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186. 높은 엘프 보호구역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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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무구한 높은 엘프님의 목소리와 표정에 멍해진 것도 잠깐. 라페스빌은 정신을 차리고 남자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성국과 북부 왕국과 이견조율은 저희가 진행할까요?”
라페스빌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복잡한 외교 문제는 자신이 나서서 처리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니.
“아뇨, 여기 상급 이단 심문관인 시트라가 있으니, 그녀가 직접 성국에 의견을 전달할 것입니다. 북부는 뒤에 계신 에삭스의 수리아 왕녀께서 진행해주실 것이고요.”
“성국 자애와 순결 교단의 시트라입니다.”
“북부 에삭스의 수리아 나파로아입니다. 반갑습니다. 전하”
두 여자가 호명될 때마다 살짝 눈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분명 한 명은 자기 손가락을 자르자고 했던 목소리이고, 다른 한 명은 거기 호응한 목소리인데.
북부의 왕녀와 헬로나 추기경의 딸 같은 상급 이단 심문관이었다니. 맙소사.
구덩이에서 시작부터 자신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상급 이단 심문관과 북부의 피에 절은 전투광들의 심문에서 사지 멀쩡하게 살아나다니, 행정관과 자신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었다.
이단 심문관이라면 혀와 팔다리를 자르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심문을 시작하는 예도 있으니.
몰려오는 소름에 몸서리치며 행정관을 바라보자 행정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 놀란 눈으로 턱 아래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둘 다 냉철함과 피 살육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여자들인데, 남자의 호명에 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것.
라페스빌은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제가 아직 인사를 다 못 드린 것 같아 여쭙는 것인데? 높은 엘프님을 제외하고 다른 분은 관계가?
라페스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오두막 내부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남자의 뒤에 앉거나 시립 해있던 여자들이 뿜는 기세가 서늘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말을 실수한 것인가? 라페스빌의 땀방울이 다시금 귀를 적실 때.
자신의 질문에 남자가 쭈뼛거리며 대답을 주저하자. 여자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내가 될 겁니다!”
“그래요. 아내가…”
“그, 그렇다네요…”
남자가 결국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여자들의 대답에 아니, 아내면 아내고 아니면 아니지. 아내가 될 겁니다는 무엇인가? 라페스빌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아하! 아직 결혼은 하지 못한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구나!’
라페스빌은 내부를 살펴봤다. 인 외의 아름다움의 높은 엘프, 남색 머리의 날카로운 인상의 미녀, 빨간 머리의 엄청난 가슴 두 명, 분홍 머리 왕녀, 은발의 이단 심문관, 녹색 머리의 엘프.
세상에 높은 엘프가 있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미녀들을 이렇게나 많이 거느리다니, 다섯의 첩을 두고 있는 라페스빌도 이 정도는 아닌데. 역시나 무엇으로 보나 대단한 남자였다.
“조, 존경스럽습니다.”
라페스빌의 말에 남자가 헛기침으로 대답했다.
“크흠… 큼…”
생각보다 국왕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겁은 먹은 사람인가?
상당히 협조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에 이야기를 진행하기가 편했다. 시트라 씨와 수리아 왕녀가 발바닥을 찔렀다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미안한데 쪼끔 위로라도 해드려야지.’
“그러면 보호구역과 관련된 문서는 행정관님과 제 아내인 발레리가 맡아서 작성해주시고, 서로 연락할 방법이나 세부 사항들도 조율하시죠. 아, 그리고 성국 측에는 국왕께서 물심양면으로 아주 애쓰셨다고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씨익 웃으며 국왕을 바라보자. 국왕이 표정이 기쁨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오셔서는 험한 일까지 당하셨는데 뭐 그 정도 말치레야…
“그, 그렇게까지! 제가 그러면 성국 측에 조금 위신을 세울 수 있겠군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씀드리기는 좀 조심스러운데, 문서상 그리고 실질적으로 저희 측 대표인 이실리엘의 권위를 그러면 국왕에 준하여 대우해 주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북부 왕녀와 리젤다의 반응으로 봤을 때, 문서상에 정확히 이 부분을 언급 안 해두면. 이것 때문에 북부에서 문제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물은 것이었다.
내용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북부에서는 국왕들도 예를 다하는 모습인데 남부에서 동격으로 취급하면 거기서 또 태클이 들어올 수 있으니 말이다.
“국왕에 준하다니요! 당연히 저희가 성국의 성하처럼 존경하는 높은 분으로 예를 다해서….”
국왕의 말에 수리아 왕녀와 리젤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면 서로 만족했고, 검댕이 묻은 얼굴로 애쓰는 국왕에게 발바닥 찔린 걸 잊을만한 선물 하나만 더 안겨주면, 다른 마음 안 품고 만족해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을 열어 왕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높은 분으로 대접해 주신다면, 가지고 오신 선물 또한 조공에 가까운 것이군요?”
“그, 그렇지요! 조공! 높은 분께 제가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내가 왕에게 선물의 성격에 관하여 물은 이유는 왕을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해서나 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물은 것이다.
그 겸에 정치적인 이익도 조금 보고 말이다.
왕이 우리에게 준 것이 하사품이거나, 사죄의 예물이면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 하사품이야 감사하게 받으면 되고, 사죄의 예물이면 받는 것으로 상대방의 사죄를 받아준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물론 하사품이라면 왕녀와 리젤다가 길길이 날뛰겠지만.
하지만 전달해준 물건이 조공이라면, 앞으로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선물을 해야 할 의무도 생기는 것이다.
형이 동생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상대방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예전에 그래서 조공무역이라는 말도 있었지 않은가?
“조공에 가까운 선물이라면 저희 측에게서도 답례를 해드려야겠군요?”
내 말에 왕과 행정관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저었다. 아마 둘은 나한테 말려서 말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실리엘 준비한 걸 부탁해.”
“네, 러셀.”
이실리엘이 내 부탁으로 준비해서 가지고 온 물건을 품 안에서 꺼냈다. 이실리엘의 품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반지나 넣을법한 주먹만 한 상자였는데.
이실리엘은 그것을 탁자 위로 올리고, 앞으로 밀어 보내며 말했다.
“사죄와 존경의 선물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드리는 선물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열어 왕에게 보여주며 말을 보탰다.
“하하… 그, 발바닥의 상처 치료에도 도움이 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상자 안을 본 행정관과 왕의 얼굴이 굳어지며,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하더니. 잠시 후 왕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제가 발바닥에 상처를 이, 입었던가요? 맛있는 식사와 목욕을 한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하하…”
왕의 웃음에 발레리와 시트라 씨도 따라 웃었다.
“호호호…”
“아하하…”
말이 통하는 분이었다.
상자 안에 넣은 것은 백단목의 제법 큰 조각. 발레리가 백단목을 가죽 주머니에 대충 넣어서 취급하니,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몇 번 보였기에. 그란폴의 공방에 특별히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주문해 만들어둔 상자이다.
아까 로리엘이 왕의 발바닥까지 쑤셨다기에 혹시 몰라 치료 약으로 준비한 것인데, 확실히 어떤 상황 어떤 곳에서도 통하는 만병통치약이랄까?
환자가 씻은 듯 나은 자신의 상처를 기억도 못 할 정도니, 말이다.
뭐 정치적 의미로는.
‘형이 인마! 이렇게 통 큰사람이야. 잘 모셔라 알았지?’ 정도의 의미로 전달한 것이랄까?
발레리와 행정관의 세부적인 조율이 끝나고, 각자 문서에 서명하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긴 대화가 끝나고 믿을 수 없는 선물을 손에 쥔 라페스빌은 구덩이에서 더러워진 의복의 세탁과 피로를 풀기 위해서 하루 더 묵고 가라는 러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러셀이 풀코스라고 명명한 뜻 모를 극진한 대접을 받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 길을 나선 참이었다.
연락을 위해서 기사 둘을 남겨두었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란 폴까지 믿지 못할 호위가 붙었으니 말이다.
선물로 받은 백단목 상자를 다시 한번 열었다 닫을 때 머리 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이라는 것, 상당히 느리구나? 다 끌고 날아가고 싶은데, 이실리엘이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 답답하네.”
우르릉
상급 정령이 머리 위에서 그란 폴 근처까지 자신들을 호위해 주라는 높은 엘프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저자세로 나간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했던 적도 있지만, 따라오던 호위가 멀리서 눈치를 보던 늑대 무리를 향해 벼락을 내리꽂으며 한 말을 들은 순간. 손안에 든 선물과 호위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러셀이 힘쓰는 거 한번 보여주라고 해서 쓰는 거니까 잘 봐?”
그래, 우호적일 때는 손에든 백단목처럼 달콤한 보상이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저 평원을 숯덩이가 되어서 구르는 늑대들 같은 모습이 될 거라는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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