요. 여자라면 애니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러셀을 좋아했는지 당연히 알고 있으니. 러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애니가 중간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갔다고 생각하니까요. 잠깐밖에 못 본 나도 인정하는 거니까 그냥 푹 쉬어요.”
뭔가 애니를 칭찬하는 분위기? 대체 왜? 애니가 평가가 좋았나?
“그리고 여자들은 남편이 다른 아내를 들였다고 남편이나 새로운 아내를 미워하진 않아요. 그런 귀여운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걸까? 여기 이 머리인가?”
플로라는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고민은? 내 결심은?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나?
“애니가 러셀 좋아하는 거, 아마 이 마을 사람이 다 알걸요? 그리고 애니가 러셀의 다른 아내들 얼마나 도왔는지도 모르죠? 나도 여관 생활하는 데 도움 많이 받고 있었는데? 빨래도 해주고… 마을도 안내해주고…”
“예?!”
영문 모를 소리에 똑같은 대답만 내뱉는 나에게 플로라가 매혹적인 미소로 웃으며 말했다.
“자꾸 그렇게 귀엽게 물어오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츕
“이렇게?”
플로라의 말과 행동에 황당한 표정을 짓자 플로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나도 상처받으니까. 그리고 저, 자기가 모르는 재주도 아주 많은 여자예요. 알면 러셀이 깜짝 놀랄? 이런 표정 지으면 왠지 자꾸 놀라게 해주고 싶다니까?”
그녀는 나의 볼을 쥐고 흔들더니 그녀는 왠지 부끄러웠는지, 뒤로 돌아 방문을 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러셀이 일어났다고 말하러 가야겠다…”
남겨진 것은 그녀가 들려준 말과 행동에 정신이 나가버린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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