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196. 위탁 운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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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갑자기 무슨?”
이실리엘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그녀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하긴 아파서 누워있는 놈이 갑자기 아내 의회를 열어달라는데 놀랍긴 하겠지.
이실리엘에게 아내 의회를 부탁한 이유를 말하려는데, 우리 둘의 대화를 비집고 리젤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실리엘님 러셀이 많이 아픈 것이 확실해요! 이건 분명히 떨림열병 입니다!”
내가 환자가 확실하다는 리젤다의 확신에 찬 말투. 말이 거창해서 떨림열병이지 그냥 몸살을 말하는 것이다. 여긴 몸살을 떨림열병이라고 그러더라고?
술자리에서 ‘너 술 취했냐? 아니, 안 취했다니까?’ 논쟁이 생각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안 취했다니… 아니, 아픈 거 아니라고!”
“어, 어떻게 해…”
그리고 곧이어 발레리의 울음 섞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취했다는 말이 헛소리로 들렸던 것 같았다. 자꾸만 상황이 꼬여가고 있었다.
“아, 아니라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제발! 이실리엘 나 아픈 거 아니라니까?”
나는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셋에게 필사적으로 피력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침대에 일어나 앉는 바람에 머리에서 올린 물수건이 굴러떨어지자. 이실리엘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서는, 나를 자리에 다시 눕히고 진정시키듯 가슴을 천천히 두드리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러셀,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저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하지만 아내 의회를 열려면 먼저 회의가 필요합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아셨죠?”
이실리엘이 따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천천히 설명하며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어느새 내 머리에 다시 물수건을 올려준 이실리엘이 다른 아내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아내 의회 뭔가 복잡 하구만.’
나는 복잡한 아내 의회의 절차를 기다리며 잠시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다가올 운명과 아내들을 기다렸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나약한 정신력과 육체를 의지로 이겨내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이실리엘의 방에서는 러셀의 세 아내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러셀이 떨림열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증상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몸이 피로하거나 추운 곳에 오래 있으면 걸리는 떨림열병. 건강한 사람은 며칠 앓고 나면 낮지만,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이기에 셋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건강한 러셀이었지만 셋이 긴장하는 이유.
떨림열병은 증세에 따라서 열이 높거나 체력이 부족하면 헛소리하거나 헛것을 보는 일도 있는데, 러셀이 현재 약간 그런 상태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러셀이 크게 아픈 것이 확실합니다. 발레리는 플로라를 리젤다는 시트라 씨를 불러오세요.”
이실리엘이 단호한 표정으로 둘에게 지시했다. 러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러셀에게 아내 의회를 열어준다고 말하긴 했지만, 치료는 확실히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 하지만 러셀이…”
발레리가 주저하는 이유. 러셀이 치료를 거부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파서 러셀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일단 시트라 씨를 대기 시키다가 아내 의회는 시늉만 하고 빨리 끝낸 후에, 시트라 씨의 치료를 받게 하죠.”
리젤다가 역시나 둘째 아내답게 이실리엘의 마음을 눈치채고 발레리의 걱정하는 부분을 짚어준 것이다.
이실리엘이 리젤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아내 의회를 열어주지 않겠다고 하거나 시트라 씨에게 치료를 먼저 받으라고 하면, 거절할 것이 분명하니 그렇게 합시다.”
이실리엘에 의해 셋이 어찌할지가 결정되었다. 이제 행동에 옮길 때.
각자 자기가 맡은 사람을 데리고 오려 문밖으로 향하려 할 때,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리젤다가 문 앞에 멈춰서 이실리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열이 헛것이 보이거나 헛소리할 정도로 높지는 않은데 이상하네요? 더군다나 어제 잠을 못 잤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아플 러셀이 아닌데 말이죠.”
북부에서 비교적 흔한 떨림열병에 익숙한 리젤다가 러셀의 증상의 이상한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헛소리나 헛것은 보통 열이 높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에, 러셀이 지금 열이 있긴 하지만 헛소리나 헛것을 볼 정도의 열인지는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리젤다의 기억 속. 아까 짚어본 러셀의 이마는 분명히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었으니 말이다.
“그건…”
발레리는 비교적 떨림열병이 보기 힘든 서부에서 왔기에 이실리엘이나 리젤다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남편과 관련된 이야기니 이실리엘의 대답에 집중했다.
지혜로운 높은 엘프의 대답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오래 살아온 만큼 아는 것도 많을 것이니 말이다.
리젤다의 물음에 이실리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높은 엘프인 이실리엘에서 들려온 대답은 발레리에게는 좀 충격이었다.
“그, 그건 저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러셀이 아픈 것이 자기들 때문이라는 자책 섞인 대답.
“네? 저, 저희 때문이요? 어, 어째서?”
‘왜? 어째서? 우리가? 소중한 남편인 러셀에게 무슨 짓을 했던가요?’
발레리가 뭔가 자신들이 러셀에게 해가 될만한 행동을 했는지를 떠올리며, 놀란 얼굴로 이실리엘에게 되물었다.
약간 주저하며 발그레해진 얼굴로 마저 대답하는 이실리엘.
“러셀은 혼자. 저희는 셋. 밤마다 저희를 상대해야 하는 러셀인데 아무래도 체력이나….”
이실리엘의 말을 다 끝내지 않았음에도 발레리와 리젤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그 부분까지만 들어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
그래,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장어도 잡아서 먹이고 있고 북부에서 가져온 산삼이라는 것도 먹이고 있지만.
얼마 전 자신들이 야한 옷을 입은 것을 좋아한다는 러셀의 고백에, 몇 벌 더 산 야한 옷으로 최근에도 러셀을 기쁘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귀여움받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남편에 대한 안배가 부족했던 것.
그렇다 열은 확실히 낮더라도 셋을 위해 애쓰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낮은 열도 약해진 신체에 높은 것이나 진배없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이실리엘의 지혜로운 답변에 발레리는 러셀이 아픈 이유와 상태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셋이 부끄러움과 자책에 어쩔 줄 모를 때. 방 밖에서 러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실리엘? 아직 멀었어?”
“자 어서 빨리 움직이죠.”
러셀의 재촉하는 소리에 리젤다가 계단을 달려 사라지고, 발레리가 플로라를 찾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뛰었다.
“언니! 언니 어디 있어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방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이실리엘, 리젤다, 발레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빈 의자 한 개.
빈 의자의 주인 플로라는 연신 내 옆에 붙어서 나를 귀찮게 하는 중.
어젯밤에 만났을 때 무슨 순찰한다는 소리를 하면서 여관을 돌아다니더니, 내가 아프다는 소리에도 안 보이는 것이 어째 이상하다고 했는데. 아침도 안 먹고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플로라는, 방으로 들이닥치자마자 악어의 눈물을 짜내며 계속 이 상태였다.
“러셀 많이 아파요? 죽으면 안 돼요! 나랑 아직 첫날밤도 못 치렀는데, 과부를 만들 셈은 아니죠? 어뜨케…”
나를 걱정하는 건지 약 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플로라의 말에 정신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얘 누가 또 데려왔어?’
“하아… 이실리엘 아내 의회는 아직이야?”
나는 플로라를 어서 떼어내기 위해 이실리엘을 찾았다. 내 물음에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이실리엘이 깜짝 놀라며 플로라에게 지시했다.
“프, 플로라 자리에 앉으세요. 아, 아내 의회를 시작합시다.”
“넷! 이실리엘님.”
플로라가 이실리엘의 지시에 의자에 앉고, 나는 바로 이실리엘에게 물었다.
“이실리엘 언제 말하면 돼?”
“아, 아 참. 아내 의회를 시작합니다. 러셀 말씀해 주세요. 저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죠?”
갑자기 아내 의회를 신청해서 그런지 이실리엘의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다.
어떻게 무릎을 꿇어야 하나? 도개자를 박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나는 일단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머리에서 떨어진 물수건을 침대 머리맡에 걸치고,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우…”
투둑 툭
긴장한 내 뒷 목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자 놀란 이실리엘의 입에서 명령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러셀, 누워서 이야기하세요.”
“아냐, 꼭 이렇게 말해야 해.”
“지금 눕지 않으면 아내 의회를 끝내겠어요!”
나는 고집을 부렸으나 이실리엘의 반협박에 다시 자리에 누워 물수건을 올린 채 팔로 얼굴을 가렸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내들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드라마 같은 데서 바람피우다 걸린 새끼들은 그렇게 뻔뻔하던데 나는 왜 이렇게 가슴이 뛸까? 그래, 내가 이렇게 소시민 마인드니. 용사나 대마법사 이런 것 아니고 고작 종마 아류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
“미…”
“미?”
아내들과 플로라까지 내 미라는 말을 따라 하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몰려드는 시선에 미안함과 부담감을 느끼며 외쳤다.
“미안해 모두! 애, 애니에게 아내로 받아준다고 약속하고 말았어! 셋에게 상의도 없이. 정말 미안해!”
내 말이 끝나자 방안은 고요라는 괴물이 집어삼킨 것 같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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