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185. 높은 엘프 보호구역 9
* * *
아무래도 아내들도 여자이고 반짝이는 보석과 향유가 드러나자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어머…”
특히 상인인 발레리와 리젤다가 관심을 보였는데, 정작 제일 신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자기, 저 이거 하나 가져도 되죠?”
어느새 향유가 가득 든 상자에서 향유 한 병을 꺼내 흔들며 나를 바라보는 플로라.
나는 이마를 한번 부여잡고 말했다.
“일단 어떤 의미의 선물인지 확인하고, 받을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까 가만 놔둬요.”
“칫…”
플로라의 입에서 실망한 소리가 나오고, 플로라와 아내들이 상자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왕의 입에서 들려온 소리.
“의미라뇨 그저 선물입니다. 저희 남작이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기에 드리는 사죄의 공, 선물이라고나 할까요? 부디 받아주시고 노여움을 풀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활짝 웃어 보이는 왕. 시체 태운 구덩이에서 굴러서 그런지 행정관과 같이 얼굴 여기저기에 검댕이 묻은 것이 왠지 애처로웠다.
‘아까 로리엘이 발바닥까지 쑤셨다고 했는데…’
“방문한 목적은 단순히 그것뿐인가요?”
높은 엘프의 패시브인지 엘프의 패시브인지, 아니면 이실리엘의 패시브인지. 항상 높은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이실리엘이 입을 열어 왕에게 물었다.
이실리엘은 정말 단순하게 목적은 그게 다냐고 물은 것 같은데, 왕이 느끼기에는 조금 다른 의미였던지. 왕은 다시 한번 움찔하며 몸을 떨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에게 속한 영지에서 신께 벼락을 맞아 죽어도 시원치 않은 대죄인이 두 명이나 나왔기에, 저희가 직접 높은 엘프님을 뵙고 사죄를 드리고 재발 방지를 약속드리고자…”
재발 방지라는 말이 관심을 잡아끌었기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재발 방지라면 어떻게?”
내 물음에 왕의 입에서 믿기 힘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란 폴 이남 지역 전체를 높은 엘프님의 영지로…”
“아니요. 그건 안될 말입니다.”
왕의 말을 자르며 산통을 깨는 수리아 왕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영지로 준다는데 왜? 북부에서 귀족을 하라면 좀 그렇지만, 사는 땅을 영지로 준다는데? 나도 주님 한번 돼보고 싶다고 건물주님! 여기는 영 주님인가?
전생에 이세계물은 왕이나 귀족으로도 시작하던데… 나는 고아, 용병, 종마. 제길.
좋은 분위기 다 망치는 수리아 왕녀를 바라보며 이유를 요구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수리아 왕녀가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데?’
“내리는 영지를 받는다는 것은, 신하가 된다는 것. 이실리엘님이 인간 왕의 신하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무렴요. 높은 엘프께서 인간 왕의 신하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 말에 옆에 앉은 리젤다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군다나 영지를 내린다면 작위도 내려야 할 것인데, 어떤 작위를 내리려 하시는지요? 설마 ‘하찮은’ 남작이나 자작, 백작 따위라면 이실리엘님을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작, 자작, 백작이 왕녀님한테는 하찮은 것이었구나…’
높은 엘프의 열렬한 신봉자인 북부 출신들은, 감히 어디 남부의 왕 따위가 높은 엘프인 이실리엘의 주군이 될 수 있는 것이냐며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북부 쪽은 엘프들도 조심스럽게 대하지만, 높은 엘프는 신비에 싸인 인 외의 높은 존재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니 이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듯하네?’
“신하의 예의가 아닌, 그저 영지만을…”
왕이 놀란 얼굴로 실수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수리아 왕녀는 다시 한번 말을 잘랐다.
“아니요. 이실리엘님은 높은 엘프. 긴 세월을 사시기에 전하의 후손들이 보위를 이으며 주군이 계속 바뀔 텐데, 전하의 자식들도 마냥 같은 태도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지요.”
확실히. 개중에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군신의 예를 요구할 수도 있으니. 권력은 사람을 가끔 정상이 아닌 상태로 만드니…
수리아 왕녀의 말에 국왕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공짜로 굴러 들어오는 권리를 마다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이고, 영지를 주신다는 감사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러셀님, 설마 받아들이시려고요? 절대 안 됩니다. 이실리엘님의 권위가!”
“러셀, 절대 안 돼요!”
내가 관심이 있다는 투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수리아 왕녀와 리젤다가 기겁하면서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정작 이실리엘은 위엄인지 뭔지 관심도 없는데 항상 어디를 가나 추종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왕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보호구역이라고 들어는 보셨는지?”
라페스빌은 간밤의 일이 마치 꿈만 같아 말을 타고 웜 포트에서 멀어지면서도 계속 높은 엘프님께 선물로 받은 것을, 품에서 꺼냈다 한번 보고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옆에서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행정관의 모습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을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였다.
“확실히 말이 통할 것이라더니 대단한 분이었지?”
자신이 누구를 말하는지를 눈치챈 행정관이 자기 말에 공감하듯 말했다.
“확실히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 지혜로 저희의 불안을 잠재워주시기까지… 확실히 높은 엘프와 북부의 왕녀, 성국의 상급 이단 심문관까지 거느리실만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간밤의 일에서 라페스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높은 엘프가 용처럼 대단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분의 고삐를 틀어쥐고 있는 건, 여관주인이라는 그녀의 남편이 확실하다고 말이다.
어젯밤 대화를 손에 쥔 선물을 바라보며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혹시, 보호구역이라고 들어는 보셨는지?”
그녀의 남편이라는 여관주인의 입에서 나온 생전 처음 듣는 단어.
그의 설명으로는 그란 폴 이남에 엘프를 보호하는 구역을 만든다는 것. 내부는 엘프들의 법으로 다스리고 결코 어떤 무력도, 단체도, 국가도 결코 넘보지 못하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란 폴 이남이 엘프들의 보호구역으로 선포되면, 엘프 중 높은 분. 높은 엘프님이 당연히 그곳에 수장이 되시니, 당연히 그 땅은 높은 엘프님이 다스리게 된다는 것.
그러나 자신의 영토 끝이라 자신의 선포는 모르겠지만, 아까 자신을 겁박했던 여자의 말대로 자신의 후대나 다른 나라들에서의 인정은 또 다른 문제였기에, 자신이 그에 대한 우려를 말하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국과 북부 다섯 왕국의 지지와 보증이라면 어떻겠는지요?”
확실히 북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북부 다섯 왕국과 성국, 그리고 당사자인 자신이 보증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긴 했다.
일단 성국의 의사에 대놓고 반기를 들 나라는 없을 것인데, 당사자인 자신과 다섯 왕국이 연합한다면 무조건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은 확실했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북부 왕국과 성국을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우호적이라도 실질적 이득이 없고서는, 성국이나 북부 왕국도 마냥 지지해 주지는 않을 것인데요?”
자기 말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국과 북부 왕국, 전하께서 제일 불안해하는 것을 제가 해결해 드리면 됩니다.”
“저, 저희가 불안해하는 것 말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남자가 옆에 앉은 높은 엘프에 머리를 사랑스러운 눈빛을 한 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집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드리면 됩니다. 우리 집 고양이는 아무 사람이나 물지 않는데, 자꾸 오해하시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요.”
남자의 말에 옆에 앉아 머리에 쓰다듬을 받던 높은 엘프가 자신한테 했던 싸늘한 목소리가 아닌, 귀여움과 애교가 뚝뚝 떨어질 것같은 목소리로 눈을 크게 뜨고 남자에게 물었다.
“러셀,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었나요? 방울을 달아주면 정말 귀엽겠네요!”
맙소사.
누가 저런 그녀를 용같이 무섭다고 생각하겠는가?
그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애쓸 때. 그의 입에서 고양이와 방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여기 제 예쁜 아내가 보호구역 밖으로 나갈 때, 성국과 주변국에 목적지를 전달해드리면 되는 것이죠.”
그래,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구걸하듯 비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용 같은 힘을 지녔다는 그녀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부디 조용히 계셔주셨으면 하는 바람 아니겠나? 그리고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실 때 혹시라도 알려만 주시면,
문제가 생길만한 것은 미리 다 정리하면 되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국이 이단 심문관을 파견한 것도 아마도 같은 이유일 것이니, 성국이나 자신을 설득할만한 이유로는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이 정도 이유라면 성국의 늙은이들도 만족할 것이고, 자신도 성으로 돌아가서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도 그의 부인인 엘프도 그제야 고양이가 누구고 방울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아마 자신만 알아차린 것 같았다.
“러셀, 그러면 앞으로. 저, 방울 달고 있어야 하나요?”
그의 부인인 높은 엘프의 입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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