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97화 (197/352)

〈 197화 〉 195. 위탁 운영 9

* * *

“앞으로 애니도 내 아내니 서로 싸우지 말고 잘 부탁해!”

“아내 정도는 내 마음대로 넣을 수 있잖아?”

“어떻게 그렇게 되어버렸어. 미안해!”

“죄송합니다. 부디 선처를!”

어제의 내가 오늘에 나에게 토스한 거대한 문제는 마차를 끌고 가는 와중에도 딱히 어떤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사와 상황을 머릿속에 계속 시뮬레이션 돌려보지만, 머릿속은 연신 오류를 토해내고 있었다.

남부의 평원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내 마차같이 시원한 해결책은 과연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상황으로 봤을 때 이실리엘이나 리젤다, 발레리가 딱히 나쁜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쏴아아

남부 평원에서 부는 바람이 무릎까지 자란 풀들을 쓰다듬자. 여기저기에서 풀들이 바람결에 거칠게 나부끼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 소리가 조금은 가슴을 달래주었지만, 덜어지지 않는 고민을 한가득 실은 나의 빈 마차는 웜 포트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지친 몸과 지친 정신을 끌고 멈추지 않고 달린 마차가 웜 포트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나는 목책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마을 남자들과 평원 엘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집에 가는 길임에 발걸음이 가벼워야 했지만, 걸음의 무게는 천근만근.

일단 말을 마차에서 풀어 마구간에 집어넣고 지친 걸음으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어제도 씻지 못했으니 피곤하지만, 목욕이 간절했던 것.

그리고 혼란스러운 내 마음도 좀 씻어내야 했다.

‘목욕하면 좀 나으려나?’

작은 통을 꺼내 물을 데웠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통. 큰 탕의 물을 데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혼자 씻기에 적당한 목욕통에 물을 넣고 라바락으로 물을 데운 것이다.

“아…. 뜨듯하다.”

목욕통에 몸을 집어넣자 밀려드는 따스함과 편안함. 수건을 하나 개 머리 뒤에 두고 몸을 편안하게 뉘었다.

하지만 이 편안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가슴에서부터 곧 불편한 감정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보통 이렇게 피곤하면 뜨듯한 물속에 몸을 담갔을 때 잠이 쏟아져야 정상이건만, 정신이 또렷해 잠조차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목욕탕에 비치되어있던 가운을 하나 주워 입고 옷가지를 들고 방으로 향했다.

죄인에게 평안은 없었다.

­뚜벅뚜벅

일 층을 지나 이층 계단을 오르는데.

“왁!”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플로라가 나를 덮쳐왔다. 벽에서라도 튀어나왔는지 대체 저 큰 가슴 달린 몸을 어떻게 숨겼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타난 플로라 때문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으아앗! 까, 깜짝이야!”

‘하… 시바. 애 떨어지는 줄.’

나는 화들짝 놀라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며 플로라에게 항의했다. 지금이 장난이나 칠 때란 말인가!

사람들이 다 자는 시간이니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말이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꺄르륵! 자기 왜 이렇게 깜짝 놀라요? 무슨 바람피우다 놀란 남자처럼!]

진짜 플로라의 직업은 무희가 아니고 무슨 사막의 마녀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정곡을 후비는 플로라의 말에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뭐? 뭐라고요!]

[어머 진짜 놀라네? 정말 바람이라도 피웠나?]

음흉한 목소리의 플로라가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짓궂은 개구쟁이처럼 말이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시전하고 있다는 듯이.

[그게 대체 무슨! 그나저나 이 한밤중에 안자고 뭐해요!]

[그냥 밤에 순찰이랄까?]

플로라가 팔찌를 찰랑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무슨! 한밤중에 무희가 순찰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플로라에게 짜증을 내며 다시 말했다.

[얼른 일찍 자요! 한밤중에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치… 러셀, 나 잠 안 오는데, 그러지 말고 재워주고 가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요! 나도 어제도 한숨도 못 자서 피곤하니까!]

나는 짜증을 내며 플로라를 뒤로하고 삼 층으로 향했다. 플로라랑 더 엮어봐야 피곤만 가중될 뿐이니 자리를 재빨리 피한 것이다.

상층으로 향하는 내 뒤로 플로라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잘 자고 내일 봐요~ 내 사랑~]

흥얼거리는 목소리. 아무리 얄미워해도 노여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플로라의 고무줄 같은 멘탈이 지금은 조금 부러워졌다.

나도 저렇게 뻔뻔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내방으로 향했다.

­삐그덕

방문을 열고 테이블에 옷가지들을 던져둔 다음 어두운 방 안에서 익숙한 위치를 찾아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로 손을 뻗자.

­뭉클

말랑한 무엇인가가 잡혔다.

“아? 러셀 다녀왔어요?”

그리고 곧 이실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한밤중에도 밝은 눈을 가진 엘프. 당연히 내가 누군지 금방 알아챈 것이었다.

이실리엘의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쓰려지는 속.

양심에도 통증이 존재하고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해야 한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을 나는 이렇게 부르고 싶다. 양심통 이라고.

남편이 사고치고 온 줄도 모르고 내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실리엘을 보니 양심이 아픈 것이다.

“으, 응 내방에서 자고 있었네?”

“오늘은 제 순서거든요.”

아내들은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 순서대로 나와 잔다. 오늘은 이실리엘의 차례였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마자 이실리엘이 품 안으로 기어들며 물어왔다.

“일은 잘 마치셨나요?”

“으응…. 잘 마쳤지.”

일을 잘 마쳤다는 말에 이실리엘이 꼭 달라붙어 왔다. 그리고 품속에서 갑자기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애니….”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놀란 눈으로 품속의 이실리엘을 내려다봤다.

‘어, 어떻게 알았지?’

이실리엘이 품속에서 꼬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아암… 애니도 잘 신경 써주세요. 너무 길드에만 두었다고 멀리하면 애니가 슬퍼할 거예요…”

잠결에 하품하면서도 착하게도 애니를 챙겨주라는 이실리엘의 말. 양심이 찌릿하게 울렸다. 나는 이실리엘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 그래야지. 우, 우리 직원인데….”

“직원이… 애니…”

“어? 이실리엘?”

이실리엘은 어느새 내 품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아마 살짝 깼다가 다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어둠에 익은 눈으로 이실리엘의 얼굴을 바라보니 곤하게 잠든 이실리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 진짜 뭐라고 하지?’

나는 이실리엘의 그 잠든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치트키를 한 번 더 쓰기로 했다.

내일의 나에게 다시 한번 토스하는 것.

나는 내일의 나에게 다시 한번 행운을 빌며 이실리엘을 품에서 어떻게 그녀에게 말을 꺼낼까를 고민하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란 놈 못난 놈.’

나는 다음 날 아침을 준비하지 못했다. 늦은 시간에 잠들어서 못 일어났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세계 다시 태어나서 감기 따위도 한번 걸려본 적 없는 내 몸이 몸살이 난 것이었다. 어제 밤을 새우고 온종일 마차를 몰고 와서? 아니면 새벽에 혼자 목욕해서?

아니, 아마도 양심에 찔려 몸이 반응하는 것이리라.

‘나약한 몸뚱어리 새끼 아니, 나약한 정신 새끼인가…’

어제 애니에게는 어떻게든 해본다고 해놓고는 한마디도 못 꺼내고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약간의 열과 함께 근육통. 전형적인 몸살의 징조였다.

“러셀, 괜찮아요?”

“많이 아프면 시트라 씨를 불러올까요?”

“한나 아주머니께 약초를 받아올까요?”

“아, 아냐 난 괜찮아.”

아침 준비를 돕자마자 내방에 모여든 아내 셋은, 내 이마를 만지며 아주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물어왔다.

몸살감기 따위에 아내들이 걱정이 너무 지나친 건 아니냐 생각할 수 있지만, 이쪽에서는 저것이 상식적인 일이다.

이쪽에서는 큰 병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영양 섭취가 불균형하거나 먹고살기 힘든 사람이 많으니 작은 병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내들의 저런 모습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그녀들의 주변에도 감기나 몸살 따위가 큰 병이 되어 죽은 사람은 한둘쯤을 있을 테니 말이다.

“안 되겠어요. 시트라 씨에게 부탁해야겠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셋 중, 리젤다가 뭔가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발레리와 이실리엘도 고개를 끄덕여 리젤다의 의견에 찬성한다는 뜻을 전했다.

둘의 찬성에 리젤다가 시트라 씨를 데리러 방에서 나가려 할 때, 나는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외쳤다.

“자, 잠깐! 셋에게 할 말이 있어! 제발 잠깐만!”

내 외침에 문을 열고 달려 나가려던 리젤다가 놀란 눈으로 다시 방으로 되돌아오고. 다른 둘도 놀라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침대로 모여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이실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실리엘 부, 부탁이 있어.”

“뭐, 뭔가요 러셀?”

내 부탁이라는 말에 이실리엘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아….”

“아?”

“아내 의회를 열어줘!”

사나이 러셀! 정면으로 나아가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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