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190. 위탁 운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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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무척이나. 무엇이? 양심이.
내 양심이 아픈 이유. 애니 때문이다.
처음 애니가 나에게 들이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나에 의해서 여관 직원으로 고용되긴 했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해고되는 순간, 잠시 보류되어있던 자신과 가족들의 예정되어있는 비참한 삶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는 자신들의 가족을 구해준 모습이 멋있거나, 주변에 자신처럼 결혼 적령기를 지난 남자가 나뿐이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뭐 나도 이실리엘이나 리젤다가 나타나기 전에는 애니에게 휘둘리다가 이렇게 결혼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한나 아주머니가 있는데 애니와 그런 관계가 되는 것도 조금 그렇고, 사장과 직원이라는 관계로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전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애니와의 이런 관계가.
위계에 의한 뭔가 그런 느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실제로는 반대긴 했지만.
더군다나 내가 애니에 대한 어떤 생각을 정리하거나 마음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를 먼저 좋아했던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받아들이게 되어버렸고,
발레리와 현재 진행 중인 셋까지. 아니, 둘.
당연히 애니한테 미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애니 한테는 기회도 주지 않고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는데, 다른 여자들은 계속 받아들이며 일부에게는 기회라도 허락한 상황이니까 말이다.
아마 요즘 나를 대하는 그녀의 싸늘함도 그런 불만의 표현이겠지?
애니에게 밤에 만날 것을 부탁하자. 싸늘한 얼굴과는 다르게 애니는 알았다고 대답을 해왔다. 나는 일단 첫 관문을 넘긴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애니와 만날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보내야 했다.
일단 어떻게든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생겼지만, 조리장을 하겠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 말이다.
시르케의 연주와 발레리의 춤이 곁들어진 떠들썩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와 내일 아침 요리에 사용할 재료들을 다듬어 준비해두자 부엌의 일이 끝났다.
사람들이 저마다 탕으로 이동하고 직원들도 목욕을 돕기 위해 모두 탕으로 향했다. 아마 모든 사람이 목욕을 끝내고 나서야 직원들도 몸을 씻고 나올 테니 한참 시간이 걸릴 것이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약속 장소에 나가서 먼저 기다리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여관과 애니네 집 근처 여기저기 널린 밴치였다. 밴치는 사냥철에 밖에서 식사하는 손님들을 위해서 급하게 그란 폴에서 사 온 것인데 그 후에는 바비큐를 굽거나 할 때 사용한다.
손님이나 직원들이 햇빛을 받으면서 일광을 즐기기도 하고 말이다.
밴치 중 하나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별 본 지도 오래되었구나. 이실리엘과 별 자주 보기로 했는데, 요즘 거의 보지 못했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깨었을 때는 이미 하늘은 어두워진 상태였다.
“아, 언제 잠들었던 거지?”
얼굴에 마른세수하며 혼잣말을 하는데,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얼마 안 되신 것 같아요.”
“우아앗!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자. 달빛 아래 애니가 앉아있었다. 목욕을 끝낸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달빛 아래 애니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보이고, 애니의 몸과 머리에서 따듯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 언제 와, 왔어? 왔으면 말을 하지.”
왔으면 말을 하지.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앉아있는 애니에 깜짝 놀라 상황을 묻자. 애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너무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어요.”
아까처럼 싸늘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호칭이 싸늘했다.
“주, 주인님이라니. 호, 호칭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보통은 러셀이라고 이름을 불렀는데, 주인님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쓰는 애니에게 조심스레 그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노예 주인도 아니고 주인님은 이상하니까.
하지만 내 지적에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애니.
“이실리엘님께 주인마님이라고 부르니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겁니다.”
“아니, 무슨 노예 주인도 아, 아니고 당연히 이상한 거 같은데?”
“그러면 주인어른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이거 신종 고문인가? 애니! 이런 식으로 항의 하기로 한 거냐? 그래 이것도 작전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 해주마. 내가 마음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나는 애니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 애니 편한 데로 하자 하… 하…”
“그나저나 이렇게 따로 부르신 이유는 뭐죠? 아무리 주인님과 저 사이라고 해도 다른 분들이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되도록 단둘이 만나는 건 피해주셔야 합니다. 주인님.”
“에이… 서, 설마. 누가 오해하려고 우리 둘을.”
달빛 아래 애니의 눈빛이 다시금 싸늘해졌다.
‘뭐, 실수했나?’
꿀꺽
“하긴, 하찮은 여관 여급 따위와 ‘높은’ 주인님의 관계를 오해하다니, 제 바보 같은 생각이었네요.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 이거 그거였다.
전생에 드라마 같은데 보면 남녀가 싸우는데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
남자가 여자와 싸우다 화가 나서 ‘아 씨발!’ 하면서 혼자 욕을 하면, 여자가 싸움이 끝난 후에도 며칠간.
‘오빠 씨발 년이 한 밥 먹어.’ ‘오빠 씨발 년이랑 키스하니까 좋아?’
라고 말하며 남자의 멘탈을 뭉개버리는 패턴. 말실수 꼬투리 잡기 패턴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하찮은 여관 여급’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겠지?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고 재빨리 여기 애니를 부른 용건을 말하기로 했다.
말이 길어져 봐야 나의 정신적 고통만 길어질 테니.
“아, 아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고. 그, 그래, 내가 애니 이렇게 따로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부, 부탁이 있어서 말이지.”
“‘하찮은 여관 여급’에게 무슨 부탁일까요? 주인님?”
‘애니도 환생했나?’
애니야 너 환생 전에 드라마 중독이었니? 전생의 드라마를 섭렵한 것 같은 애니의 반응에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니에게 말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어쩌겠나 내가 감당해야지.
“하, 하찮다니 저, 절대 아니야. 내가 이렇게 오늘 부탁하려고 부른 건, 믿을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런 거야. 아무렴. 여관에서 나랑 같이 제일 오래 생활했잖아? 그렇지?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을 꼽자면 당연히 애니뿐이고. 그러니까 애니를 부른 거지. 절대, 절대 하찮지 않아.”
내 말에 애니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애니야 너 그렇게 독한 애 아니잖아?’
“흠… 그, 그럼 부탁하실 게 대체 뭐죠?”
나는 조심스럽게 애니에게 새로 구상한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모험가 길드의 식당이 아까 부엌에서 이야기한 대로 개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길드의 제안으로 내가 그곳을 대신 운영하기로 했다는 것.
하지만 내가 여관과 식당을 두 곳 다 운영해야 하니.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 길드에서 부엌을 맡아줘야 하는데, 나의 요리를 대부분 할 줄 알고 믿을만한 사람이 애니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수인 둘이 음식을 테이블로 나르는 걸 도와줄 것이고, 천천히 다른 사람도 훈련 시켜서 요리 보조로 들어가게 되면, 애니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날 테지만. 당분간은 내가 교대해줄 때 외에는 길드에서 생활해야 해서 좀 불편하긴 할 거야.”
애니는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주인님은 얼마나 자주 오시는 거죠?”
“나야 열흘에 한 번 정도? 애니랑 교대해주거나 하루 정도 음식을 봐줘야 하니. 나도 거기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음식 준비되는 거 봐주고 오려고.”
“그곳에 숙소는 어떻게 되죠?”
“아 부엌에 딸린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애니가 쓰고 하나는 일을 도와주는 수인들이 쓰면 될 거야. 릴리아나 누님의 말로는 길드 건물이라 튼튼하게 지어서, 방음도 좋아서 밖에 용병들이 떠들어도 잘 안 들리고 아늑 하다고 했으니까. 직접 가서 보고 애니가 쓸 방이니 원하는 대로 꾸며줄게.”
“알겠습니다.”
애니는 짧게 대답했다.
애니의 알겠다는 말이 하겠다는 말인지, 이야기를 잘 들었다는 말인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애니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래, 그럼 충분히 생각해보고 알려줘.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말이야. 알았지? 결정되면 말해줘, 아직 닷새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말이야.”
애니와의 짧은 대화였지만 상당한 정신적 피로를 느끼며,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를 나서는 내 뒤로 애니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대답.
“어? 하, 한다고?”
“네, 주인님.”
“그, 그래. 고마워! 애니야 내가 주급도 많이 챙겨줄게!”
나는 애니의 하겠다는 대답에 당연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돌아오리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가장 큰 난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너무 쉽게 통과하자 맥이 풀려버릴 지경이었다.
“그래, 애니야 그럼 잘 자고. 며칠 후에 그란 폴 가서, 같이 방도 같이 꾸미고 주방도 애니가 사용할 거니 원하는 대로 꾸미자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애니를 뒤로하고 날 듯이 여관으로 달렸다.
‘와 무슨 압박 면접 본 후의 기분이네….’
물론 면접은 내가 당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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