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91화 (191/352)

〈 191화 〉 189. 위탁 운영 3

* * *

초록색 들판을 가르며 마차가 한참을 달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로리엘 녀석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내 뒤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진한 초록색의 자기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미역 줄거리같이 입에 문 로리리엘이 앞으로 고개를 빼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로리엘의 얼굴은 멍한 바보 같은 모습. 얼마나 꿀잠을 잤는지 입가에 흐른 침이 말라붙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부스스한 모습인데도 엘프는 종족이 좀 사기였다.

‘침 흘리며 자다가 일어난 모습도 예쁘네.’

자다 깬 모습도 예쁘니까.

“깼냐?”

“응”

“어제 순찰이라도 한 거야?”

마차가 덜컹거리는 상황에서도 하도 곤히 잠들었었기에 물어본 것이다. 얘가 자기 임무는 확실한 앤데, 이렇게 잠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로리엘은 세계수의 수호자. 종족을 보호하는 임무를 하던 군인이나 마찬가지인지라 한 번도 어떤 부탁 중에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내 물음에 로리엘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할 때 말을 하지, 나는 쉬고 있는 줄 알았지.”

로리엘 녀석은 대답도 하지 않고 딱 한 마디를 했다.

“밥”

“배고프냐?”

고개를 끄덕이는 로리엘. 얘는 요즘 이상하게 말수가 적어졌다. 며칠 전에 국왕 발바닥 찌르던 날에는 다른 사람들과 말을 잘했던 것 같은데?

뭔가 피가 튀고 그런 현장에서만 애가 빠릿빠릿한 느낌이랄까?

나는 옆에 있던 가방에서 빵과 물 탄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 육포를 로리엘에게 건넸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 하니까 일단 그거 먹어. 또 밥해 먹고 가려 하다 보면 늦을 거 같아서 그냥 달릴 테니까.”

잠시 후 로리엘이 물 탄 포도주를 조금 마신 후 육포를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말의 발굽 소리.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 외에는 특별한 것 없는 한적한 길을 계속 달리자 곧 지루함이 느껴졌다.

전생으로 치면 긴 터널을 혼자 운전하는 기분.

왠지 졸음이 오는 것도 같고 해서 로리엘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졸음운전은 위험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로리엘에게 물어봐야 할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이실리엘의 할머니 댁에서 로리엘과 밤에 나눴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기에 로리엘의 청춘사업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로리엘 근데 이실리엘의 할머니 댁에서 밤에 나랑 나눴던 이야기 기억나?”

로리엘의 우물거리던 입이 딱 멈추고 볼이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캬… 엘프 차도녀도 부끄러워할 때가 있네?’

이건 귀한 장면이었다.

로리엘이 애꿎은 빵을 노려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랑은 잘 되고 있어?”

고개를 도리도리 휘젓는 로리엘. 훈수를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딱 봐도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으니. 엘프들의 느긋한 시간관! 뻔했다.

“너 그렇게 엘프식으로 세월만 보내다, 다른 여자들이 채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너무 느긋한 거 아냐?”

내 말에 로리엘이 뜯던 육포를 내려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괘, 괜찮다. 어, 어차피 다른 여자들은 대부분 인간이니…”

대충 말을 들어보니 경쟁자가 있긴 한데 대부분? 많은가? 경쟁자가? 아직 남부 어가 서툴러서 그런가? 단수와 복수를 헷갈린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인간이니, 시간이 지나면 남는 건 미모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엘프인 자신뿐이라는 건가?

‘근데 우리 마을에 있는 남자면 다 인간인데?’

“로리엘 근데 남자도 인간이면 경쟁자인 여자들 사라질 때 같이 늙어 죽는 거 아냐?”

잠이 깬 후로 계속 멍청했던 로리엘의 눈이 마치 미처 몰랐던, 처음 들은 사실이라는 듯 처음 보는 크기로 부릅떠졌다.

놀란 로리엘을 태운 마차는 해 질 녘 까지 달려서야 웜 포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리엘 녀석은 나에게 팩트 폭행을 당한 후, 잠깐 정신이 나갔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나는 로리엘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로리엘에게 엘프식 시간관념의 문제점을 설명해 주었다.

북부에서 이실리엘의 감시를 받으며 살 때 엘프식 시간이라는 거 뼈저리게 경험했으니까. 무슨 약속도 기본이 열흘 후고, 느긋한 엘프들을 따라 살다 보니 무척이나 답답했으니 말이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서에 물든 나의 영혼은 엘프식 느긋함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이쪽 세계 자체의 느릿함도 견디기 힘든데, 엘프들의 시간 개념은 거기에 플러스알파니까 말이다.

그렇게 둘이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웜 포트. 로리엘은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뭐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나는 말을 풀어 마구간에 매어두고 마구를 정리한 뒤 여관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관으로 향하는 내 귀에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환호.

­찰그랑 챙챙

거기에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여관 안을 울리는 경쾌한 쇳소리.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시르케의 하프 소리에 맞춰 플로라가 홀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다. 플로라의 손과 발목에 팔찌와 발찌들 여러 개가 끼어있었는데, 그것들이 짤그랑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에는 용병들의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스럽게 플로라의 복장은 무희 복이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깐 왜 내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거지?’

내가 안도했다는 사실을 용납 못하고 정신이 혼란한 틈. 한 곡이 끝났는지 나를 발견한 플로라가 달려와 안겨들었다.

“러셀!”

“자, 잠깐! 머, 멈춰!”

하지만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플로라. 잠시 후 거대한 쿠션 두 개가 나를 두드리고 내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자기, 벌써 다녀왔나요?”

“어, 그, 그래 플로라 뭐 하고 있던 거야?”

“아니, 여관에 레우케 요정이 있다는 건,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사막의 무희와 레우케 요정은 환상의 어울림이라고요.”

뭐 환상의 궁합 같은 느낌인 것 같은데, 불만 많은 시르케 놈도 웃으며 하프를 튕기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프 켜달라고 해도 제가 싫으면 칼같이 거절하는 놈이니.

“그, 그래, 둘이 놀고 있어 나는 일이 좀 있어서…”

“치이… 러셀! 러셀!”

제일 귀찮은 둘이 알아서 짝을 이루어 논다는데,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나? 나는 플로라를 떼어놓고 재빨리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안에는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들과 한나 아주머니, 애니 토끼 수인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보자 곧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러셀! 다녀오셨어요.”

“러셀! 언제 왔어요?”

아내들이 달려와서 나를 반겨주었다. 퇴근한 가장의 귀환을 반기는 아내들의 환대. 크… 이래서 전생의 가장들이 퇴근을 좋아했구나? 물론 신혼 한정이라고 선배님들로부터 귀띔받긴 했는데…

“오늘 가신 일은 어땠어요?”

“아, 역시야. 오늘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아?”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익살스러운 표현을 섞어, 귀가한 가장의 영웅담으로 포장해 아내와 부엌 식구들에게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현장을 구경한 현장 특파원으로서 생생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아니, 그렇게 딱 부엌으로 들어가니까 젓갈 다리는 아니, 썩은 생선 삶는 냄새가 나지 않겠어? 릴리아나 누님은 들어가는 순간 구역질하면서 도망쳤다니까?”

“그, 그래서요?”

이실리엘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발레리와 리젤다도 고운 인상을 찌푸린 상태.

“세상에 말도 마. 그게 끝이 아니었어! 부엌으로 딱 들어가는 순간! 손톱에 시커먼 때가 낀 남자가 웃통을 벗고 온몸에 끈적거리는 땀을 흘리며 배를 벅벅 긁으며 스튜를 젖고 있는데!”

내 말에 부엌 안의 여자들은 구역질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나의 때마침 이라는 소리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

후후… 나의 동화 구현대회 수상 실력은 녹슬지 않았기에, 부엌 식구들에게 생동감 있는 현장의 참혹함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화덕 위를 기어가던 바퀴벌레 한 마리가 냄비 속으로 풍덩!”

“꺄아아악!”

“으으으…”

발레리가 비명을 지르고 이실리엘이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리젤다는 그래도 용병, 모험가 출신이라 인상을 쓰긴 해도 발레리나 이실리엘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

“그, 그래서요?”

“그 남자가 국자를 들더니 바퀴벌레는 건지려고 솥 안으로 국자를 넣더라고? 그런데!”

“서, 설마 아니겠죠?”

“아, 아닐 거예요! 그, 그렇죠 이실리엘님?”

“으아아아”

부엌은 이미 결말을 예상한 스포일러 관객들의 비명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결말을 장내에 투하하자 부엌 안은 곧장 아수라장이 되었다.

“국자로 바퀴벌레를 그대로 솥 안으로 뭉개 넣었어!”

“꺄아아아”

“우에엑…”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레리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실리엘과 리젤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레리를 끌고 밖으로 나가고, 한나 아주머니께서 구역질에 좋은 약초를 꺼내주신다고 따라나서자. 부엌 안은 토끼 수인 자매와 애니만 남게 되었다.

‘어?’

의도치 않았는데 절호의 상황이 생겨버렸다.

나는 나의 다음 사업의 최대 난관 애니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도 미소를 짓고 있는 애니에게 슬며시 다가가 말했다.

“저기 애니? 하, 할 말이 있는데, 있다가 저녁 식사 끝나고 밤에 잠깐 괜찮을까? 둘이 잠깐 이야기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

내 말을 들은 애니의 얼굴이 서서히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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